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원자 모델
세상 만물이 원자로 되어 있다는 것을 인류가 확신하게 된 것은 채 100년이 되지 않는다. 1803년 돌턴이 근대판 원자설을 주장하고, 많은 과학자들이 어렴풋이는 확신을 하였지만 직접적인 증거는 없었기에 물리학자 마흐(1838-1916)는 원자론을 사변 물리학으로 간주하였다. 볼츠만이 원자의 존재를 가정하고 열역학적 법칙을 훌륭하게 수학적으로 유도하였지만, 형이상학에 근거한 물리학이라는 비판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1827년 브라운이 물위에 뜬 꽃가루의 움직임을 관측하였지만, 1905년 아인슈타인이 이 수학적으로 이를 증명하기 전까지 그 움직임을 원자나 분자로 연결하는 이는 없었다.
1897년 톰슨은 음극선 실험을 통해서 수소보다 1800배나 가벼운 전하를 띤, 입자의 흐름을 발견한다. 진공관(가이슬러관 혹은 크룩스관)의 양쪽에 전극을 달아서 전압을 가하면 형광등처럼 발광이 일어난다. 진공상태이므로 이 발광물질은 분명히 음극물질에서 전달되었을 것이고(물론, 일부 학자들은 그것이 진공을 채우는 물질 에테르에 의한 비물질적인 흐름으로도 보았다), 음극물질 자체는 전기적 중성인데 외부에서 전기장을 가하면 발광 지점이 휘는 것으로 보아, 신비한 입자는 전하(음)를 띤 것으로 판단되었다.
또한, 뉴턴역학과 전자기학을 적용하여 전하와 질량비를 정확히 측정하여대략 수소원자보다 1000배 정도 가벼운 물질이라는 추론을 한다. 처음에 톰슨은 이 신비한 입자를 corpuscle(작은 물질)이라고 불렀지만 실험 이전에 영국 물리학자 스토니(1826-1911)가 전기 기본단위를 나타내는 이름으로 electron이라고 불렀음에 기인하여 그것을 전자라고 칭한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발터 카우프만이라는 독일 물리학자는 톰슨보다 훨씬 정확한 수치를 예측하였지만, 불행히도 그는 마흐주의자라서 원자에 대해서 말하기를 꺼려하고 결국 캐빈디시 연구소의 톰슨이 최초의 전자의 발견자의 영광을 가져간다.
톰슨은 전자를 발견하면서 원자론은 피할수 없는 대세가 되지만, 사실 원자는 더 이상 쪼갤수 없는 기본 단위라는 "atom"이라는 말을 머쓱하게 만든다. 1906년 전자 발견에 대한 공로로 노벨상을 수상한 톰슨은 1907년 원자의 내부가 양전하의 배경에 음전하의 전자가 푸딩처럼 박혀있는 최초의 원자 모형(푸딩 모형)을 제시한다. 톰슨(J.J.Thomson)은 러드퍼드를 포함한 7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고, 그의 아들(G.P.Thomson)도 전자 굴절현상을 통해 전자의 파동성을 실험으로 증명하여 1937년 노벨상을 수상한다.
영국물리학자 어니스트 러더퍼드(1871-1937)는 알파입자(He^2+, 헬륨원자핵)를 얇은 금박지에 쏘고 산란 패턴을 조사한다. 만약 톰슨의 원자모델이 맞다면, 산란은 원자들의 밀도에 따라서 달라지지만, 비교적 고르게 산란이 될 것이고, 그렇지 않고, 양의 전하들이 비교적 좁은 곳에 몰려있다면, 대부분은 바로 통과하고, 일부는 급격하게 산란하거나 튕겨져 나올 것으로 예측한 것이다. 실험 결과는 후자의 결과를 보였다.
이 실험의 결과로 러더퍼드는 원자라고 불리는 공간의 대부분은 비어 있고(원자핵의 지름/원자의 지름=10^-4), 양의 입자들은 아주 좁은 공간에 뭉쳐있음을 알게된다. 실험결과를 토대로 1911년 러더퍼드는 원자는 원자핵이라는 좁은 공간에 양의 입자들(양성자)들이 몰려있고, 전자들이 주변에 넓게 존재한다는, 태양계를 닮은 원마 모형을 제시한다.
1900년대 초에 컴퓨터도 없는 상황에서 이러한 산란을 측정한다는 것은 초인적인 인내를 요구한다. 알파입자를 몇개가 감광지에 남기는 흔적인 너무나 미미하므로, 암실에 대학원생이 앉아서, 한 창의 암적응 후에, 일일이 그 흔적들의 개수를 세어서 기록해야 하기 때문이다. 산란 확률을 계산하려면, 그러한 실험을 수만번을 했을 것이다. 실제로 한스가이거(1882-1945)라는 물리학자와 어니스트 마르스덴(1889-1970)이라는 학부생이 1분 간격으로 교대하면서 10일 정도를 밤낮으로 실험했다고 한다. 불행히도 이들의 이름은 과학사가들 외에는 전혀 모르고, 우리들은 러더퍼드의 이름만 기억하고 있다. 실제로 러더퍼드 역시 노벨상은 1908년 방사능이 원소 분열때문이라는 업적으로 노벨화학상을 수상했을 뿐이다.
<어니스트 마르스덴> <한스 가이거>
러더퍼드의 제자인 모즐리(1887-1915)는 '모즐리의 법칙"으로 원자번호와 원자핵의 전하량 사이의 관계를 밝혀내어 모즐리 주기율표를 만든 공로로 노벨상 수상이 유력했지만 1915년 1차세계대전에 참전하여 갈리폴리 상륙작전에서 저격수의 총에 27살의 나이로 전사한다. 러더퍼드는 이를 안타까이 여겨, 과학 인재들은 병역 의무 대신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연구를 계속하게 하는 것이 나라에 이득이 된다는 "이공계 대체복무"제를 주창하고, 오늘날 많은 국가들이 이를 채택하고 있다. Latte는 대신에 5년이라는 긴 복무 기간을 근무해야 했지만, 요즘은 3년을 근무하면 병역이 면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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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불교/도교/서양철학 등 다른 여러 철학에 비해, 동양적 유교사상은 전혀 와닿지 않는다. 타고난 반골 기질을 가진 나에게, 나의 주체적인 선택 이전에 이미 주어진, 선과 악의 프레임, 그리고 가슴에 와닿는 정당한 이유도 없이, 그 프레임에 순응해야 선으로 취급받는 기성세력/기득권 중심의 지배 이데올로기라는 느낌이 강하기 때문이다. 초기 불교가 대승불교와 차이가 많듯이, 원래의 유교 사상은 다분히 성선설에 기반한 이상 세계를 추구했을지 모르지만, 항상 그렇듯이 세상은 그렇게 아름답게 만들어지지는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과 조선에서 성리학(주자, 1130-1200)이 유행한 이유는 지배층의 집권을 합리화하는데 도움이되었기 때문이다. 리와 기에 의해서 만물이 생성되고 운용된다. 가벼움과 무거움, 하늘과 땅, 천자와 일반 평민등, 만물에는 이미 생성의 단계에서 위계적 질서가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심성에 있어서도 인간 본연의 도덕성(본연지성)이 이미 존재하고 이를 따르는 것이 선이며, 개인의 본능적 욕구에 따라 행동하는 기질지성은 인욕으로 억제되어야하는 것으로 취급된다. 부패한 황족이라도 주변국들은 이들에 충성해야 하고, 백이와 숙제같은 맹목적인 충심은 훗날 크게 장려된다.
왕수인(1472-1528)은 삼수 끝에 28세에 과거에 급제해서 관리가 되지만, 중앙 정부의 부패상에 대응하다가(환관 유근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림) 용장으로 귀양간다. 삶과 죽음을 오가던 유배지에서 어느날 돈오로 자신만의 깨달음을 얻는다. 즉, 사물의 이치를 깨닫는데에는 수많은 공부와 수련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나의 본성을 알아채리기만 하면 된다라는 "심즉리"사상이다. 불교의 "심즉불", 즉, 내 안에 불성이 있다는 것과 유사하다.
성리학의 내용중 "격물치지"란 말이 있다. 사물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깨우치면 자연의 이치를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신수는 깨달음이 올때까지 오랜 기간 공부를 하는 방법을 택했다면 (점수), 혜능은 자신의 마음을 정확히 바라봄으로 한 순간에 세상의 이치를 깨닿는다 (돈오). 왕수인은 격물치지로 성리학을 공부하던 와중에 돈오로 "심즉리"사상을 깨닫는다. 세상의 이치는 내 마음에 있으며, 알고 행동하는 것도 중요하지만("선지후행"), 실천을 통해서 앎을 추구하는 "지행합일"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왕수인은 "심즉리", "치양지", "지행합일"을 주장하는 양명학을 창시한다.
"격물치지"는 4자의 성어로 된 단순한 언어로 볼 수도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칸트의 물자체 혹은 헤겔의 관념론으로 전혀 다른 세상으로 빠질수도 있다. 주자는 물자체가 존재하며, 이를 있는 그대로 정확히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며 이를 통해서 사물의 본성/질을 파악하여 만물의 리/기를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양면은 물자체는 마음의 작용을 통해서 인식이 되기에 관념과 물자체의 구분은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즉, 우리는 마음/인식작용을 통해서 사물을 인식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주자에게 도덕은, 마음의 작용을 떠나서 이미 세상에 새겨진 선한 본성의 코드이며, 마음은 를 파악할 수 있을 뿐, 이 코드를 바꿀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반면 양명은 세상의 선악과 도덕규범은 마음의 작용을 통해서 나타나며, 예를 들어 효와 같은 것은 부모와 자식이 존재할 때에 마음의 작용에 따라 나타나는, 즉, 선험적으로 이미 존재하는 "리"가 아니라, 실천적으로 구현해야 하는 "리"의 형태로 드러난다. 따라서, 사람의 마음에 따라 도덕적 기준이 달라질 수 있기에, 인간 보편적인 선의 구현을 위해서 "정심", "정사, "위선거악시격물" 같은 인간의 행동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사실 주자/양명학은 비슷한 얘기를 서로 다른 방향으로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퇴계 이황은 양명학이 주자학을 비판하고 있다는 것 자체에 거부감을 가졌으며, 리의 상이 심인데 심즉리를 주장하는 것, 심즉리에 따라 주관주의적 유심론에 빠질 수 있다는 점, 양명학이 불/선의 사상을 일부 따른다는 점, 선행후지의 성격을 갖는 지행합일을 통해서 선을 자각/실천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궁리를 통해서만, 즉 정확히 선을 이해하고서야 그 실천적 당위성을 가질 수 있다는 여러 점에서 양명학을 사문난적의 이단으로 규정하고, 그것은 조선 전체를 통해서 구한말까지 이어진다. 중국과 일본에서 양명학이 정통 학문으로 장려되고 연구되었던 반면, 조선 사회에서 양명학은 그 철학적 우수성에도 불구하고, 전혀 연구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