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주의, 레비스트로스
구조주의 인류학: 레비스트로스 (1908~2009)

우수한 문명과 그렇지 않은 문명은 있는가? 총균쇠에도 나오는 부분이다. 제럴드 다이어몬드가 총균쇠를 쓴 계기가 그의 제자 중, 아프리카 출신 제자 한명이 "왜 아프리카 민족은 계몽에 늦게 눈을 뜬 것인가.. 인종 혹은 지능적인 차이, 혹은 문화인류학적인 어떤 차이 때문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였다고 쓴다. 레비스트로스는 문명들 간에, 혹은 인간들의 행동 패턴이 그렇게 많지도 않고 그렇게 차이가 나지도 않는다고 얘기한다.
왜 근친간의 결혼은 대부분의 사회에서 금기시되는가? 생물/진화학자들은 근친간의 결혼은 유전적 결함을 위함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는 "호혜성의 원칙" 받은 것에 대한 보답, "여성"이라는 자원의 교환으로 설명한다. 서로간에 차이와 공통성을 확인하려는 인간의 구조적 행동 특성이라는 것이다. 언어에 문법이라는 구조가 존재하고 문법의 발현이 말이나 글로 나타나듯이, 인간 사회의 친족도 언어적 구조의 표현이라고 본다. 예를 들면, 삼촌이라는 인간은 사실 나와는 독립적인 한 인간일 뿐이지만, 아버지와 나, 아버지와 그와의 관계속에서 삼촌이라는 의미가 도출된다. 소쉬르가 말하는 변별적 차이이다.
거의 대부분의 종족들은 창조 신화 혹은 기타 다양한 모습의 신화를 가지고 있다. 신화는 해당 종족들에 대한 다양한 문화적 관습이 나타나 있다. 보통의 인류학자들은 그 신화의 추적을 통해서 해당 종족들의 생활패턴을 유추해낸다. 레비스트로스는 신화가 만들어진 데에는 구조적인 배경, "그 사회가 지니고 있는 해결되지 않는 모슨을 상상적으로 해결하려는 이야기"가 있다고 설명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소쉬르의 방법을 인류학 연구에 차용한다. 신화의 분석에서 신화를 기본적인 단위인 신화소 (언어의 음소) 단위로 분절하고, 그들 사이의 관계에서 의미를 찾고자 한다. 이를 위하여 그는 여러 지방의 원시 신화들을 채집하고, 그것들을 작은 이야기의 단위들로 분해한다. 그리고, 그 신화소들을 시간적(통시적), 공간적(공시적 혹은 유비적)으로 분류하여 나열한다. 그러면, 결국 신화들은 한정된 몇개의 신화소들이 다양한 형태로 조합된 것이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아래의 예는 외디푸스 신화를 분석한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으로 대표되는 서구 계몽주의 사상은 이성의 가치를 높이 평가한다. 즉, 시대에 따라 이성이 진화함에 따라 사회구조가 변화한다고 얘기한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는 인간들의 습관과 관습의 요인이, 이성의 요인보다 크다고 주장한다. "이성이 역사를 통해 스스로 발전해 나가는 법칙은 허구적일수 있으며 따라서 그 법칙을 발견하고 따르는 사회가 다른 사회에 비해 우월한 것이 아니다." (슬픈열대, 1955).

실제로 레비스트로스가 구조주의자인지 의심된다. 그는 정해진 구조에 의해서 인간이 획일적으로 결정지어진다는 어떤 주장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인간의 다양성과 보편성, 구조 분석을 통한 인류학 해석의 불가능성, 인간의 역사는 우연적 행위들의 소산이고 재현 불가라는 (역사) 구조주의에 반대되는 주장을 하였고, 본인은 자신을 구조주의자의 원류로 두는 것은 오류이다... 자신과 푸코는 어떤 점에서도 공통점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 본인 스스로가 지질학, 프로이트, 마르크스를 자신의 세 스승이라고 밝혔다. 그(것)들의 공통점은, 구조를 얘기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자유의지로,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것 같지만, 그 내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숨겨진 구조가 있다. “세계는 인간 없이 시작되었고, 또 인간 없이 끝날 것이다...."라는 그의 말은 주체적인 인간을 거부하는 듯 들린다. 이와 관련하여 실존주의의 샤르트르는 레비스트로스를 신랄하게 공격한다.
소쉬르와 마찬가지로 그의 이론 자체가 크게 매력적인 것은 아니다. 사실 그가 한 일은 브라질의 원시 부족에 약 한달간 머물면서, 사실 그 지방 언어도 배우지 않은 상태에서 피상적으로 관찰한 내용을 토대로 터무니 없는 논리의 비약을 했다. 신화의 문학적, 인류학적 내용을 단 몇개의 모호한 신화소로 환원시켜 단순히 설명했고 자의적인 기준으로 신화소를 분류했다 등등 많은 비판이 있다. 그러나, 종전까지 인문학적인 분석만이 주를 이루던 인류학을 과학적 분석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방법론적인 공로가 크며 그러기에 그는 때로는 소쉬르의 구조주의를 완성한 것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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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주류는 환원주의이다. 환원주의는 일단은 치밀한 분석이 가능할 때까지, 혹은 수학적 모델링이 가능한 단계까지 분석단위를 줄인다. 그리고, 그러한 분석 단위에 대해서 정합적인 논리 체계를 완성하고, 이것이 실제 현상을 잘 설명할 수 있는지 정교한 실험을 통해서 검증한다. 만약 이론에 위배되는 사건이 발생하면 시스템적으로 기존이론을 수정하거나 폐기처분한다. 이것이 과학적 방법이 인류 역사상 기막힌 성공을 거둔 비결이다.
환원론적으로 인간을 해석한다면, 인간들은 생화학적인 자연 법칙의 지배를 받고, 이기적 유전자들의 정보 전달 의지를 충실히 수행하는 유전자 기계일 것이다. 또한, 인간의 주체는 언어적 구조로 형성된 무의식 혹은 대타자의 지배를 받는 "자아"라는 망상을 지닌 정신 작용일 것이다. 그 말이 맞을 수도 있다. 현재도 자유의지의 존재유무는 철학/인지과학의 가장 중요한 테마 중 하나이다.
그러나 환원주의적인 접근법으로 모든 거시적 현상을 설명할 수있다는 거만함 또한 경계해야 한다. 천문학에 three body problem(3체 문제)이 있다. 2개의 물체사이에 중력에 의한 이동 경로의 예측은 쉽지만 3개의 천체만 주어져도 그 problem은 closed form으로 풀 수 없다. 수소원자 하나의 파동방정식을 겨우 closed form으로 풀수 있지만, 헬륨 원자만 해도 불가능하다.
사실, 하나하나의 개별존재의 해석은 수학적 단순화를 통해서 가능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공기/물 분자들은 1cm^3에 10^23개나 된다. 이들의 상호작용을 분석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통계적 단순화/통계역학을 통해서 우리는 그들의 거시적인 동작을 분석하고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보는 사진은 1000x1000 화소의 픽셀들로 구성된다. 그들이 취할 수 있는 조합의 수는, 256^(10^6)은 거의 무한에 가깝다. 즉, 존재들간의 관계는 무한가지의 조합이 가능하다. 복잡계라고 한다. 복잡계에서 남미지방의 한 개미의 날개짓은 북미에 태풍을 일으킬 수도 있다.
과학적인 방법론이 지배하는 사회이다. 기업체에서도 과거 인문학도들이 수행하던 업무를 이공학도들에게 시키고 있다. 과학적인 방법론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인문학에 주어진 큰 과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