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사

하이데거

existence_of_nothing 2021. 3. 6. 10:26

존재와 존재자, 존재와 시간, Martin Heidgger(1889-1976)

 

하이데거는 철학사에 있어서 중요한 인물 중 한명이다. 흔히들 실존주의 철학자로 분류하지만, 본인은 대체 실존주의가 뭐냐, 나와 실존주의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자신을 그렇게 분류하는 것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보인다. 그러나 본인의 의도와는 관련없이 그의 철학은 샤르트르와 카뮈의 실존주의 철학과 문학에 큰 영향을 준다. 하이데거의 철학에 있어서 독특한 점은, 다른 철학자와는 달리 존재자(Seiende)가 아닌 존재(Sein)에 대한 사유를 펼친 데 있다.

 

하이데거에게 존재와 존재자는 다르다. 존재자는 시계, 의자, 나무 같은 전통적으로 우리 주변에 있는, 존재하는 그 무엇들이다. 그 존재자들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데아의 환영인가 아니면 존재자 자체에 숨겨진 목적인이 발현한 것인가를 얘기할 때의 존재는 존재자를 의미한다. 철학은 존재자에 대해서 많은 사유를 하였으나 정작 존재자를 존재하게 만든 배경인 존재에 대해서 아무도 묻지 않았다고 얘기한다. 존재란 무엇인가? 그것은 존재자를 존재자로 있게 한, 혹은 존재자를 그렇게 규정하는 그 무엇이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전기 철학과 후기 철학에서 일종의 전회를 이루기에 그가 말하는 존재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다양한 독법이 존재한다. 지난번에 그에 대한 자료들을 읽을 때에는 존재자를 존재하게 만든 (신비스러운) 그 무엇으로 독해했지만 (실제로 그것은 하이데거 후기철학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이번에는 그것보다는 존재자를 존재자로 의미 붙이는 그 무엇으로(하이데거 전기 철학) 느껴진다. 존재를 이해하려면 무엇보다도 그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존재자, 현존재 (Dasein)인 인간에 대한 분석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얘기하고 “존재와 시간 (Sein und Seit)”의 많은 부분을 현존재에 대한 의미 분석에 할애한다.

 

세상에서 철학적으로 생각하고 사유하는 이들이 많지 않다. 대부분은 세속에 몰입되어, 잡담과 호기심, 애매함 속에서 삶의 본질이나 의미보다는, 영원히 존속할 것처럼 착각하는 현실에서의 만족감을 높이기 위해 살아간다. 이러한 것을 현존재의 퇴락, 현실 세계에서 자기 존재의 본래성이 배제된 삶, 비 본래적 실존(uneigentlich Existenz)을 살아간다고 하이데거는 얘기한다. 우리 세인(das man)들은 모두가 죽음을 선고받은 사형수이지만, 정작 우리들은 그러한 사실을 온갖 잡담들로 은폐하고 영원히 살 것처럼 현재를 살아간다.  

 

불교에서 부모미생전 본래면목(父母未生前 本來面目)이라는 화두가 있다. 곰곰히 생각해 보자. 나는 언제부터 나였던가, 내가 나이기 이전은 무엇이었을까, 현재의 나는 무엇이며 결국 나는 무엇이 될 것인가? 이 중 가장 쉬운 질문은 나는 결국 무엇이 될 것인가일 것이다. 우리의 가장 확실한 미래는 죽음이다.

 

현존재에게 죽음은 아주 독특한 현상이다. 현존재의 가장 확실한 가능성이면서도, 현존재가 경험할 수 없는 가능성이다. 그러나, 현존재는 죽음을 맞이하지 않고도 죽음을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을 죽음에의 선구(das Vorlaufen zum Tode)라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죽음을 미리 생각할 수 있는(이것을 현재를 초월하여 미래로 자기를 기투(Entwurf)한다고 얘기한다) 유일한 존재, 현존재이다. 우리 모두가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안다고 무엇이 달라지는가? 현존재의 본질인 무성(nothingness, Nichtigkeit des Daseins)과 시간의 본질인 유한성을 깨닫는다.

 

이렇게 죽음에의 선구를 통해서 우리는 현존재의 존재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존재의 본질은 무(Das nichts)이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나 결단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세계에 피투(Geworfenheit)되어(내던져져) 다른 존재자들을 도구로서 사용하면서 세계 내 존재(In-der-Welt-Sein)로 비본질적 실존을 영위한다. 이것을 현사실성(Faktizitat)이라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현실에서의 나는 어떤 모습인가, 비본래적 실존을 사는 세인들에게 자기 자신은 은폐되어 있다.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만들어진 욕망을 욕망하고, 타인들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하고, 이유를 정확히 알기 어려운 사물이나 사람에 대한 집착을 하지만 정작 그것들을 추구하는 주체인 자신을 깊이 생각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것은 아무 생각없이 길을 가다가 문득 솟아오른 “여기가 어디지”라는 생각일 수도 있고, 깜깜한 밤에 고요한 방안을 짓누르는 어둠의 무게일 수도 있고, 이유없는 불안감, 혹은 죽음을 앞에 둔 절망감일 수도 있다) 문득 일상 세계의 낯섦이 느껴질 때가 있다. 샤르트르의 소설 “구토”의 주인공 “로캉탱”처럼 말이다.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상류층을 동경하던 이반은 신분 상승을 위해 상류층 가문의 딸과 결혼하지만 그녀의 간섭, 잔소리와 낭비벽에 가정에 회의를 느끼고 자신의 직업에 몰두하고, 세속적 성공을 도모하는 도피적 삶을 살아간다.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던 어느날, 갑자기 원인모를 죽음의 병이 그에게 다가온다. 이유없이 찾아온 죽음에 처음에는 분노하다가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고통과 공포에 사로잡힌다.

 

육체적 고통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지나서 죽음을 목전에 둔 그 순간 자신의 삶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자신이 추구한 모든 관습적 생활방식이 모두 의미가 없었음을, 제대로 살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삶에 대해서 참회하고 가족들의 고통을 진정으로 덜어주려고 하면서부터 그에게는 고통과 공포가 사라진다. 그는 죽고, 타인들은 자신들의 실존적인 죽음이 아니기에 또다시 죽음을 은폐한 채 그냥 어제의 그 날들을 그대로 살아간다.

 

현존재는 존재 혹은 의미는 세계-내-존재 로서의 마음씀(sorge)이다. 즉 현존재들은 타 현존재들을 배려(Fursoge, 교류)하면서 다른 존재자들을 고려(besorgen)하면서, 다른 존재자들을 도구로서 활용하면서 살아가며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다. 현존재는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는 유일한 존재자이며, 자신이 죽음을 향한 존재 (Sein zum Tode), 즉 죽음이 삶과 동반함을 인식할 수 있는, 자신을-앞질러-있을 수 있는 존재이다.

 

우리들은 흔히, 우주의 시초부터 종말까지 직선적으로 흘러가는 크로노스적인 시간을 생각하지만, 베르그송이나 하이데거에게는 사건으로서 성큼성큼 다가오는 카이로스적 시간이 본래적 시간이다. 또한 세상에 피투되어 죽음을 향해서 다가가는 현존재들에게 실존적인 시간은 시간적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그렇게 시계에 따라 진행하는 그것이 아니다. 이것을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의미는 시간성이라고 얘기하고 철학자들은 어려운 용어로 "시간은 현존재의 존재 지평(Horizonte der Existenz)이다"라고 얘기한다.

 

죽음에의 선구를 통해서 현존재를 세상에 위치시키고, 낯선 세계에 피투(Geworfenheit)되어 존재하는 자신을 인식하며, 그 안에서 다시 가능성으로의 미래를 설계하는 것(부정성과의 근원적 투쟁), 그 시간성을 실존이라고 하이데거는 주장한다. 그리고, 그러한 현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자각은 시간이 주어진다고 자동적으로 자각하게 되는 과정이 아니고, 현존재가 스스로 그러한 과정을 만들어야 하기에, 시간성이 자기 시숙하는 것이 존재, 즉 "존재는 시간(성)"이다라는 의미로 책을 명명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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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은 난해한 철학책들 중에서도 난해하기로 유명하다. 사전에도 없는 말을 100여개나 만들고, 사전에 있는 단어도 그 의미로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하다. 철학에 관심이 없는 분들이 그의 철학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가치는 없을 것이다. 한나 아렌트에게 한 비겁한 행동, 짧은 기간이지만 나치에의 협력/추종 경력 등은 인간적으로도 별로 동감이 가지 않게 만든다.

 

하이데거는 1889년 독일 바덴주의 인구 4천명의 촌마을 메스키르히에서 태어난다. 어머니는 농부집안 출신이고, 아버지는 성장지기여서 하이데거는 술창고를 지키는 일로 생계에 일조한다. 형편이 어려웠지만 그의 총명함을 안타깝게 여긴 메스크리히 본당 신부가 장학금을 주어 프라이부르크 대학에 보내어 신부수업을 받게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건강 때문에 이를 포기하고 철학에 전념하기로 마음을 굳힌다.

 

1916년 후설의 연구조교로 시작해서 후설의 후임으로 1928년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교수가 된다. 1933년 대학교 총장이 되어 나치에 입당하고 “독일 학생들에게 고함”이라는 연설로 나치 참여를 독려하고 유대인이였던 후설의 연구활동을 중단시키고 대학에서 몰아내지만, 바로 이듬해1934년에 총장직에서 스스로 물러난다. 그러나 이 짧은 경력의 오점은 그를 더 이상 강의를 못하게 하고 평생 나치의 협력자란 딱지를 붙이게 된다.

 

1924년 한나 아렌트는 마부르크 대학 교수였던 유부남 하이데거 교수의 지성에 반하여 사랑에 빠진다. 하이데거는 자신의 얘기를 경탄스러운 눈길로 들어주는 어리고 총명한 여대생과의 만남을 은밀히 이어간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그 관계를 오래 유지하기에는 잃을 것이 너무 많았고 아내의 친구사이에 엘리자베스 브로흐만이라는 또다른 애인이 생겼다. 결국 그는 1928년 아렌트에게 대학을 떠나라고 하고 그녀는 하이델부르크 대학의 칼 야스퍼스 교수와 연구를 시작한다. 그러나, 한나 아렌트는 그를 잊지 못하고, 2차 대전 후, 그를 끝까지 옹호하고 그 의 복권을 위하여 힘을 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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