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지프 신화
40명 정도의 대표적인 학자들을 시대순으로 나열하고 그 철학자들이 얘기하는 주요 사상을, 철학 논문들을 참조하여 정리해 보았다. 목표로 한 철학자들은 대부분 정리해 보았으나, 몇 명의 철학자들이 남아 있고, 공부하다 보니, 뒤르켐, 벤야민, 루카치, 리쾨르, 바타유, 지젝, 바르도, 레비나스, 리오타르, 리쾨르 … 더 알아보고 싶은 여러 철학자들이 계속 검색된다.
철학자들 한명, 한명을 쫓아가다 보면 각자 서로 다른 맥락과 용어로 자신들의 생각을 얘기하기에 각 철학자들의 언어를 다시 새로 배운다는 느낌이 든다. 밥통을 유지해야 하므로 이공계 출신으로서 더 이상 쫓아가기는 어렵고 나중에 다시 여유가 생기면 쫓아가 볼 예정이다. 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예전에 읽고 정리를 안 해 둔 것 같아서 마지막으로 정리를 해 본다.
과학적 방법론에 입각한 계몽의 철학이 유럽을 휩쓸 때, 논리주의와 실증주의가 철학을 지배하려고 할 때, 여러 철학자들이 실존의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한다. 계몽주의는 인간 이성의 위대함을 칭송하지만, 스피노자(1632-1677)는 오래전에 자연의 무목적성과, 인간 이성이 자연법칙과 무의식의 지배를 받음을 얘기한다. 쇼펜하우어 (1788-1860)는 욕망하는 의지의 지배를 받는 인간의 이성 혹은 오성의 한계를 얘기한다. “모든 개인의 삶은 ... 실제로 언제나 하나의 비극일 뿐이다. 그러나 그 내용을 샅샅이 뒤져보면 그 특징은 코미디와 다를바 없다” 조커의 말이 아니라 쇼펜의 말이다. 그는 실존주의의 막을 올린다.
키에르케고르(1813-1855)는 신 앞에 단독자로 선 인간을 얘기한다. 신에게서 벗어나서 절망의 늪에서 헤매던 그가 얻은 결론은 살아가야 할 절박한 이유를 신 외에서는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인정한 후, 키케에게는 두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무의미를 철저히 인정하는 방법과, 다른 하나는 주체적인 선택으로 신의 앞에 서는 것이다. 그는 후자를 따른다. “사람이 신에게 향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을 얻기 위해서이다. 가능한 것이라면 그것은 인간으로 충분하다”. 수많은 신들 중, 왜 하필 기독교의 신일까? 인간에게는 주체적인 선택에 의해서 신 앞에 나가는 것 외에 절망을 피할 방법이 없다는 암울한 결론을 내린다.
니체(1844~1900)는 첫번째 선택지를 선택한다. 인간 존재는 부조리하다. 그의 위대함은 그것을 철저하게 인정했다는 점이고, 그 허무의 심연, 죽음보다 깊은 병인 절망을 온 몸으로 견뎌냈다는 것일 것이다. 키케와 다른 많은 현인들이 얘기하였듯이,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지 모른다. 본질에 대해서 추구하면 할수록, 인간들은 (존재의 본질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더욱 절망적인 것은, 노력해도 알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신의 빈자리, 허무의 공간에 니체는, 영원회귀를 하더라도 다시 선택할 그런 가치를 창조하고 놓으라고 얘기한다.
시지프 신화는 부조리에 대한 카뮈의 독백이다. 시지프 신화에서 카뮈는 자신이 책에서 다루려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 널려있는 “부조리한 감수성”이지, 부조리한 철학은 아니라고 얘기한다. 그렇다. 그는 이 책에서 부조리에 대해서 온갖 느낌들을 중구난방 늘어놓는다. 그에게 이러한 작업이 중요한 이유는 자살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기 위한 것이다.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는가? 하이데거는 “세계는 고뇌하는 인간에게 아무것도 제공할 수 없다”고 얘기한다.
부조리라는 용어는 흔히 비합리라는 의미로 남용된다. 부조리한 세상, 시스템이라는 말을 한다. 비합리적인, 모순적인 것을 얘기하고 싶은 것이다. 가장 본질적인 부조리는, 내가 왜 스스로 선택하지도 않은 채 이 세상에 투척되어 죽음을 수동적으로 기다리며 살아야 하나일 것이다. 백일장에 가서 그림을 그리는데, 그 그림은 결국은 불태워버린다고 한다. 그러면 내가 열심히 그림을 그릴 이유가 있는가?
오래전 붓다가 명상을 수없이 했지만 진리에 도달하지 못했다.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세상을 조용히 지켜보던 그는 세상의 본질을 깨닫는다. 본질은 없다는 사실, 세상 모든 것은 인과에 따라 관계를 맺을 뿐, 눈에 보이는 것은 인과에 따라 관계 맺어진 일시적인 상일 뿐, 심지어 이런 생각 조차도 그 본질은 공허할 뿐이라는 사실이다.
수천년이 지난 오늘 날, 현대 과학을 깊이있게 공부하다 보면 비슷한 결론에 다다른다. 눈에 보이는 수많은 물질들은 빈 공간일 뿐이고 그들은 자연 법칙에 따라 결합하고 다시 헤쳐지고 다시 결합할 뿐이다. 내 몸을 이루던 원자들은 다른 동식물들의 죽음을 의미한다. 나의 생은 타 존재의 죽음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고, 내가 죽어야 다른 생명이 탄생한다. 돌고도는 인연의 사슬만 있을 뿐, 어떤 것도 본질 적인 것은 없다.
예전에 서울대생의 주체적인 죽음의 선택, 유서를 올린 적이 있다. 세상이 이토록 부조리하다고 생각한다면, 50년 후가 아니라, 지금 죽으면 안될 필연적인 이유가 있을까? 사실 없다. 그러한 사실이 슬프긴 하지만, 죽음 모든 부조리를 해결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에서 키릴로프는 자살을 통한 부조리의 해결을 증명하기 위하여(‘죽음의 공포를 넘어섬으로써 스스로 신의 위치에 선다’) 주체적으로 자살을 선택한다.
이러한 부정적인 망상에 항상 사로잡혀 있다면 좋지 않을 것이다. 다행히도 현대 사회는 너무 복잡하고 바쁘게 돌아가며,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따라 끊임없이 주변과 경쟁을 하므로 이러한 고민을 할 여유가 많지 않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내가 왜 이렇게 살지”라는 권태감이 몰려올 때가 있다. 매일 생활하던 공간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지고 주변의 모든 일들이 기계적인 움직임, 의미없는 움직임처럼 느껴질 때, 샤르트르의 주인공은 “구토”를 시작한다. 부조리를 느끼는 순간이다.
인간들은 이러한 부조리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한다. 키케는 처절한 절망끝에 신에게로 회귀를 선택하고, 시지프에 나오는 철학자 셰스토프도 부조리 자체가 신의 모습이라고 얘기하며 (구체적인 신이 아니라 부조리의 원인으로서의 신, 악마 혹은 그 무엇) 부조리를 설명하려고 한다. 그러한 설명은 무엇인가를 포기해야 가능하고 그 대가는 이성이다. 카뮈는 그러한 타협을 거부하며, 그 모든 것의 출발은 부조리에 대한 설명이 가능하다는 희망에의 갈구에 있음을 얘기한다. ”단 한번만이라도 분명하게 알겠다고 말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은 구원될 수 있으리라." 카뮈의 말이다. 물론, 불가능하다.
카뮈는 부조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라고 얘기한다. 만약 신에게 도피하는 철학적 죽음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면 카뮈는 죽음보다 더 깊은 병 , 절망을 선택하겠다고. “하나의 경험, 하나의 운명을 산다는 것은 전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부조리는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두가지 사실의 대립에서 발생한다. 모든 것을 설명하기를 원하는 이성과, 그러한 설명이 불가능한 세계사이의 대립에서 부조리는 발생한다. “인간과 그의 삶, 배우와 무대장치 사이의 절연, 이것이 다름 아닌 부조리의 감정이다”.
무대위의 주인공은 극본에 주어진 대로 극본의 주인공의 삶을 충실히 살아간다. 그리고 막이 내려오고 그는 현실의 자신에게 돌아온다. 이 짧은 찰나의 순간 왕이었던 그가 사라질 때 느끼는 무의미함, 그러나 그는 다시 그 무의미한 삶을 다시 살아간다. 카사노바 돈 쥬앙은 여자와 사랑에 빠지기에 위해 만나지 않는다. 항상 다른 여자들과의 동일한 만남 속에서 그는 항상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고 열정을 불태운다. 물론, 그 모든 것이 나이가 들면서 불가능하고 의미없어질 것임을 알지만, 그러한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고 하루를 열정적으로 살아간다. 그에게 후회란 있을 수 없다. 부조리한 인간이 살아가는 방법이다.
시지프는 신의 명령을 거부함으로 영원히 산 정상으로 반복해서 돌을 굴려 올려야 하는 형벌을 받는다. 돌을 정상으로 옮겨 놓자마자 떨어지고, 그것을 다시 올리기 위해 내려가는 그 순간, 부조리의 순간이 찾아오고 시지프는 무한한 형벌의 의미에 저항하고, 그 자신만의 의지로 그 돌을 올려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열정적으로 다시 돌을 굴린다. 카뮈가 생각하는 행복한 시지프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