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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istence_of_nothing 2023. 1. 31. 16:08
인간에게는 종교 회로가 있다. 과학 만능의 오늘날 세상에서도 종교 회로는 동작하며, 비록 그 수는 지속적으로 감소하겠지만 종교가 사라지는 세상은 상상하기 어렵다. 주관적인 신비 체험은 인류 역사의 초기에서 부터 현재까지 진행형으로 존재한다. 울리히 슈나벨의 "종교는 왜 멸망하지 않는가?" 라는 책에서 이러한 주관적인 신비 체험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제시한다.

2016년 미국 유타대 제프 앤더슨 교수는 종교인들에게 여러가지 질문을 하면서 대뇌에서 활성화되는 부위가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한다. fMRI는 뇌 혈류 변화를 감지하여, 뇌의 어떤 부위가 활성화되는지를 판별하는 기술이다. 모르몬교 신도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실험에서 중뇌 부분의 감정에 관여하는 부분인 limbic system(변연계)와 가치판단을 하는 전전두엽 피질이 활성화됨을 밝혀낸다.

2018년 미국 예일대 연구팀은 마찬가지로 fMRI 기술로 영적 체험상태에서 뇌의 두정엽(parietal lobe)의 혈류 변화를 보고한다. 아래에서 붉게 표시된 부분이다. 두정엽은 체감각과 신체 여러부위로부터의 촉각/압각/통각의 정보를 처리하는데, 명상시 이 부위의 혈류량이 현저하게 감소하여, 자신의 신체에 대한 느낌이 사라지는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후속 연구에서는 반대로 두정엽이 활성화되는 결과도 보고된다.
사실은 이러한 실험들보다 먼저, 캐나다 로렌시안 대학의 신경과학자 마이클 퍼싱어 교수, 스위스의 올라프 블랑케, 요크대학의 이즈마 교수등 다양한 연구결과들에서 측두엽과 두정엽 사이의 각회(angular gyrus)를 전기적으로 자극하여 유체 이탈 현상을 경험한 사례를 보고한다. 실제로 퍼싱어 교수는 오토바이 헬멧을 개조한 갓헬멧을 만들었으며, 수년전 카이스트 정재승 교수등 20여명의 체험자들을 대상으로 신체와 분리된 듯한 느낌을 재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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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도 인간도 꿈을 꾼다. 꿈에서는 외부에서 자극이 없지만 볼 수있고,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다. 종교의 환시들 중 많은 부분도 꿈의 계시를 통해서이다. 꿈에 대한 여러가지 가설이 있지만 명확한 가설은 하나도 없다. 오늘 새벽 뒤척이다가 꿈을 꾸는데, 애들이 아기로 돌아가고 세째는 어디갔지말고 와이프에게 물으니, 작년에 사고로 죽었다는 얼토당토 않은 얘기를 하고, 그 얘기에 갑자기 슬픈 마음이 들어서 울다가 잠에서 깼다. 꿈의 스토리는 부분 부분적으로는 연결되지만 큰 맥락에서는 전혀 말이 되지 않는 내용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비현실적이라고 자각을 못한다.

동물과 인간의 학습 메커니즘은 비슷하다. 다만, 그 깊이가 다를 뿐이다. 기존의 지식이 있고, 이것을 통해서 예측을 하며, 예측 오차에 따른 보정이 가해진다. 그러면 다음 예측은 현재 예측과 달라지고 이러한 과정은 학습을 통해서 계속 반복된다. 수학적으로 이러한 것을 베이지안 (Bayesian) 추론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에 의한 학습 방법은 큰 단점이 있는데, 어떤 경험은 죽음이나 큰 부상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 학습은 되겠지만 그 학습이 생존으로 연결되지 못한다. 알파고는 처음에 고수들의 바둑을 보면서 학습했지만 알파고 제로는 스스로 대결을 하면서 실력을 일취월장시킨다. 고수들의 대국은 기껏해야 수천~수만 판 정도이겠지만 스스로 데이터를 만들어낼 경우 가지수는 엄청 많기 때문이다.

꿈은 많은 경우 현실 세계의 모방인 경우가 많고, 혹자들은 낮에 축적된 기억 중 불필요한 부분을 버리면서 정보를 정리하는 기능을 한다고 추측한다. 이것도 의미가 있다. 기억을 불러내고 재구성하여 새롭게 저장하는 것은 정보의 추출을 용이하게 한다. 예를 들면 윈도우 운영 체계에서 indexing을 하면, 검색을 순식간에 수행해 낼 수 있다. 다만, 이를 위해서는 주기적으로, 현재의 indexing들을 재정비할 필요가 있기에,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별로 사용하지 않는 휴지 시간을 이용하여 이를 수행한다.

또다른, 최근에 각광받고 있는 이론은 꿈은 현실을 모사하는 일종의 시뮬레이션, 가상 현실 환경이라는 것이다. 꿈속에서 때때로 감정이 상당히 과장되는 경우가 있으며, 때로는 남들과 불필요하게 다투는 경우도 있다. 이를 통해서 미래에 나에게 다가올 시나리오에서 나의 행동 패턴을 조정할 수도 있고, 감정적 트라우마에 대비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도 사실 일리가 있는 이론이다. 때로는 수학 문제를 고민고민하면서 자다가 깨어보면 그 다음날 쉽게 풀리는 경우가 많다.

2014년 Bengio 교수님의 Ian Goodfellow박사는 GAN (generative adversarial network)이라는 재미있는 신경회로망을 발표한다. 보통의 기존 신경회로망이 입력 신호를 분류하여, 현재 그림이 사람인지 토끼인지 등을 판별하는 classfier로 주로 사용된 데 반해, GAN 구조에서는 정보를 입력하면 사람의 모양도 토끼의 모양도 만들어낼 수 있으며, 그렇게 만든 그림으로 부터 다시 그것이 사람인지/토끼인지를 판별할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의 신경회로망이다.

GAN은 인간들이 정보로 부터 세상을 창조하는 원리와 구조적으로 유사하다고 생각된다. 우리가 꿈을 꿀 때,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한 쪽에서는 세상을 만들어내고, 그 꿈속에서 판단의 기능이 제한된 꿈속의 "나"는 그러한 세상에서 실제로 보고 만지고 느끼고 감정의 동요를 겪는다. 그것은 짧막한 스토리들의 불연속적인 연결이지만, 그 모든 것들은 나름의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기술들을 활용하여, google이 꾼 꿈, google이 그린 그림, deep fake 등 수많은 인공적인 사진들을 합성해 내고 있다. 얼마전 앞으로 상영될 인디애나 존스 5편, "Indiana Jones and dial of destiny" 티저 예고편에서 deaging 기술을 활용하여 젊은 날의 해리슨 포드를 재현한 영화를 발표한 적이 있다. 오늘날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디지털 인물을 만들 수도, 어린 시절의 스타, 혹은 나의 모습을 재현할 수 있는 기술을 만들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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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철학에 관한 얘기인가, 아니면 종교에 관한 얘기인가... 답은 둘다 이다. 철학으로서의 불교가 있고 종교로서의 불교가 있다. 나는 당연히 철학으로서의 불교만 취하지만, 대부분의 불교신자들, 특히 우리나라의 불자들은 다수가 종교로서의 불교를 믿고 있다. 원래의 불교는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수련법이자 자력으로 구원을 성취하는 자력 신앙이었다. 그러나, 초기 불교가 대승 불교 이론으로 중무장하는 과정에서 보살이라는 슈퍼스타에 의한 구원이라는 편한 길을 택한 민중들에 의해 타력 신앙으로 변질된다.

붓다는 깨달음을 위하여 숱한 고행을 시도하지만 끝내 실패한다. 고행으로 기운이 빠진 붓다는 여인의 우유죽을 먹고 기운을 차리고 어릴적 편안한 상태에서의 수행을 떠 올린다. 그 후 보리수 나무(pippala)를 등지고 강물에 흐르는 평온한 풍경을 바라보면서 존재에 대한 깊은 사유를 시작하고 얼마있지 않아 사성제(고집멸도), 삼법인(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과 연기의 원리를 발견한다.

부처가 깨달은 내용은, 오늘날의 기준에서 보면 그렇게 심오하지는 않다. 우주의 운행 원리를 과학과 수학이라는 첨단 이론으로 무장한 우리가 볼 때는 그렇다는 말이다. 일체개고의 주체인 자아가 허상이라는 것, 우주 만물은 causality에 의해서 부처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기계적으로 연기되어 운동한다는 것,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없고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있는 파동과 입자의 이중성 등, 많은 부분은 그 당시에는 이해하기가 난해했겠지만 오늘날 우리는 그 의미를 좀 더 정확히,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부처가 살아있을 때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모든 질문은 그에게 가서 물어보면 되고, 그가 시키는 데로, 그가 수행하는 것을 그대로 따라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의 사후, 인간들의 기억의 나약함으로 인해, 기억하는 것은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기억을 파괴하고 재창조하는 과정이라는 사실... 그로 인해, 분명히 같은 얘기를 들었을법 한 제자들 사이에서 부터 균열은 시작되고 확대된다.

사실, 이것은 불교만의 문제는 아니라, 모든 종교들의 태생적 문제였다. 종교 창시자가 있을 때는 구전되어 오다가 후대에 경전이 쓰여질 때, 창시자의 의도는 다양하게 해석되고 각종 분파가 발생한다. 이 과정에서 소수 종파는 비록, 창시자의 의도에 가장 부합되었다고 하더라도 권력 경쟁에서 밀려서 이단시 되고, 살아남은 자의 교리가 창시자의 뜻으로 둔갑한다. 어쩔 수 없다. 텍스트는 저자를 떠난 순간에 그 자체의 생명력으로 살아 숨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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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의 사후, 기억에 의존하여 재구성된 다양한 해석들이 양산된다. 이를 부파 불교 시대라고 부른다. 부처의 사후 얼마 있지 않아 불교의 교리는 제자 마하가섭의 주도아래 삼장 중 경/율을 경전으로 완성하는 1차 결집으로 정리된다. 1차 결집은 경/율에 대한 단순 정리였으므로 큰 문제는 되지 않았지만, 보시로 화폐나 소금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해석차이로 시작한 2차 결집을 계기로 보수적 해석의 상좌부(소승, 테라바다)불교와 진보적 해석의 대중부 불교로 분리(근본 분열)된다.
1. 설일체유부
변하지 않는 아트만으로서의 자아는 없지만, 인연이 뭉쳐서 생긴 상으로서의 자아는 존재한다. 자아는 허상이지만, 이러한 자아를 있게만든 혹은 구성하는 그 무엇으로서의 실체, 법이 존재하는 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이를 법체론이라고 하는데, 설일체 유부는 "아공법유", "삼세실유법체항유"론으로 과거/현재/미래를 관통하는 그 무엇인가가 있으며, 그것이 무엇인지를 하나하나 정리하는 작업을 한다. 설일체유부는 보편자 개념의 실제성을 주장하는 실재론(유명론에 반대)의 느낌을 풍긴다.

2. 경량부
설일체 유부가 아트만의 빈자리를 채울 영원한 존재를 도입했다면, 경량부는 그 극단적인 반대, 즉, 모든 것은 우리의 관념이 만든 상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한다. 원래 아무것도 없지만, 우리의 마음이 현상을 만들어낸다고 얘기한다. 그렇다고 해서 경량부의 주장이 유심론은 아니고, 실체가 존재할 지 아닐지 모르지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마음에 맺힌 상만을 인식할 수 있다는 칸트의 물자체 개념에 더 가깝다. 그러나 윤회의 대상은 필요하기에 "일미온"이라는 유식학의 "아뢰야식"과 유사한 종자식의 개념을 도입한다.

사실, 내게는 현재 한국이나 중국 불교의 모습이 아니라, 오늘날 남방에 퍼진 상좌부 불교가 부처의 원래 말씀에 더 가까운 것이 명확해 보인다. 물론, 설일체유부와 경량부 해석 모두 부처의 원래 취지와는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최소한으로 자력으로 해탈에 이른다는 점, 위빠사나 혹은 사마타 수행법을 통하여 마음의 다스림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문제는 사실, 초기 불교에서 시작했지만, 그 교리를 철학적으로 더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켰지만, 웬지 낯선 모습으로 재 등장한 대승 불교에 관한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대승 불교와 함께 들어온 수 많은 존재들과 이야기들에 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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