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사

중세 철학 - 토마스 아퀴나스

existence_of_nothing 2021. 3. 2. 13:13

알기 위해서 믿을 것인가? 아니면 믿기 위해서 알 것인가?

 

토마스 아퀴나스(1224-1274)는 이탈리아 아퀴노 로카세카 지방의 군주 집안 출신이다. 당시는 프랑스에서는 루이 9세(1226-1270), 신성로마는 프리드리히 2세(1220-1250)가 집권중인 시기였다. 프리드리히 2세는 6차 십자군 전쟁에 참전하여 이슬람과 협상을 맺고 예루살렘을 얻는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 전쟁보다는 이슬람 문화의 수입과 교역에 더 관심을 보여서 유럽최초의 계몽 군주로 불린다. 루이 9세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따라 청렴 결백하게 행동하여 국왕으로 유일하게 성인으로 추대된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로, 7차 십자군에서 포로, 8차 십자군 전쟁에서 병사한다. 반면 이단으로 판단되는 자, 성직자 비리를 잔인하게 처벌하고 보고밀파와 함께 영지주의 이단 종파인 카타리파를 척결한다. 정의의 양면성이다.

 

아퀴나스는 먼저 베네딕트 수도회에 들어갔지만 프리드리히2세와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의 분쟁으로 수도회가 폐쇄되자 다시 나폴리대학으로 옮기고, 도미니코수도회에 입단한다. 그곳에서 알베르투스 마그누스(1193-1280)라는 스승을 만난다. 이전 교부학자들이 종교 외의 학문에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반해 마그누스는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으로 불릴 정도로 다방면에 학식이 뛰어났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 특히 형이상학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서유럽에 소개한다. 아퀴나스는 이후 파리대학과 로마수도원 교수로 있다가, 1274년 포사노바의 시토 수도원에서 병사한다. 그는 1269-1272 사이에 신학대전(Summa Theologica) 1~3부(총 100권)를 저술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플라톤주의, 그리고 이를 계승한 플로티노스의 신플라톤주의를 기반으로 신학교리를 정리한데 반해, 보에티우스(480-524)는 6세기에 처음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라틴어로 번역한 “철학의 위안”이후 한동안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 간의 논쟁이 생기는데, 아퀴나스 이전까지는 주로 플라톤주의자들이 득세한다. 아퀴나스는 마그누스가 소개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추가하여 신학대전을 완성한다. 플토와 아텔의 대립은 다음에 소개할 유명론과 실재론의 대립, 합리주의와 경험주의의 대립 등 유럽 철학사의 곳곳에 모습을 드러낸다.

 

아퀴나스가 신학을 집대성하는 거대한 저서를 남겼지만 정작 교황청은 그의 그러한 노력을 못 마땅해 했다. 이유는 안셀무스 게시글에 올린 것과 비슷한다. 인간들이 이성으로 신을 파악하면 할수록, 반대로 인간의 이성이 부각되고 신은 점점 무기력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실제로 아퀴나스의 장례식 추도문이 발굴되었을 때, 그것에 서명한 이들 중 대부분이 철학자였다는 것이 이를 반증한다.

 

아퀴나스의 신존재 증명은 다분히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운동의 원인이 되는 부동의 원동자 논리이다. 즉, “그 자신의 존재가 자신의 본성과는 다른 어떤 것인 모든 사물은 자신의 존재를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한 원인을 쫓아가면 제 1원인으로 돌아가야 한다” 따라서 모든 원인의 원인으로서 의 신은 반드시 존재한다. 안셀무스의 가장 큰 것에서 가장 근원인 것으로 논리가 옮겨가지만, 결국은 비슷한 논리구조이다.

 

그렇지만 인간은 신을 사유할 수는 없다. “개별자들은 그런 존재 자체를 유추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 생각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존재 그 자체는 모든 종을 벗어나 존재하고 있으며 모든 존재들의 존재근거 로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흔히 “부정철학”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3차원에 사는 존재가 4차원적인 사물을 수학적으로 상상할 수는 있지만, 4차원의 세상을 머리속에 그릴 수는 없다. 3차원의 세상에서 비슷하게 유추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피타고라스, 소크라테스, 플라톤은 영혼 불멸을 얘기한다. 플라톤에게 육체는 영혼의 감옥에 불과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의 영원성, 세계의 영원성을 주장한다. 또한 질료인 육체와 형상인 영혼이 결합하여 인간을 이룬다 즉, 영혼은 신체의 현실태로 죽음으로 함께 소멸한다 (“영혼은 살아있는 신체의 원인이며 원리”). 더 나아가 인간의 지성은 육체와 독립된 기능이고 영원한 것이라고 “영혼론”에서 주장한다.

 

토마스는 그 절충안을 선택한다. 영혼은 불멸이지만 신에 의해서 소멸될 수 있는 조건부 불멸이며, 육체를 떠난 영혼은 “본성을 거르는” 불완전한 존재이지만 같은 영적인 존재를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영혼은 부활의 날에 육체와 재결합하여 구원받는다. 영혼의 불멸을 주장하면 신과 동격이 되고, 육체와 함께 소멸하면 구원의 의미가 상실되는 아포리아에서의 궁여지책일 것이다. “영혼은 자신의 본질상 정신이자 동시에 자신의 본질상 육체의 형상이다”, “육체를 통해 영혼을 가진 동물”이 인간이다고 한다. 영혼을 얘기하는 순간 철학은 지저분해진다.

 

아베로에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재해석하여 보편자로서의 인간 지성은 죽음과 함께 우주지성이라는 단일한 지성으로 돌아간다는 “지성단일성론 혹은 단일지성론”을 주장한다 (급진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 혹은 아베로에스주의, 단테). 물론, 이를 수용하면 기독교의 구원론은 나가레가 되기에(다들 한넘이 되면 누굴 벌주나?) 교황청은 이들 아베로에스주의자 혹은 급진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단테)들의 책을 금서목록에 올린다 (1210 파리종교회의~1255년까지). 아퀴나스는 지성단일성론을 강하게 비판하고 지성을 영혼의 한 능력으로 간주함으로 지성의 불멸성을 영혼의 불멸성으로 대체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대유행하여, 스콜라학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철학자”, 아베로에스를 “주석자” 라는 대명사로 부른다.

 

“’신은 존재한다’라는 문장에서 ‘존재한다’라는 단어가 여러 가지로 다양하게 언표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신의 존재를 곧바로 인식한 것일 수는 없다. 따라서 인간의 신 인식은 신이야말로 개념화될 수 없다는 것이라는 사실을 파악하는 데서 절정에 달한다. “자신이 신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야 말로 신에 대한 인간 인식의 극한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인간 인식을 강조하지 않은 반면 아퀴나스는 그리스도교적인 인간중심주의로 관점을 옮긴 전환기 사유자라고 철학사에서 그를 평가한다.

 

아퀴나스의 철학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오늘날의 기준에서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아퀴나스가 수십권의 책을 써서 사람들에게 신을 이해시키려고 노력했지만 사람들이 이를 통해서 도리어 신을 의심할 수 있는 이성을 발달시키고, 인간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점, 그의 의도와 달리 그가 종교 개혁의 작은 씨앗이 되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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