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턴의 등장
뉴턴(Sir Isaac Newton, 1642-1727)은 영국 시골의 평범한 집안의 유복자로 태어난다. 어머니가 농부로 키우려던 것을 외삼촌이 재능을 알아보고 캠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로 보낸다. 뉴턴을 보통 갈릴레이의 후예로 알지만, 실제로 그는 대학에서 데카르트와 유클리드의 기하를 주로 공부했다. 지도교수인 아이작 베로가 조기 정년퇴직하면서 제자 뉴턴을 26살의 나이에 정교수로 앉힌다. 그 후, 20년동안 뉴턴은 그냥 평범한 수학교수로 은둔생활을 한다. 그러다 1687년 “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를 쓰면서 인류 최고의 천재의 반열에 등극한다.
흑사병(Black Death) 페스트는 여러 차례에 걸쳐서 유럽을 점령한다. 실크로드를 따라 1343년 크림 반도에 도착한 검은쥐들에게서 지중해라인을 따라 유럽 전역으로 퍼져가서 그 당시 인구의 30~60%를 몰살한다. 이전 세계인구가 4억5천만명이든 것이 1억명이 줄어들어 17세기에야 회복된다. 그 후 17세기까지 거의 100차례에 걸쳐서 끊임없이 유럽 대륙을 괴롭히고 이를 빙자한 마녀사냥도 횡행한다. 1665년 페스트가 다시 창궐하여 대학들이 문을 닫자 뉴턴은 1666년, 23살의 나이에 시골에 머물면서 깊은 사색에 빠져서 프린키피아의 기본적인 아이디어를 완성한다. 그의 집중력은 달걀대신 시계를 삶은 우화로 증명된다.
프린키피아는 총 3권의 라틴어로 작성되었다. 그 증명이 대수적이지 않고 기하학적이며 내용이 난해하여 읽기가 쉽지 않다. 1권은 “물체들의 움직임”, 2권은 “저항이 있는 공간에서의 물체들의 움직임”, 제 3권은 “태양계의 구조”이다. 프린키피아 1권 1장에서 무한소, 미분의 개념을 소개하는데, 사실 무한에 대해서 인류가 제대로 알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훨씬 뒤인 19세기 칸토르에 이르러서이다. 2장과 3장에서 케플러의 법칙들을 수학적으로 유도한다.
뉴턴은 먼저 질량의 개념, 밀도x부피를 설명하고, 운동량과 힘을 정의한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운동의 3법칙을 소개한다. 그 중, 실제로 관성과 작용 반작용의 법칙은 이미 데카르트가 갈릴레이의 개념을 이어받아 방법서설에서 소개한 내용이고, 실제로 새로이 그가 만든 법칙은 F=ma라는 공식이다.
실제로 뉴턴은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기 싫어했고 프린키피아를 저술할 생각도 전혀 없었다. 그러나, 핼리 혜성으로 유명한 핼리가 동료들과 토론을 하다가 행성을 돌게 하는 힘이 태양과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제안을 하지만 도저히 증명을 못하고 뉴턴에게 가져가니 뉴턴이 단박에 그 궤도가 타원임을 얘기한다. 이에 감동한 핼리가 출판을 우기고 출판비도 대면서 1687년 세상에 선을 보인다. 그 책의 내용이 그렇게 난해한 이유도 다른 사람들이 시비를 이해를 못해서 시비를 걸지 못하게 하려는 뉴턴의 소심함으로 추측한다.
뉴턴이 이렇게 소심하게 된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뉴턴은 실제로 역학이 아니라 광학을 가장 먼저 연구한다. 프리즘이 빛을 빨주노초..로 분해한다는 것은 그 당시 널리 알려져 있었고, 그것은 프리즘의 어떠한 기구적인, 물성적인 성질로 인해서 투명한 빛이 왜곡되어 나타난다고 사람들은 이해했다.
그러나, 뉴턴이 빨주노초..로 분리된 빛 중 빨강을 다시 프리즘에 대어 보니 빨강만 나옴을 발견한다. 이 말의 의미는? 만약, 기구의 물성적인 문제라면 다시 다양한 빛이 나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빛 자체가 여러 색, 스펙트럼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이미 분리된 파장의 빛은 그대로 나올 것이다. 지극히 논리적인 설명이었지만 왕립학회에서 발표하니, 호이겐스와 후크 같은 광학의 대가들이 미친듯이 공격하고, 이에 상처를 받은 뉴턴은 피해망상증으로 이후로는 자신의 업적의 출판을 극히 꺼린다.
뉴턴(1642-1727)과 라이프니츠(1646-1716) 사이의 미적분 논쟁은 유명하다. 뉴턴은 라이프니츠보다 훨씬 이전에 이미 미적분의 개념을 연구하였지만, 그 소심함으로 발표를 미루고 있다가 라이프니츠가 학술지에 최초로 발표한다. 그런데, 그 이전에 사실 라이프니츠가 뉴턴의 연구를 알았을 가능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은 재판에까지 가고, 재판 결과도 뉴턴을 원조로 인정하지만 그 당시 뉴턴이 재판의 주체인 영국 왕립 과학협회장 이었으니, 사실 재판의 의미가 크지는 않다. 그러나, 수학계에서는 역학에 기반하지 않고, 순수하게 수학적으로 미적분의 개념을 정립한 라이프니츠를 높게 평가하고, 실제로 우리가 배우는 미적분 기호는 모두 그에게서 기원한다.
라이프니츠와 뉴턴의 타인과는 비교 불가의 두 천재들이다. 그러나 수학 분야의 천재성은 뉴턴이 한 수 위였던 것으로 보이는 일화가 있다. 1696년 스위스 수학자 요한 베르누이가 어려운 미분문제, 최단 강하 곡선 문제를 양쪽에 보냈는데, 뉴턴은 순식간에(바로 다음날), 라이프니츠는 마감시간 6개월을 1년 연기해서 1년 반 뒤에 정답을 제출한다. 뉴턴은 익명으로 정답을 보내지만, “발톱의 모양을 보니 사자의 짓이구나” 라고 베르누이는 단박에 주인공을 알아 맞힌다.
A와 B의 두 지점 사이에 중력만으로 이동하는 경우 가장 단거리로 이동하는 경로를 찾는 문제이고, 답은 아래와 같은 붉은 색 곡선, 사이클로이드의 경로이다. 뉴턴은 이미 이 문제를 고민한 것으로 보이며, 이 문제를 풀기 위하여 그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던 변분법(calculus of variation)이라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변분법은 물리학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라그랑지안을 공부한 분들은 누구나 익숙한 방법이다.
뉴턴 명언들이 여러 개 있다. 몇 가지를 나열해 보면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멀리 볼 수 있었던 것은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가치 있는 발견을 한 것은 다른 능력보다 참을성 있게 관찰한 덕분이다”,
“나의 능력은 평범하다. 오로지 실행력이 나를 성공으로 이끌었다”,
“진리는 복잡하거나 섞여 있는 것들 에서가 아니라 단순함에서 발견된다”
주식으로 폭망 후에 “나는 천체의 운동은 계산할 수 있지만, 사람들의 광기는 측정할 수가 없다”고 불평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