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사

지동설과 천동설

existence_of_nothing 2021. 2. 9. 09:03

코페르니쿠스가 1543년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를 발표하여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론을 부정한다. 사실 지동설의 역사는 아주 오래되었다. 기원전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타르코스등 가벼운 언급은 몇차례 있었다. 그는 신플라톤주의와 태양숭배사상의 영향을 받아 1510년부터 지구가 태양주위를 돈다고 생각했다. 생전 발표를 보류하다가 죽기직전 친구들의 권유로 “천체..”를 출판한다.

 

화형에 처해진 브루노의 영향으로 당시 교황청이 천동설에 대해서 박해를 가한것처럼 오해되지만 시계를 돌려 코페르니쿠스의 시대로 돌아가보면, 그를 반대한 것은 차라리 동료 학자들과 일부 개신교 신학자들이었다. 심지어 일부 추기경들은 그를 천문학에 새로운 이론을 제시했다고 소개까지 한다. 실제로 그에게 출판을 주저하게 만든 이들은 댓글 부대였다는 재미있는 사실 ^^

 

지동설이 기존 지식을 뒤엎기에 일부 신학적인 반대도 있었지만 이론 자체의 부정확도도 그의 생각을 사람들이 받아들이는데 주저하게 만든다. 실제로 코페르니쿠스는 태양 주위의 완전 원운동만 가정하였기에 관측을 설명하기 위하여 여러 미세 원 등을 도입해야 했기에  프톨레마이오스보다 행성의 움직임을 더 단순하게도, 정확하게도 설명하지 못했다. 

 

오늘날 단순한 7개 타원으로 그려지는 행성들의 공전 궤도를 34개의 많은 원들로 설명한 것이다. 또한, 지구가 움직이면 왜 인간들은 그것을 느끼지 못하냐, 왜 움직임 반대 방향의 역풍이 존재하지 않느냐, 지구가 움직이는데 왜 별의 위치는 고정(시차운동)이냐 등등의 주요 질문에 거의 답변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과학적으로는 오히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이 더 합리적으로 보였을 수도 있다. 그가 실제로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 전문가였지만 신플라톤주의와 태양신 숭배의 영향을 받아서 지구와 태양을 바꿔치기만 하였지, 천구의 운동은 완벽한 원이어야 한다는 고정 관념에서는 탈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티코 브라헤(1546-1601)는 갈릴레이(1564-1642)와 달리 맨눈으로 천체를 정확하게 관측한다. 브라헤는 덴마크의 왕 프레드릭 2세의 후원으로 벤(Ven)섬에 천문대를 건설하여(1576) 관측하고 1577 핼리 혜성을 관측한다. 그러나 천문대 유지를 위해서 무리하게 세금을 징수하다 지원이 끊어지고 신성로마제국 루돌프 2세의 초청으로 프라하에서 살면서 케플러(1571-1630)와 연구한다. 600만불의 사나이 수준의 엄청난 시력을 바탕으로 방대한 데이터를 모으지만, 파티에서 소변을 참다가 걸린 방광염 (다른 설로는 수은중독)의 원인으로 사망하고 그의 모든 자료는 케플러에게 전달된다.

 

케플러(1571-1630)는 독일베일 지방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다. 1589년 튀빙겐 대학에서 미카엘마에스트린 교수를 만나 코페르니쿠스이론을 전수받는다. 그곳에서 점성술로 이름을 떨치다가 (케플러는 자신이 만든 달력으로 터키의 침공과 추운 겨울을 우연히 맞춘다), 1596년 ‘우주의 신비’라는 책을 저술하는데, 갈릴레이도 표지만 보고 쳐박아둔 책을 티코 브라헤가 읽고서 천재성을 인정하여 프라하로 초청한다.

 

브라헤 사후 덴마크 국왕 루돌프는 케플러를 황제의 수학담당관으로 임명하여 케플러는 연구를 이어간다. 케플러는 브라헤의 방대한 자료를 정확히 분석하여 행성의 운행 법칙인 케플러 1,2법칙을 만들고 1609년 “새로운 천문학(Astronomia nova)”을 통해서 발표한다. 1619년 마지막 저서 “우주의 조화”에서 마지막 법칙인 제 3법칙을 소개한다. 훗날 뉴턴은 케플러의 어깨 위에서 만유인력 법칙을 만든다.

 

케플러의 3법칙은 논술 시험에도 종종 출제된다. 1.타원궤도의 법칙, 2. 면적속도일정의 법칙, 3.조화의 법칙으로 구성된다. 먼저, 모든 행성들은 태양 주변을 타원궤도로 움직인다. 두번째로 면적 속도 일정 혹은 각운동량 보존의 법칙은 단위 시간당 지나는 면적이 동일하다는 법칙이다. 마지막으로는 행성의 공전 주기 T와 장반경 a 사이에 T^2이 a^3에 비례한다는 법칙이다.

 

어떻게 지구의 주위를 여러 행성들이 돌고 있다는 주장, 기원후 150년에 "천문학 대전"으로 소개된 프롤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이 그렇게 오랫동안 천문학계를 지배하고 있었을까? 그것은 단순히 지구를 우주의 중심에 두는 신학적 태도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의 부정확도가 천동설보다 더 컸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지구에서 화성을 관측하면 아래 그림과 같이, 화성이 때로는 반대 방향으로 역행하는 이상한 현상을 관측한다. 서에서 동으로 가다가 어느 순간 방대 방향으로 다시 반대 방향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왜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는가? 오른쪽 그림에 있듯이 태양 주변을 서로 다른 속도로 공전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 현상을 프롤레마이오스의 천동설에서는 어떻게 설명하였을까?

 

인간들은 완전함에 대한 로망이 있다. 행성의 운동은 어떤 한점을 중심으로 완벽한 원 운동을 해야 한다는 로망, 그것은 오랜 시간동인 인류의 머리속에 존재했고, 아래 그림과 같은 원운동을 상상하게 하였다. 즉, 행성들은 이심원(공전궤도)을 주전원(작은원)을 그리면서 공전한다고 설명해도 오른쪽 그림에 있듯이 화성의 역행운동을 잘 설명할 수 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행성의 모양 변화를 관측할 만한 망원경이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설명으로도 충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갈릴레이가 정밀한 망원경으로 금성의 모양변화를 관측하여 이러한 주장이 틀렸음을 알아낸다. 역사나 과학사의 해석에서 오늘날의 기준으로 그 당시의 상황을 해석하는 오류를 자주 범한다. 어떤 상황을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떤 사건이 발생하던 시간/장소에 대한 맥락적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프롤레마이오스의 이론은 그 당시로는 현상을 잘 설명하는 정상 과학이었지만, 측정도구의 발달로 인해서 그 대안인 지동설에 그 지위를 넘겨준다. 바로 토마스 쿤의 paradigm shift이다.

 

케플러는 기계적인 천상의 움직임을 발견하였지만 동시에 신학과 철학을 전공하였다. 그는 “기하학은 천지창조이전부터 있었다. 기하학은 신의 뜻과 함께 영원히 공존한다. 기하학은 신 그 자체이다”라고 자신이 발견한 규칙의 아름다움을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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