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측의 시작, 갈릴레이
근대를 연 인물로 첫 손가락을 꼽자면 누구일까… 의견이 다양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갈릴레이를 첫 손으로 꼽고 싶다. 갈릴레이 이후, 인간들은 관념의 세상에서 벗어나서, 관측과 실험의 세상에 진입하고, 그로 인해 확실한 지식이 쌓이고, 그것들이 층층이 쌓이면서 인류 지성은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과학적 지층의 가장 밑바닥에 존재하는 인물일 것이다.
갈릴레이는 1564 년(세익스피어도 이해 탄생) 이탈리아 피사의 몰락귀족의 아들로 태어난다. 아버지는 재정문제 해결책으로 그를 피사대학에 보내 의사를 만들려고 했지만 갈릴레이는 엉뚱하게 수학을 공부한다. 그러나 돈이 없어 대학을 중퇴하고 피사대학, 파도바 대학의 수학교수가 되지만 궁핍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중, 드디어 피렌체 페르디난트 대공의 아들 코시모 데 메디치를 만나면서 재정적 문제에서 벗어난다. 원래는 수학을 기반으로 한 역학 연구에 주력하다가 천문학을 접하고 그 분야의 대가가 된다.
그 당시, 네들란드에서 유리나 보석 세공 기술이 발달했는데 안경장인 한스 리퍼세이가 볼록렌즈와 오목렌즈를 겹쳐서 봤더니 세상이 왕방울만큼 크게 보임을 발견하고 1608년 망원경을 발명한다. 갈릴레이는 그 소식을 듣고 망원경을 구한 후 이를 개량하여 천체를 관측할 수 있는 30배율의 고성능 천체 망원경을 만든다. 5.0시력의 티코를 가볍게 능가하는 천체 망원경으로 1610년 그는 달의 표면, 태약 흑점, 목성의 위성, 금성의 형상변화등을 관측하고 지구가 돈다는 사실을 확신한다. 목성의 한 위성에 “메디치 성”이라고 이름 붙인 후, 메디치 가문의 수석 수학/철학자의 지위로 수직 계급 상승한다.
갈릴레이가 천동설이 아니라 지동설을 주장해서 종교재판을 했다고 알고 있다. 그렇게 단순한 이유라면 그가 아니라 코페르니쿠스가 잡혀가야 했겠지만, 성격 좋고 본인 자신이 성직자였던 코페르니쿠스는 물론 아무 문제 없이 장수했고 (물론, 몇해 동안 그의 책은 금서 목록에 오르긴 한다) 교황청에서도 처음에는 갈릴레이를 초청하여 강연을 듣는 등 호의적이었고 지동설 자체를 문제삼지는 않았다.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자와의 논쟁에서 갈릴레이의 편을 든다.
그러나, 논쟁을 좋아하는 갈릴레이의 공격성, 그리고 새로운 여러 발견들에 맞게 성격을 새로이 해석해야 한다는 그의 위험한 주장이 당시 종교개혁으로 인한 독자적 성경 해석을 극히 우려하던 교황청의 위기의식과 접목되어 그냥 “미안해”라고 사과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던 일이 종교 재판으로 연결된다. 실제로 1600년 지동설을 주장한 브루노가 이단으로 화형에 처해지기도 한다 (물론, 주된 이유는 지동설 자체가 아니었고 그의 여러 다양한 과격한 주장 때문이었다).
갈릴레이와 개인적 친분이 있던 우르바노 8세가 교황에 오르자, 갈릴레이는 1632년 “두 큰 우주체계의 대화”라는 책에서 프톨레 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의 우주관을 대비하는 책을 쓰는데, 그 중 등장인물중 지동설을 반대하는 우둔한 인물로 묘사되는 심플리치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가, 교황 자신을 풍자한 것으로 오해한 우르바노가 1633년, 나이 70세의 갈릴레오를 종교 재판에 회부한다. 재판의 결과는 사실 갈릴레오의 일방적인 사과로 끝난다.
흔히, 이 재판이 지동설에 대한 재판으로 오해를 하지만, 실제로 천동설이 카톨릭의 교리였던 적은 없었다고 하며, 지구가 움직인다/움직이지 않는다 자체가 성서의 내용이 아니니 문제가 크게 없다는 진보적 의견이 다수였다. 코페르니쿠스의 저서는 단 5년 정도만 금서로 묶였다가 곧 해제된다. 재판을 통해 전달하려던 메시지는 “까불다가 다친다”였던 것으로 보인다.
피사의 사탑 전설(그의 저서 어디에도 없음)이 내려오지만, 실제로 갈릴레오가 실험을 즐겨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즉, 천체 관측은 열심히 했지만, 물리 실험을 열심히 한 것은 아니기에 일부 과학사가들은 그를 근대 실험 물리학의 토대를 만든 인물로 평하는 것에는 반대한다. 도리어 그는 본인이 확신한 내용을 그냥 확인하고 싶어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그가 피사의 사탑과 비슷한 경사면을 따라 철구의 낙하시간을 측정할 때, 자신의 맥박으로 결과를 확인했다고 나무 위키는 설명한다.
피사의 사탑에서 가볍고 무거운 두 물체를 낙하했다는 실험은 그의 저서에 어디에도 없는 허구의 이야기 이며, 실제로 1586년 네들란드 스테빈의 유사한 낙하 실험을 제자이자 전기작가인 비비아니(Vicenzo Viviani)가 스승을 존경한 나머지 각색하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또한 진자의 등시성은 진자의 진폭과 진동주기는 무관하다는 원리이며 이를 19세에 갈릴레이가 성당에서 미사 도중 샹들리에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발견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그 성당에 샹들리에는 23세인 1587년 설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항상 영웅들의 주변에서는 신화 만들기가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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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동설에 대한 반대 이론 중, 코페르니쿠스가 잘 대답하지 못한 것이, 1. 어떻게 지구의 움직임을 느낄 수 없는가? 2. 지구가 움직이면 그 반대 방향으로 물건이 날아가야 않는가? 3. 높은 곳에서 떨어뜨린 물체는 왜 (뒤나 앞이 아니라) 똑바로 떨어지는가?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갈릴레이는 등속으로 움직이는 좌표계, 관성 좌표계의 개념을 생각한다. 즉, 모두가 동일한 속력으로 움직인다면, 그러한 운동계는 정지한 좌표계와 구분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모든 물체가 한방향으로 움직인다면 그것은 모든 물체가 정지해 있는 것과 동일하다. 따라서, 1/2/3 문제는 모두 한방에 해결된다.
관성의 법칙이다. 그의 생각은 데카르트에게 전달되고 데카르트는 좀 더 정교하게 이를 연구하여 관성의 법칙을 완성한다. 흔히 운동의 3법칙 모두 뉴턴의 업적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 뉴턴이 추가한 부분은 F=ma 뿐이며, 나머지 두 법칙은 갈릴레이와 데카르트가 이미 생각했다. 물리학에서 공간의 병진 운동(translation )을 갈릴레이 변환이라고 얘기한다.
갈릴레이의 관성 좌표계의 개념은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에 연결된다. 다만, 광속이 관성 좌표계에서 일정해야 한다는 사실, 우주에 관측자의 움직임에 무관한 우주 상수가 있다는 사실로부터, 다시 이 우주는 코믹한 세계, 희안하게 생긴 우주로 환원된다.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으로 대변되는 현대 과학은, 다시 우리들을 환상과 마법의 세계, 이상한 나라로 인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