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중국사, 원/명/청 시대
1206년 테무친은 몽골을 통일하고 칸에 오른다. 이 후 남방 서하와 금나라를 제압하고 서방 원정길에 오른다. 먼저 중앙아시아 최대 강국 "호라즘"왕국을 격파하고 카스피해까지 진출한 후, 다시 동남 원정을 통하여 1227년에 서하를 멸망시키고 금나라 원정길에 병사한다. 2대 오고타이칸(태종)은 1239년 금나라를 멸하여 중국 북방과, 다시 서방원정하여 러시아와 동유럽까지 영토를 확장한다. 4대 뭉케칸은 서아시아의 아바스 왕조를 5대 쿠빌라이칸은 남송을 1279년에 멸하고 , 인류 역사상 가장 광대한 영역을 통치한다 (사실 식민지까지 포함하면 1위는 대영제국). 또한 우리나라도 1231~1259년, 고려 고종 치하에서 9차례에 걸쳐 "여몽전쟁"으로 국토를 유린당하고 몽골의 부마국이 되는 치욕을 겪는다.
칭기즈칸 사후, 몽골제국은 킵차크, 일, 차가타이, 오고타이 한국의 4한국으로 형제들이 분할 통치하다가 뭉케칸(헌종) 사후에 내분이 발생하지만 쿠빌라이가 제압하고 칸(세조)에 오른다. 그는 남송을 멸망시킨 후, 도읍을 연경(북경)으로 옮기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몽골제국은 붕괴하여 서방 4한국과 쿠빌라이칸의 원나라가 분리된다.
원나라는 중서성(정무), 추밀원(군사), 어사대(감찰)의 3권 분립으로 황하이북은 직할, 나머지는 11개의 행(출장소)로 관리하였다. 통합된 여러 민족은 몽고인, 색목인(서방출신), 한인(한/거란/여진족), 남인(남송인)의 순으로 차별화되어 원나라 말 반란의 원인이 된다.
이탈리아 베네치아 태생의 마르코폴로는 17세때 아버지를 따라 왔다가 그의 총명함에 반한 세조(쿠빌라이)에 의해 17년을 중국에서 지낸 후, 페르시아에 보내는 왕비를 호송한 후, 고향에 돌아가서 "동방견문록"을 쓴다.
원나라 황실은 라마교를 신봉하여 의식때마다 대규모 제물이 필요했고, 라마승들의 횡포가 심했다. 또한 황위쟁탈전이 심해져서(25년간 8명의 황제 집권) 백성의 생활은 궁핍해져갔다. 원나라 말기(1351년) 미륵신앙 기반의 백련교(白蓮敎)를 기반으로 하는 홍건적(불을 상징하는 붉은색 머리띠 착용)이 봉기하지만 1359년 제압된다. 쫓겨난 홍건적은 공민왕 즉위시절인 1359년 고려를 침공하지만 퇴각당하고 1361년에는 개경을 일정기간 점령했다가 최영과 이성계에 퇴각된다.
가난한 집 자제 출신의 주원장은 탁발승 생활을 하다가 홍건적 휘하에 들어갔다가 독자 세력을 규합하여 강남에서 활약한다. 홍건적 몰락 후, 세력을 키운 그는 강남의 여러 반란세력들을 제압한 후, 1368년 남경에서 "명"나라를 세운 후(홍무제) 원나라를 공격하여 멸망시킨다. 원나라는 제국을 세운지 100년도 되지 않아 멸망하고 다시 한족이 중국을 지배한다. 중국 역사에 천민 출신의 황제는 한나라 유방과 명나라 주원장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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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을 도읍으로 명을 창건한 홍무제는 원나라의 여러 흔적들을 지우고, 6부(이호예병형공), 5군도독부(전후좌우중군)의 중앙집권제를 강화하고, 개국공신들을 숙청하여 황권을 확립한다. 그러나, 정작 2대 건문제를 위협한 것은 개국공신들이 아니라 홍무제의 26아들들 (콘돔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품 중 하나 ^^), 당연히 골육상쟁이 벌어지고, 홍무제의 첫째 손자 건문제는 세째 아들 영락제에게 제거된다.
영락제는 명을 위협하는 몽골족을 5차에 걸친 원정으로 막고, 환관 정화로 하여금 당시로서는 거의 항공모함 수준(62m x 150m)의 대함대를 이끌고 7차례에 걸쳐 동남아시아~동부아프리카까지의 항로를 개척하여 국위를 과시한다. 또한 1421년 수도를 남경에서 북영으로 옮기고 문물을 정비한다. 그는 총 22,937권의 중국 문화유산을 총정리하는 백과사전인 영락대전 완성하지만 1900년 서방과의 전쟁에서 모두 유실되고 단 110책만 전해온다.
중국 역사에서 환관으로 인한 피해는 자주 등장한다. 한나라와 당나라, 그리고 명나라에서도 환관의 횡포는 이어진다. 5대 영종때 환관 왕진의 횡포는 극에 달하고, 관례를 깨고 몽골족의 말값을 적게 지불하여 1448년 몽골 오이라트가 대군을 끌고 명나라를 침공하여 황제가 포로가 된다 ("토목의 변"). 이후에도 환관의 횡포는 이어진다.
또한, 명나라 전체 역사에서 북쪽으로는 몽고족, 남쪽으로는 왜구에 끊이없이 시달린다. 1550년에는 몽고족이 북경을 포위하기도 하고, 신하국인 몽골에게 말을 강매당하는 수모를 겪으며 재정에 큰 문제를 초래한다. 일본의 가마쿠라 막부(12~14세기), 무로마치 막부(14~16세기)에 일본의 상공업이 발달하고 국내에서 해결안되는 물량이 넘쳐나서 이웃 나라에 밀무역을 시도하고, 이를 막으려는 명나라 정부에 반발하여 중국 동남해안을 끊임없이 약탈한다. 겨우 1564년이 되어서야 왜구를 소탕한다.
만주의 여진족을 누르하치가 통일하면서 세력을 키워가며 중원 회복의 기회를 엿본다. 임진왜란(1592-1598)으로 일본이 조선을 침공하자 명나라는 자국 수호를 위해 원군을 보냄에 따라 국가 사정이 결정적으로 악화된다. 이를 틈타 1616년 누르하치는 금나라를 계승한다는 후금을 세우고, 명을 침공하여 심양, 요동을 점령하고 심양을 도읍으로 국호를 "대청,大淸"으로 고친다.
또한, 명나라의 수공업이 발달함에 따라, 자본주의의 맹아가 싹틈에 따라, 부의 불균형이 심화되고 자본가들의 토지겸병이 심해진다. 이에따라 토지를 잃은 유민들이 반란세력에 가담하여 명의 국력은 나날이 쇠퇴해간다. 또한, 대청과의 잦은 전쟁을 기회로 여러 반란 세력들이 등장하며 이 중 섬서 지방의 "이자성"은 1643년에 북경을 공격하여 명나라를 16대 277년만에 멸망시킨다.
명나라 시기에 예수회(야소회) 교단의 신부들이 중국에 최초로 카톨릭을 전파한다. 신부 마테오리치는 "천주실의"라는 카톨릭과 유불을 결합한 내용의 소개서를 전파하고 교세를 확장한다. 그러나 청대에 들어온 도미니크/프란치스코 교단의 원리주의자들은 이러한 교리의 오염을 비판하고 제사를 금지하고 청 옹정제부터 청말 아편전쟁까지 기독교는 금지된다.
또한, 남송의 성리학에 반대하여 명나라의 왕양명은 양명학을 창시한다. 성리학의 성즉리(性卽理)에 반대하여 심즉리(心卽理)를, 선지후행(先知後行)에 반대하여 치양지(致良知)를, 격물치지(格物致知)에 반대하여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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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4년 반란군 이자성은 북경의 자금성을 함락하지만, 중국의 관문인 산해관 수비대장 오삼계의 50만 대군이 남아있었다. 이자성과 청나라 사이에 고민하던 오삼계는 이자성의 군대가 그의 부모와 첩을 체포했다는 소식에 청나라와 결탁하기로 한다. 이자성은 오삼계와의 한차례 전쟁에서 패한 후, 청나라 철기군을 두려워하여 북경을 포기하고 청나라는 무혈입성한다. 비록 북경에 입성하고 수도를 옮겼지만 여전히 삼번이라 불리는 강남의 세 왕들 (오삼계, 상지신, 경정충)의 세력은 컸다. 그러나, 강희제는 삼번을 제압하고 중국을 다시 통일한다.
원나라를 반면교시 삼아, 강희제(1661-1722)는 한족과 만주족을 동등하게 인정하고 만주어와 한자도 공용어로 삼는다. 또한, 여러 편찬사업(강희자전, 대청회전 등등)을 벌이고 청왕조의 기틀을 다진다. 뒤를 이은 옹정제(1722-1735)와 건륜제(1735-1795)도 편찬사업을 지속하는데, 이러한 편찬사업은 또한 모든 문서들의 검열/통합에 이용되어, 청에 반대하는 많은 문서들이 폐기처분되기도 한다. 또한, 한족 지식인들을 회유하면서 한편으로는 변발을 강요하는 등의 강경 정책을 펴기도 하여 당근과 채찍을 병행한다. 강희/옹정/건륭제 통치시기는 청의 전성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항상 그렇듯이 관료들이 부패하고 탐관오리들의 착취, 특권세력의 호화생활과 농민들의 비참한 삶은 반복되고, 1774년경부터 농민반란이 시작되어 1796년 백련교의 난이 발생하고 9년동안 이어지면서 청나라도 쇠퇴의 길을 걷는다.
1715년 영국은 중국과의 무역에서 적자가 계속되자 아편을 밀수출하고 이에 따라 중국의 은이 영국으로 흘러가고 아편중독자들이 나날이 증가한다. 이에따라 1836년 청나라는 아편 매매를 금지시키고 몰수/소각한다. 영국은 이에 반발하여 1841년 함대를 파견하여 광동을 공격하고 청은 6백만$의 배상금을 지불하는 굴욕적인 "광동협정"을 맺는다.
이에 반발한 농민군의 반격이 이어지자 이를 빌미로 1842년 영국은 다시 함대를 파견하여 1842년 상해를 점령하고 남경으로 진격하고 중국은 다시 "남경(난징)조약"을 맺고 홍콩을 이양하고 전쟁배상금을 지불하고 항구를 개방하고, 군함정박권을 인정하는 불평등조약을 맺는다. 중화사상은 여지없이 깨지고, 이때부터, 서방의 모든 나라들과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여 중국은 서구 열강의 각축장이 된다.
1840년 아편전쟁의 여파로 중화사상은 처참하게 깨지고, 이홍장등의 부국강병의 양무운동을 벌이지만, 그들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같은 혁신이 아니라, 중체서용(中體西用), 중국을 모체로 서양 지식을 이용하자는 소극적인 방식을 벗어나지 못하다가, 1894년 중일전쟁에서 다시 대패하고 근본적인 개혁의 필요성을 깨닫는다.
개혁은 청왕조를 유지하면서 개혁을 추구하자는 강유의의 "무술변법" 혹은 "변법자강운동" 과 청조를 전복하고 근대정부를 내세우자는 손문의 "혁명파"가 대두되는데, 청조의 광서제는 변법자강책을 후원하지만 보수세력, 서태후에게 반격을 당하고 100일만에 개혁은 실패한다. 이후, 부청멸양(扶淸滅洋)의 테러단체 의화단이 생기지만 이를 빌미로 서구 열강 8국이 침공하고, "신축조약"을 통해 다시 막대한 배상금, 북경에 외국군 주둔등을 허용하는 등 열강의 공동관리에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