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사

힐베르트와 마티스

existence_of_nothing 2021. 9. 29. 11:27

 

 

앙리 마티스(1869-1954)는 피카소와 함께 20세기 초반을 대표한다. Fauvism, 야수파의 두목이다. 전시회에서 그의 그림들과 함께 전시된 다비드 상을 보고 평론가가 "이곳은 마치 야수들에 들러쌓인 다비드 상같다"고 비판적으로 얘기하자.. "오홍? 좋은데 야수파.. 좋아 우리는 이제부터 야수파라 하자"...

 

구글링을 하니, 생기기도 야수처럼 생겼다. 그의 그림은 외부를 그대로 묘사하지 않는다. 사물을 과감하고 단순하게 변형하고, 터치도 비뚤비뚤 자유로우며, 색채의 대비도 강렬하다. 

 

 

프랑스 북부에서 태어나서 22세에 파리에서 법학을 공부하다가 맹장염에 빠진 그를 위로하기 위해 어머니가 가져온 그림들은 그의 진로를 바꾸고, 1893년 파리국립미술학교에서 구스타프 모로에게 배운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마하기 위하여 자신은 클래식한 예쁜 그림만 그리겠다고 뻥을 친다. 물론, 초반에는 그의 말데로 클래식한 화풍의 그림만 그린다. 

 

자기 부인을 모델로 그린 1905년작 "모자를 쓴 여인"이다. 자기를 그렸다기에 예쁘게 꽃단장하고 멋지게 포즈를 잡은 부인이, 나중에 이 그림을 보고 깜놀, 충격받아 이혼할 뻔한, 보기에도 칙칙한 그림이다. 어떻게 인간이면 이렇게 자기 와이프를 그릴 배짱을 지녔겠는가...야수임에 틀림없다. 보다시피, 그의 그림은 당시 예술계에 큰 충격을 준다. 오른쪽은 딸을 그렸다는 그림이다. 보다시피, "도찐개찐"이다. 

 

 

1906년 한 살롱에서 자신보다 11살이나 젊은 '피카소'를 만나고, 그 둘의 경쟁, 입체파와 야수파의 경쟁은 시작된다. 피카소의 그림이 직선적이고 어두워 보이는 반면, 마티스의 그림은 곡선적이고 밝아 보인다고 흔히들 얘기한다. 마티스를 흔히 "painter of happiness"라고 얘기한다.

 

아래 좌측은 1906년 그린 "삶의 기쁨", 오른쪽은 1910년의 "춤"이란작품이다. 오른쪽 작품은 단 3가지의 단순한 색채와 형태를 띤다. 우측 작품은 추후의 표현주의와 추상주의의 씨앗이 되었다고 나무 위키에 나와 있다. 그의 대부분의 작품은 당시의 암울한 시대적 분위기를 전혀 반영하지 않는 듯한, 사회 현상에 무관심한듯한 그의 태도는 많은 이들에게 비판을 받지만, 그는 걍 독고다이, 그의 길을 간다. "내가 꿈꾸는 미술이란 노동자들이 아무런 걱정없이 편안하게 머리를 눕힐 수 있는 안락의자 같은 작품이다"

 

반대로 당시에, 피카소가 그린 그림들은 어두운 시대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1907년 아비뇽의 처녀들). 아비뇽의 처녀들이후, 많은 야수파들이 입체파로 넘어가지만, 마티스는 꿋꿋이 조직을 지킨다. 

 

 

말년에 피카소는 전립선 수술로 인한 성기능 저하로 급격히 자포자기성의 어두운 그림을 그렸지만, 십이지장암을 선고받은 후에도 그는 행복한 그림들을 그려간다. 건강때문에(관절통과 암) 유화를 그릴수 없었던 그는 색종이를 오려붙이는 "컷아웃"  기법으로 창작을 계속한다. 아래는 1946년 그의 작품 "이카루스"이다. 태양을 향한 질주끝에 떨어진 이카루스가 느껴지는가? 잘 모르겠다.

 

사망 3년전 자신의 간병사였던 도미니크회 수녀 모니크 부르주아를 위해서 로사리오 예배당 (방스 채플, 니스에서 30분 거리)의 여러 작품 제작에 몰두하는데, 실제로는 성당 거의 전부를 자비를 들여서 건립하고, 그 안에서 작품활동을 하다가 85살의 나이로 1954년 생을 마감한다. 아래는 로사리오의 스테인드 글라스인데, 끝까지도 밝고 낙천적이었던, 그의 화풍을 보는 듯 하다.

 

"어린 아이가 사물에 다가갈때 느끼는 신선함과 순진함을 보존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당신은 평생 어린아이로 남아있으면서도 세상의 사물로 부터 에너지를 길러오는 성인이 되어야 한다" - 마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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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최고의 수학자는 누구일까… 이러한 순서 매김에 답하기는 쉽지 않다. 20세기의 유명한 수학자들은 푸앙카레(1854-1912), 힐베르트, 민코프스키, 칸토르, 바일, 천성선, 에미뇌터, 라마누잔, 괴델, 폰노이만, 그 외에도 너무 많은 뛰어난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한명을 고르라면 Hilbert가 떠오를 것 같다.

 

 

Hilbert(1862-1943)는 프러시아의 쾨니히스베르크 근처 베라우의 법조계 집안에서 태어난다.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에 4.5년만에 박사를 받고, 30세에 괴팅게 정교수가 되는, 푸앙카레와 비슷하게 평범한 엘리트 코스를 밟는다. 대학때 만난 민코프스키, 후르비츠와 평생 친구로 지내며, 괴팅겐을 벗어난 적이 없는 그의 묘지에는 “우리는 알아야 하고 우리는 분명히 알것이다, Wir müssen wissen, wir werden wissen" 라고 적힌 묘비가 있다.

 

 

과학/물리/수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이라면 힐버트의 이름을 자주 접한다. 그 분야에서 선형대수학, linear algebra는 거의 필수적인 과목이고 그 내용 중 벡터 공간(vector space), 내적공간(inner product space) 등의 얘기를 들은 후, complete inner product space를 Hilbert space라고 부른다는 것을 배운다. 양자 역학을 처음 시작할 때, 파동함수는 Hilbert space의 ray 혹은 vector라고 배운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큰 사건은 1900년 파리에서 열린 세계 수학자 대회에서, 수학자들이 연구해야 할, 그 당시까지 해결되지 않은 의미있는 23개의 연구 주제인, Hilbert’s 23 problem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그 문제들은 향후 20세기 전체에 걸쳐서 수학계에 풍부한 연구 주제를 가져다 주었고 수학 역사 발전에 큰 일조를 하였다. 그 중 일부 문제는 21세기가 지난 오늘날까지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유명한 “리만 가설”은 Hilbert 23 problem과 클레이 수학연구소의 millenium 7 problem 모두에 속한 유일한 문제로 남아있다.

 

오늘날 일반상대성이론에 관한 모든 공로를 Einstein 이 가지고 갔지만, 실제로는 1915년의 전후에 Hilbert와 Einstein 간에 일반상대성이론의 첫번째 완성자가 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이 있었다. 실제로 Hilbert는 1915년 11월 20일에 Einstein보다 5일먼저 투고하였지만, 12월 2일, 이듬해 3월에 발표된 Hilbert의 논문보다 3달 먼저 발표되었다. Hilbert의 논문에 잘못된 부분이 있어서 수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뿐 아니라, 투고 전, Hilbert는 Einstein에게 그의 이론을 편지로 보내기까지 하였다. 오늘날 과학사가들은 일반상대성이론의 공로를 그 둘 모두에게 돌린다.

 

 

실은, 특수 상대성 이론의 발표시점에도 로렌츠, 민코프스키, 동시성 특허 등, 비슷한 연구들이 동시 다발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오늘날, 우리들은 Einstein 이 완전 돌연변이로 알고 있지만, 실은 인간들의 지능은 Gaussian 분포를 하기 때문에, 비슷한 생각을 하면 비슷한 결론을 만들어 낸다. “총균쇠”에서도 제럴드 다이아몬드는 아프리카의 부족 집단을 예로 들며, 인간의 지능 자체는 시공간별로 큰 차이가 없었음을 얘기한다.  

 

아래 방정식을 Einstein-Hilbert Action이라고 부른다. 자연은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값을 최소로 하는 방향으로 운동한다. 이것을 최소 작용 원리, least action principle이라고 부른다. 물속에서 빛은 왜 굴절하는가? 물 밖의 한 점과, 물 속의 한점 사이를 통과하는 시간 (이 경우에 action은 시간)을 가장 최소로 하는 방향으로 운동을 하고, 공기와 물에서 빛의 이동속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을 페르마의 원리라고도 한다. 아래 action 값을 최소로 하는 방향으로 운동을 기술하면, 아인슈타인의 장 방정식(field equation)이 유도된다.

 

 

 

20세기초에 집합론의 여러 역설들이 발견되자 (프레게 공리에 대한 러셀의 역설(1901) 등), 힐버트는 페아노 공리계(자연수 체계)를 보완하여, 유한한 개수의 공리체계를 통해서 모든 명제와 증명을 형식화하고 그 형식 체계 안에서 완전하고 모순이 없는 증명을 완비하자는 야망적인 Hilbert program을 진행한다. 그러나 잘 알다시피 1931년 수학자 괴델은 불완전성 정리를 통하여 이것은 불가능함을 증명한다. 논리는 간단하다. “증명 불가능한 명제가 존재한다”는 명제를 생각하면 된다. 그 명제는 증명이 되어도, 되지 않아도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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