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텍스트, 데리다
텍스트는 그 자체로 생명성을 가지고 있는가?
어떤 사람이 말을 할 때에는 그의 머리속에 어떠한 배경이 있다. 직접 본인에게 말을 듣더라도 그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최소한 질문을 통해서 그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기에 글보다 더 그의 진의를 파악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글을 남기지 않은 이유이고 플라톤이 글보다 말의 가치를 높이 평가한 (음성 중심의 사고) 이유이다.
말은 과연 말로만 존재하는가? 우리가 말을 할때 사실, 우리의 뇌에는 이미 뉴런에 각인된 텍스트가 존재한다. 그 텍스트는 부모로 부터, 문자나 음성을 통해서 전달된 흔적이 남아있고, 그 부모는 그 부모로 부터 흔적을 물려받는다. 즉, 우리가 음성 중심 혹은 문자 중심이라고 할때 그 둘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글, 그림 혹은 다른 형태의 기록들을 텍스트라고 할 때, 그것은 당사자를 통해 들은 말보다 더 정보를 적게 담고 있을 것이다. 만약 텍스트만 존재한다면 최소한 그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한 질문은 불가능하다. 그러면 읽는 사람들의 context에 따라서 오역, 오독의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것에 대해서 종래의 로고스 중심의 사고는 경계해 왔고 충분히 일리가 있는 얘기다.
그러나, 텍스트라는 것은 저자의 손을 떠난 순간에 이미 그 자체로서 세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그 자체로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A라는 사람이 자신의 생각데로 B라는 사람은 자신의 생각데로 해석한다고 할 때, 어떤 것은 정답이고 어떤 것은 오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것에 대해서 데리다는 문제를 던진다.
철학은 이제까지 고정된 진리, 그것이 우리가 직접 느낄 수 있던지 아니면 이데아의 저편이나 물자체로 남아서 우리의 바깥에 있던지 그것이 있다는 현존을 가정하고 논리를 전개한다. 후설이 에포케를 통해서 본질을 직관하라고 했을 때에도, 이미 본질의 존재를 가정한다.
우리가 "사과"라고 말을 할때 그 대상이 되는 사과는 세상에 존재하는가? 우리가 언어로 옮기는 순간에 그 대상과 언어는 분리될 수 밖에 없다. 우리의 뇌는 대상을 상대로 직접 사고를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언어로 옮겨오고 그 언어의 구조적 틀 속에서 사고를 전개할 수 밖에 없다. 사과라는 개념이 만들어진 순간에 우리에게는 하나하나의 사과의 존재 유무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나는 사과를 이해하고 있다"라고 할때, 나는 세상의 모든 사과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사과는 어떤 형태의 사과로던지 분화할수 있는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으며 이것을 데리다는 "차연"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헤겔의 존재 내부의 부정성, 초월적 존재의 규정성을 부정하는 부정 신학과 비슷함을 느낀다.
차연은 차이를 가능하게 만드는 근본적인 메커니즘이며 그 차이의 의미는 다른 것(타자)과의 대비를 통해서 결정되기에 지연된다. 이것을 데리다는 differance (원래는 difference) 라는 신조어를 통해서 얘기하고 있으며 차연에 대한 이해가 데리다 철학 이해의 핵심일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데리다 자신은 차연을 언어의 영역 밖으로 존재시키기에 그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기는 어렵다. 하이데거가 존재자가 존재하는 원리로서의 존재를 무의 영역에 두었기 때문에 난해해 진것과 같다. 말로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말을 하려고 하니 ^^
데리다가 해체하려고 한 것은, 진리나 본질이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가정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어떤 존재를 가정하고 그것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 차연의 가능성을 배제하고 성급한 결론을 내리려고 하는 것일 것이다. 들뢰즈의 탈주, 탈영역화, 리좀의 사고와 비슷함을 느낀다.
그러나, 애당초 데리다의 시도는 성공의 가능성이 있었을까? 진리와 본질을 해체한 후에 철학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모든 것들이 상대적이라면 도대체 우리는 어떤 기준에 따라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가? 데리다가 말년과 사후에 철학계에서 엄청난 비난과 공격에 직면한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