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사

아우라, 벤야민

existence_of_nothing 2021. 4. 19. 15:14

 

아우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벤야민(1892-1940)

어딘가의 글에서 벤야민을 아방가르드적 철학/문화비평가로 평가했다. 벤야민의 철학은 난해하고 또한 비주의로 취급받기도 한다. 그는  유복한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에게 능력을 인정받지 못해서 경제적 지원을 받지 못한다. 교수자격 시험에 실패하고 평생을 빈곤에 시달리며 제대로 된 철학서보다는 짧은 기고문 성격의 글을 많이 써야 했다. 평생을 경제적으로 궁핍하게 살면서 항상 아웃사이더로서 살다가 스페인/프랑스 국경봉쇄로 체포될 위기에 처하자 모르핀을 과다 복용하고 자살한다.

 

그는 자신만의 큰 철학적 줄기를 만들지는 못했으나, 다양한 분야의 주제들을 다루고, 여러가지로 해석이 가능한 열린 결론을 지향하고, 동시대의 담론을 뛰어넘는 파격적인 글들을 발표하여 오랜시간이 지난 현재까지도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1. 역사철학

역사는 본질적으로 진보할수 밖에 없다든가, 역사는 계급 투쟁의 방향성에 따라 필연적으로 전개된다 혹은 헤겔처럼 역사에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절대 정신이 스스로의 의지를 드러낸 것, 등의 역사관을 본질주의적 역사관이라 한다. 칼 포퍼는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이러한 본질주의적 역사관이야 말로 파시즘, 전체주의의 산파 역할을 했다고 강하게 비판한다. 벤야민은 진보적 좌파 쪽에 가깝지만, 그는 마르크스가 얘기하는 계급 투쟁이 필연적이며 반드시 승리하게 되어있다는 그러한 기계적인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 세대의 경험을 통해 배워야 할 것은 자본주의가 결코 자연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벤야민에게 혁명은 지금 이순간 지금 이 자리에서도 발생할 수 있고, 그것은 반드시 성공을 보장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역사가 무르익고 모순이 극대화가 된 어떤 시점에 예고되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이슬처럼 스며 들어있는 혁명적 기운이 아주 우연적인 요인에 의해서 폭발적으로 발생하며 그것의 성공 여부도 역사적 필연이 아니라 예측이 불가능한 사건일 뿐이다.

 

벤야민의 혁명은 소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얘기하는 혁명과 성격이 다르다. 마르크스 주의는 생산 수단의 발전에 따라 경제력이 상승하고 생산 관계의 문제만 해결되면 세상은 프롤레타리아의 유토피아 혹은 계급 자체가 사라지는 유토피아가 된다고 낙관했다. 이것은 기술 발전에 대한 과도한 낙관적 견해이고, 분배의 문제만 해결이 된다면 기술의 발전이 인류에게 자동적으로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극히 단순하고 유물론적인 사고에 기반하고 있다. “문명의 기록치고 동시에 야만의 기록이 아닌 것은 없다”. 

 

2. 신학

유대교/기독교/이슬람 모두 기원은 동일하다. 유대교는 예수를 그냥 한 인간으로, 기독교는 예수의 삼위일체설을, 이슬람은 예수와 마호메트를 예언자로만 인정한다는 차이가 있지만 모두 야훼를 유일신으로 간주한다. 유대교는 기독교와 달리 미래에 대한, 메시아의 재림에 대한 과도한 기대를 삼간다. 단지, 역사적 사실로부터 현재의 역사를 재구성하고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면서 예측하지 못한 순간에 도래할 메시아를 마냥 기다릴 뿐이다.

 

벤야민은 약한 메시아주의를 얘기한다. 인류의 죄악이 절정에 달할 때, 생산관계의 모순이 절정에 달할 때 메시아가 도래하여 세상이 혁명적으로 변화되며 한 순간에 모든 것이 해결되는 그러한 강한 메시아주의, 계급 혁명은 오지 않는다. 약한 메시아는 과거에도 우리에게 구원의 상징들을 퍼뜨려 놓았으며, 그것은 과거의 파편으로 현재에 존재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러한 과거에 실현되지 못한 메시아적 구원을 현재 이 순간에 살리는 것이다. 의미는 모호하지만, 약한 개개인들, 민중들이 세상을 변혁시켜야 함을 얘기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메시아의 재림에 대한 과도한 기대, 행복한 미래가 곧 도래할 것이고, 우리가 그것을 앞당길 수 있다는 생각은 인류의 성급함을 재촉하고 그것은 전체주의 공산사회나 파시즘의 도래, 새로운 사회를 위한 수많은 죽음을 요구한다. 벤야민은 유대교의 전통, 과거에 대한 철저한 성찰과 현재의 의미에 집중할 것, 미래에 대한 어떤 성급한 기대도 가지지 말 것을 얘기한다.

 

카프카의 유명한 말 “메시아는 최후의 날에 오지 않고, 그 다음날 온다”는 것은 메시아가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이 세상을 구원한 다음날, 메시아는 메시아가 된 우리들을 구원하러 온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벤야민이 유대/기독교의 인격신을 얘기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가 말하는 메시아가 지구를 구원해 주러 이 세상에 도래할 메시아인지, 혹은 프롤레타리아 혹은 우리들 전체를 지칭하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자살하는 순간까지도 신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 다음은 그의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 나오는 유명한 얘기이다.

 

“한 자동기계가 있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 기계는 사람과 장기를 둘 때 이 사람이 어떤 수를 두든 반대 수로 응수하여 언제나 그 판을 이기게끔 고안되었다. 터키 복장을 하고 입에는 수연통(水煙筒)을 문 한 인형이 넓은 책상 위에 놓인 장기판 앞에 앉아 있었다. 거울 장치를 통해 이 책상은 사방에서 훤히 들여다볼 수 있다는 환상을 불러일으켰다. 실제로는 장기의 명수인 꼽추 난쟁이가 그 속에 들어앉아 그 인형의 손을 끈으로 조종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 장치에 상응하는 짝을 철학에서 표상해 볼 수 있다. <역사적 유물론>으로 불리는 인형이 늘 이기도록 되어 있다. 그 인형은 오늘날 주지하다시피 왜소하고 흉측해 졌으며 어차피 모습을 드러내어 서는 안 되는 신학을 자기편으로 고용한다면 어떤 상대와도 겨뤄볼 수 있다.”

 

신학을 고용하지 못해서 인가… 오늘날 역사 유물론은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에 밀려, 현재는 거의 사망 상태이다. 오늘날, 여전히 인구의 절대 다수는 프롤레타리아, 저임금 노동자들이지만, 그들은 오랜 노동 시간 후에 귀가해서 TV나 영화를 보면서, 그들의 의식을 현실에서 떨어뜨리려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허위의식에 무기력하게 사로잡혀 있을 뿐이다. 그리고 대기업 노조들의 행위에서 보듯이, 그들은 기회가 되면 그들은 새로운 권력주체, 새로운 지배계급이 되려고 할 뿐이다.

 

2. 시간관

벤야민은 새로운 것에 대한 습득보다는 기존에 있었던 것, 낡은 건물, 도시들의 전경, 오래된 책들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고 부여하는 것을 소중히 여겼다. 과거는 그냥 흘러간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과거의 한 순간을 고정하고 다양한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과거는 새로운 현재로 살아나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사유법을 이미지적 사유라고 한다.

 

그에게 과거는 흘러간 지난 것이 아니라, 현재의 손길을 애타게, 메시아의 도래를 기다리듯 기대하고 있는 것이고, 우리는 과거에 대답할 수가 있다. 독특한 시간관이다. 데리다도 비슷한 시간관에 관한 얘기를 한다. 인터스텔라에서 미래의 나가 과거의 딸에게 신호를 보내고, 현재의 딸은 다시 과거의 시계를 떠올리면서, 미래와 현재와 과거가 서로 연결이 된다.

 

이러한 시간관은 역사해석에도 적용될 수 있다. 벤야민은 쾰러나 랑케 같은 연대기적인 역사 서술 방식을 비판한다. 연대기적인 서술은 그 안에서 어떤 거대한 흐름을 찾아내려는 의도성을 유발한다. 벤야민은역사에 존재하는 다양한 파편들을 이미지적으로 직시함으로써, 과거가 우리에게 기억하기를 원하는 다양한 메시지들을 재해석하라는 것이다. 

 

이것을 벤야민은 "변증법적 이미지"기법으로 사고 혹은 “정지상태의 변증법”이라고 한다. 연속된 사고의 분절을 통해서 과거의 의미가 섬광처럼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는 의미 에서인데, 자체 모순에 의한 운동법칙어로서의 변증법이란 정의에 맞는 용어인지는 의문시된다.

 

분명, 벤야민과 데리다의 시간관은 평범한 우리들의 기준으로 볼 때, 상당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것은 그의 많은 말들이 알레고리적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그의 말과, 그가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 기표와 기의가 정확히 연결되지 않기에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 실제로 그가 인터스텔라적인 과거/현재/미래의 비시간적인 통약을 얘기했는지, 아니면 과거의 실패를 철저히 교훈 삼아 이시간 이장소에서 과거의 실패한 메시아적 과업, 혁명을 완수하려고 했는지는 애매하다.

 

3.언어철학

벤야민이 성경을 해석하면서 창세기의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였다”라는 문구에서 신이 세상을 신의 언어로 창조하였음을 강조한다. 그것은 흔히 말하는 우리의 언어일 수도 있고, 과학자들이 우주를 기술하기 위해 사용하는 자연에 숨겨진 수학적 질서/언어일 수도 있다. 세상을 보면서 그 안에 새겨진 언어 혹은 정신적 본질을 해석하는 일, 그것이 ‘신의 언어’를 이해하는 노력이다. 그리고, 신은 아담을 말로 만들지 않고, 세상의 재료 흙으로 자신과 닮게 만들고 언어능력을 부여한다. ‘아담(인간)의 언어’이다. 이어서 아담은 세상 만물에 이름을 부여하니 그것은 ‘사물의 언어’가 된다.

 

이러한 언어는 예전에는 기의와 기표가 정확히 대응되고 있었지만, 인간의 타락/바벨의 사건을 계기로 사물에 부여한 고유한 이름은 사라지고 보편자의 이름만 남는 문제 (물론, 아담이 실제로 개별 사물 모두에 기표를 부여했다는 의미는 절대 아닐 것이다 ^^), 자연을 개별 대상으로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범주화하고 도구화하는 문제, 자연과 인간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자신의 선악판단의 기준에 따라 분류하고 지배하려는 문제, (소쉬르가 얘기한) 기표와 기의의 어긋남의 문제등이 발생한다.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을 떠올린다. 우리는 자연속에서 다시 신의 언어, 정신적 본질을 발견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4. 아케이드 프로젝트

벤야민에게 독서는 보이는 것을 읽는 것이 아니다. 안 보이는 것, 행간을 읽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낡은 도심의 풍경, 폐허 속에서 그 안에 새겨진 새로운 의미를 계속 읽는 것이다. 그리고 텍스트 안의 여러 의미들과 별로 관련이 없는 다른 의미들을 연결하고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는 것, 그것을 그는 “알레고리”라고 부르고 그러한 능력을 “미메시스적(모방)” 능력이라고 부른다. 거울 신경 세포(mirror neuron)을 연상시킨다.

 

벤야민에 대한 여러 이론들을 읽다 보면, 데리다의 여러 철학들이 실제로 벤야민의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깨닫는다.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주의’, 독특한 미래/현재/과거 소통의 시간관, 텍스트는 그 자체로 살아있다는 철학, 텍스트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등등등. 데리다는 정녕 미메시스의 달인인가... 그러나 데리다는 그가 벤야민의 철학을 새로이 해석했음을 이미 여러 문헌 들에서 밝혔다. 벤야민의 삶 자체는 체제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들뢰즈의 노마디즘을 연상시킨다. 또한, 그의 미메시스 이론은 또한 들뢰즈의 “동물 혹은 ...되기”  철학을 떠올린다. 그의 글들을 조금씩 살펴보면, 확실히 그는 시대에 앞선, ‘아방가르드적 인물’이고, 사후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주었음을 느낀다.

 

벤야민은 ‘세계와 역사의 몽타주,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란 책에서 도시의 온갖 모습들에 대한 사료를 모으고 간단한 자신의 간단한 의견을 더한다. 3000페이지에 걸친 방대한 사료집이다.  벤야민은 “말하지 말고 보여주기”에서 문학적 몽타주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재인용하는 것, 새롭게 그 모습을 비추는 것이라고 얘기한다.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그가 살던 시대의 파리라는 도시를 잔잔하게 보여주고 있다. 비춰진 그 모습 속에서 바로 그 당시 혹은 현 시대의 일그러진 여러 모습들을 발견하고 자신들을 성찰할 수 있다. 잘 만들어진 광고들은 나레이션이 많지 않다. 그냥 보여주고 사람들이 느끼게 한다.

5. 기술복제시대의 문화예술 – 아우라

벤야민의 저서 중, 가장 많이 거론되는 책이며, 또한 오늘날 흔히 사용하는 ‘아우라’라는 용어를 널리 퍼뜨린 책이기도 한다. 흔히 사람들 혹은 작품에 아우라가 깃들여 있다고 애기한다. 뭔가 품격과 기품이 있다는 얘기이다. 벤야민에게 아우라는 “예술작품의 여기와 지금으로서, 곧 예술작품이 있는 장소에서 그것이 갖는 일회적인 현존재”로 발생한다고 얘기한다. 간단히 말해서 진품은 지금 이 시간, 이 자리에서만 감상이 가능하고 그로 인해 아우라가 생긴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현대에는 사진과 영화예술 도입과 함께 원작과 복제품의 대량 복제가 가능하고, 또한 원본의 의미가 크게 사라졌다. 물론, 일부 재테크용 고가 미술품의 아우라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대중 예술에서의 진품성은 사라진지 오래다. 아우라의 소멸로 인해 예술 민주화, 다양한 계층의 문화활동 참여가 가능해진 반면, 원작이 갖는 깊이/신비함/초월성은 사라진다. 연극에서 배우는 관객과 직접적으로 호흡하며 그의 아우라를 드러내지만, 영화라는 신 매체를 통해서 배우와 관객은 카메라라는 매체를 통해서 간접 소통을 하게 되고, 배우의 직접적인 아우라는 사라진다.

 

아우라는 예술 작품의 감상에서도 나타나지만, 경험 일반, 일상 생황이나 사소한 대상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일회적인 경험 “가까이 있더라도 어떤 먼 것의 일회적 나타남, 어느 한 순가 이들 현상과 하나가 되는 경험”에서도 아우라를 느낀다. “어느 여름날 오후 휴식이 상태에 있는 자에게 그림자를 던지고 있는 지평선의 산맥이나 나뭇가지를 보고 있노라면, 우리는 이 순간 이 산, 이 나뭇가지가 숨을 쉬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러한 현상을 우리는 산이나 나뭇가지의 분위기가 숨을 쉬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아우라의 소멸이 좋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인가? 벤야민은 어떠한 사실에 대해서 직접적인 판단이나 비판을 하지 않는다. 어느 한쪽의 편을 일방적으로 들지 않는다는 면에서는 일견 진리의 상대성을 주장하는 포스트 모더니즘을 연상시킨다. 사실, 이 논문의 중요성은 벤야민이 “기술복제로 인해서 예술에 본질적인 변화가 생긴것인가”라는 중요한 화두를 예술계에 던진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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