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사

중세철학 - 안셀무스

existence_of_nothing 2021. 2. 26. 12:11

 

중세는 말 그대로 학문의 암흑기이다. 과학/수학의 입장에서는 최소한 서유럽에서는 진화를 못한 정도가 아니라 퇴보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누군가 망상에 시달리면 정신이상이라고 하고, 다수가 망상에 시달리면 종교라고 한다”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에 나오는 말이다. 무신론자들에게 이러한 잃어버린 1000여년은 아까워 보일 수도 있다.

 

중세 암흑기라는 용어는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시초인 이탈리아 페트라르카(1304-1374)가 처음 얘기했다고 한다. 르네상스가 중세를 조롱하는 의미로 지어낸 말이다. 정확히 언제부터 언제까지를 지칭하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대략 기독교가 용인된 313년부터 르네상스가 시작되기 전까지의 대략 800~1000년 기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그 기간은 이슬람의 황금시대(750-1258)로 불린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대체한 “지혜의 집”에서 그리스의 철학/수학 연구를 이어갔기 때문이다.

 

페트루스 다미아누스(Petrus Damianus, 1007-1072)는 “카톨릭 신앙론”에 “이성은 신학의 시녀” 라고 하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거룩한 교리의 시녀”, 상투스 보나벤투라(1278-1274)는 타 학문들은 신의 영광을 빛내는 목적이 아니라면 연구의 의미를 상실한 것이라고 얘기한다.

 

이 기간동안 서유럽에서 수학/논리학/철학은 사라지고 비잔틴 문명에서만 그 명맥을 유지한다. 오늘날은 그 반대이다. 어떻게 그렇게 찬란하던 아랍과 비잔틴의 자연과학 기술은 사라져버렸는가? 그 기점이 된 것이 11~13세기에 걸친 십자군 원정일 것이다. 십자군 원정에서 서유럽은 패했지만, 반대로 아랍권은 승리했지만 패배한 서유럽에서 신의 영향력이 사라지고 비잔틴의 많은 문화와 학자들이 옮겨온데 반해, 아랍권은 더욱 폐쇄적인 사회로 변해갔다.

 

이슬람하면 오늘날 원리주격 급진파들과 테러만이 상상될 것이지만, 실제로 이슬람 초기에 타 정복지에 종교를 강요하지 않았고 그들의 문화와 종교를 보호하는데 대한 약간의 대가적인 세금만 요구했을 뿐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자 도리어 그들의 개종을 금지한다고(세금 수입 감소로) 백서를 발표했을 정도이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을 전후로 종교 지상주의 신학자들이 실권을 차지한다.

 

예를 들면, 가잘리(1058-1111)같은 신학자들이 “철학자들의 모순”에서 타 문화에 의한 이슬람의 오염을 경고한다. 아베로에스(Averroes, 1126-1198)가 아리스토텔레스 기반의 경전 해석을 주장하자 분노한 대중들은 그의 책을 소각해 버린다. 그들이 연구한 주된 내용들이 도리어 서구 유럽 사회에서 꽃을 피우게 된 것 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아베로에스 (아랍 이름은 이븐 루시드)가 아리스토텔레스 저서에 단 수많은 주석으로 중세 대학이 연구한다. 또한 그의 단일지성론은 서구에 수많은 아베로에스 주의자들을 만들며 16세기까지 영향력을 미친다).

 

11세기 십자군 전쟁을 계기로 아랍권에서 연구하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유입되면서 서유럽에서 조금씩 학문을 할 수 있는 토대가 만들어진다. 스콜라(scholar, 학자)는 그리스어 스콜레(“여유”라는 의미)에서 유래한다. 9~15세기에 유럽에서 유행한 신학/철학 사조를 의미한다. 사실 답을 정한 상태에서 철학을 하는 것은 일견 철학보다는 합리화/정당화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중세 초기의 플라톤/신플라톤주의 만으로 모든 것을 일자 중심으로 해석하던 것에 비하면 십자군 전쟁을 통하여 유입된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영향이 많이 반영된다.

 

카톨릭에 있어서 성체를 받아 먹는 것(영성체)은 큰 의미가 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내어주는 내 몸이다. 나를 기념하여 이 예식을 행하여라” 라고 한 예수의 말씀에 따라서이다. 지금도 카톨릭과 동방정교회에서는 영성체가 실제 예수의 몸과 피로 변한다고 주장하고 성공회/개신교는 주가 함께한다는 상징적 의미로 받아들인다 (츠빙글리 해석). 어떤 이들은 이것을 녹여 먹어야 하는지 씹어 먹어야 하는지로 심각하게 고민한다.

 

카톨릭 기적 얘기 중 란치아노의 기적이 있다. 성체 축성 후, 실제로 성체 제병(과자)이 인간의 살로, 포도주가 피로 변했다는 기적이다. 란치아노의 영성체는 아무런 방부 조처 없이 보관되어 왔고 1971년 학자들이 그 성분을 분석하여 그것이 실제 인간의 심장조직 살과 피, 동일인의 것임을 확인하였고 부패하지 않고 오랜 기간동안 보존되었다는 것을 확인한다.

 

11세기에 베렌가리우스(998-1088)는 영성체의 실체 변화 (transubstantiation)을 거부하여 1079년 로마 교회회의로 불려간다. 그곳에서 성체에 그리스도가 실재함을 인정하지만 고향으로 돌아가서 철회한다. 베렌가리우스는 “이것이 나의 몸”이라고 문장을 고민한다. 이것이 빵이라면, 예수가 빵으로 되어 있다는 말인가? 이것이 몸이라면 예수는 예수이다라는 의미없는 문장에 불과하다. 그러면 단 하나, 탄수화물이 단백질로 변한 것이다. 언제, 어떤 순간부터?

 

어떻게 탄수화물이 단백질 덩어리로 변환되는 것인가? 이 논쟁에서 과학은 큰 의미가 없다. 이것은 믿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베렌가리우스와 친구 란프랑쿠스(1004-1089)는 반대편에서 논쟁을 한다. 란프랑쿠스는 성경 말씀의 진위여부를 두고 논증을 하면 안되고 성경을 그대로 사실로, fact로 인정한 상태에서 논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당연 이 논쟁이 쉽게 끝날 성질은 아니기에 그냥 교회가 개입하여 베렌가리우스에게 파문을 협박하여 끝을 맺는다. 란프랑쿠스는 논쟁의 공로로 베크 수도원장 그리고 훗날 켄터베리 대주교가 되지만, 교회의 권위로 논쟁을 막을 내린 것은 계속 옥의 티로 남는다.

 

안셀무스(1033-1109)는 이탈리아 북부 아오스타의 부유층 출신이지만 아버지와의 갈등으로 23살에 가출하여 평생 집에 돌아가지 않는다. 가출한지 3년 후, 1059년 베크 베데딕트 수도원(란프랑쿠스)에서 공부를 시작한다. 아버지가 죽자 백작의 지위를 받지만 모두 포기하고 수도사의 길을 걷는다. 1067년 수도원장이 되어 학교를 운영하여 수도원을 유럽 최고의 학교로 만든다. 제자들이 성경의 권위가 아니라 변증만으로 신을 설명하라는 요청에 따라 “모놀로기온(Monologion)”과 훗날 “프로슬로기온(proslogion)” 이라는 책을 쓴다. 그 책에서 그를 유명하게 만든 신 존재증명을 시도한다. 즉, 순수 논리만으로 성경에 의거하지 않고 신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한 것이다.

 

신앙에 관해서 우리는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다. 그것이 나와 이웃들의 자유를 방해하지 않으면 말이다. “나는 이해하기 위하여 믿는다” 아우구스이하 교부학자들의 토대이다. 영성체의 변화는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이해가 안된다. 그러나, 믿는다면 그것은 이해가 되고 이해가 되면 설명이 된다. 안셀무스를 가장 유명하게 만든 신존재증명의 논리를 보자.

 

“모든 사람들은 선을 얻고자 한다” 선을 행하고자 하는 원인이 존재하고 이것은 더 선해야 한다. 그러면 더 선한 존재를 있게 만든 더더 선한 존재가 있을 것이다. 이제 limit를 취해 보면, 이것의 최대값, max 선이 존재할 것이다. 따라서, 신은 존재할 수 밖에 없다. 모놀로기온에서 주장한 내용이다.

 

사람들이 선한지 선하지 않은지는 당신의 가치 판단 기준이 아니냐, 신 존재 증명에 가치라는 기준을 넣어도 되냐고 주장하자, 프로슬로기온에서는 “선하다”를 “크다”로 바꾼다.  “그보다 더 큰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는 존재는 존재한다”. 이것은 사실 증명이 아니다. 그냥 궁극적인 존재가 존재한다는 것을 말한 것 뿐이다. 논리로만 따지면 큰 것의 종결자가 신일 이유는 없다. 중세의 논쟁 수준이 이 정도였던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안셀무스의 신 존재 증명은, 이성의 힘만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을, 신의 이해를 위해서 신의 힘이 필요없다는 것을 얘기했기에 반대로 얘기하면 이성의 위대함을 피력했다는 역설적인 의미가 크다. 사실 종교권력은 이러한 교부학자들의 태도를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이 신의 위대함을 인간의 이성으로 증명하려고 하면 할수록, 증명에 성공하면 할 수록, 역설적으로 신의 역할이 위축되기 때문이다.

 

안셀무스는 잉글랜드 노르만 왕족 월리엄 II세에게 충성 서약을 거부하여 영국을 떠나게 되지만(1097), 뒤를 이은 헨리 I세가 다시 불러들인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성직 임명권을 둘러싼 교황과의 갈등으로 불거진 충성 서약 금지에 따라 그는 다시 켄터베리를 떠나 로마로 돌아온다(1103). 헨리 1세의 딸 마틸다가 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프랑스 앙리 귀족과 결혼함에 따라 훗날 백년전쟁(1337-1453)의 씨앗이 되었음은 이미 얘기하였다. 주교서임권논란이 마무리되면서 1106년 켄터베리 대주교로 임명되고 켄터베리의 안셀무스로 불리게 된다 (1109년 사망). 서임권을 둘러싼 하인리히 4세의 1077년 카노사의 굴욕등 이 당시 교황권과 황권의 충돌은 극에 달한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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