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사

스피노자

existence_of_nothing 2021. 3. 4. 13:17

스피노자는 흔히 철학가들의 철학가라고 불린다. 스피노자의 철학은 사실 상당히 독특하고 시대를 앞서는 듯한 부분이 많다. 또한 철학과 삶의 일치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스피노자는 자신의 철학과 삶을 일치시키기 위해서 용기있게 행동한 철학자 중 한명이다.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철학자 중 한명이다.

 

 

스피노자의 주저작 에티카 (윤리학)는 "자유에 도달하는 방법 또는 길에 관한 윤리학"이다. 그가 말하는 자유란 무엇일까? 에티카는 1부: 신에 대하여 (존재론), 2부:정신의 본성과 기원에 대하여 (인식론), 3부: 정서의 기원과 본성에 대하여, 4부: 인간의 예속에 대하여, 5부:  지성의 역량 혹은 인간의 자유에 대하여 라는 전체 5부의 내용으로 구성된다.

 

 

1. 진리와 신 정의

에티카의 1부와 2부를 읽다보면 이게 철학책인지, 수학책인지 헷갈린다. 철학책으로 보기에는 밑도 끝도 없는 정의, 정리, 증명이 나오고, 수학책으로 보기에는 그 증명과 정의들이 조금 조악해 보인다. 스피노자는 "진리가 진리와 허위의 기준이다"라는 명제를 통해서 우리가 진리에 대해서 얘기하기 위해서는 먼저 진리를 정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미리 자신이 생각하는 진리를 정의하고, 나의 논리적인 철학적 사고들이 그 정의에 논리적 정합성을 가지고 일치하는지 위배되는지를 반성하는 형태이다. 일견 일리가 가는 주장이다. 자신의 맥락에서의 진리를 타인에게 강요하거나 때로는 자신이 어떤 주장을 펴는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스피노자는 에티카 1부에서 신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정의 내리고, 정의에 따른 정리를 하나하나 전개하고 증명한다. 스피노자 철학의 구조는 수학적 구조와 비슷하다. 공리를 기반으로 내적인 논리 혹은 공리 체계를 만들고 논리적으로 이를 증명하는 형태를 취한다. 스피노자의 진리는 적합한 것이며 '적합성'이란 관념과 관념이 표현하는 것(관념의 원인)과의 내적인 일치, 적합한 관념은 원인을 표현하는 관념이다. 우리가 외부의 자극에 따라 반응하는 지각이나 상상은 1종 지식이라고 정의하고 공통 관념 혹은 수학적/자연학적 논리 체계의 인식을 2종 지식, 분석적인 사고가 아니라 종합적인 직관에 의한 인식을 3종의 지식이라고 정의하고 3종의 지식을 가장 적합한 지식으로 간주한다. 

 

 

2. 신과 우주

흔히 스피노자의 신관에 대해서 범신론이라고 얘기하는데, 그 표현이 적합한 것인지 혼동이 온다.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다보면 그가 유신론자인지 무신론자인지 혼동이 올때가 많다. 1부에서 정의하는 신은 "무한한 존재이고, 그 하나하나가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포함하는 무한히 많은 속성으로 이루어진 실체"이다.

 

 

신은 사유와 연장의 속성을 가지며 무한 양태(무한 모습)로 표현된다. 종래에는 신은 순수형상이고 세계는 물질적으로 생각한데 비하여 스피노자는 신에게 연장(공간)의 속성을 더하였다. 신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신적 본성의 인과적 필연성으로 생긴다. 인간들은 우주의 모든 질서, 신적 질서를 파악할 수 있는 지능이 없기에 우주나 나타나는 현상에 어떠한 목적인(존재의 원인)을 가정한다. 자연에는 우연적인 것이 없으며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일정한 방식으로 작용할 수 있도록 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간단히 얘기하면 스피노자의 신은 변화하는 자연 그자체이며, 우주의 존재와 변화는 신의 무한 양태의 표현이며 의지를 가진 신의 행위가 아니라 신적 본질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나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법칙적 조화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스피노자의 신"은 믿지만 인류의 운명과 행동에 관여하는 신은 믿지 않습니다"라고 자신이 이해한 스피노자를 표현한다. 그러나 에티카 5부에 가면 마친 신앙 고백을 하듯이 신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여 "신에 취한 철학자"라는 스피노자의 모습을 드러낸다. 

 

 

3. 자유와 자유의지

스피노자는 "우리는 오직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만 존재하며, 자신에 의해서만 작용하도록 결정되는 것이 자유롭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다른것에 의해서 존재하도록 결정되고 일정하고 결정된 방식으로 존재하고 작용하도록 결정되는 것은 불가피하거나 강제되었다고 말한다" 라고 자유로운 상태를 정의한다. 스피노자가 정의하는 의지란 "참된 것 또는 거짓된 것을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능력"이고 자유의지의 부정은 참과 거짓에 대한 긍정이나 부정이 자의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인간의 뇌는 1000억개의 뉴런과 100조개의 연결로 구성된 복잡계이고, 그것은 다시 주변과 자연의 모든 시스템과 연결되어 있기에 그 인과 관계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카오스 이론). 그럴때, 즉 자신의 행동의 원인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을 때,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을 때에도 인간의 뇌는 항상 논리적 정합성을 유지하려는 속성이 있기에 인간들은 자유의지라는 허상을 만들어 낸다. 내가 돌을 던져서 날아가는 돌의 경우 자기자신을 의식하고 그 원인을 모른다면, 자신의 의지로 날아가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흔히 우리는 내가 마음대로 어떤 결정과 행동을 할 수 있을 때 자유롭다고 느끼지만, 과연 나는 세상의 이데올로기, 타인의 욕망에 휘둘리지 않은 자유로운 결정을 한 것인지에 대해서 진지한 고민을 하지는 않는다. 아침에 출근하려고 차를 타려는데 평소에 안 보이던 스크래치가 보인다. 누가 그랬을까.. 어제까지 멀쩡했는데.. 블랙박스를 사 둘걸... 온갖 상념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기분이 좋지 않다. 우리의 생각도 항상 인과적인 관계에 의해서 연결된다. 내가 누군가를 정치인으로 지지할 때, 이것은 뜬금없이 그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다. 원인이 있기 때문이며, 심지어 광인들의 경우에도 그 행동에는 물리적, 임상적 원인이 존재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는 그 심리적인 동인을 정확히 알 수 없고 알고자 하지 않기에 내가 나의 자유의지로 그를 지지한다고 생각한다. 

 

 

스피노자에게 인간은 자유의지의 착각속에 사는 정념의 노예이다. 즉, 무엇인가를 원한다는 의지는 의식하지만 그 원인을 모르기에 원인이 없다고 (즉, 자유의지로 무엇인가를 원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다시 자연의 질서로 돌아올 것을 강조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렇게 신적 본성의 필연성을 인식할때 자유인이 될 수 있다. 자신이 자신도 모르는 욕망의 굴레에 갖혀 있음을 똑바로 바라보는 순간에 그는 기계적인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해탈의 경지이다.

 

 

4. 욕망과 감정

사물에는 존재를 지속하려는 욕구(힘)인 코나투스(conatus)가 존재한다. 코나투스의 작용에 의해서 생명이나 물질들은 운동을 하고 이것은 신체와 정신에 동시에 영향을 주는데 정신에 관여하면 "의지", 정신과 신체에 관여하면 "충동", 충동을 정신이 의식하는 경우  "욕망"이라고 정의한다. 물을 마시고 싶은 욕망은 신체가 물을 갈망하고 정신이 이를 의식하기 때문이다. 존재의 본질은 욕망이고 욕망은 자신을 보존하려고 하는 노력에서 발생한다.

 

 

코나투스의 작용에 따라 신체가 더 완전한 상태로 진행할 때 이를 "기쁨"이라고 하고, 반대의 경우 "슬픔"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서의 기쁨은 외부의 자극을 통한 수동적인 기쁨이나 슬픔이 아니고 코나투스의 활동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정념의 노예는 무의식적으로 욕구하며 그 예의 하나는 사랑이다. 만약 정신이 능동적으로 적합하게 인식한다면 수동감정에서 벗어나 능동 감정을 가지게 된다.

 

 

욕망은 인간의 본질이지만 타자와 환경에 크게 의존한다. 이것을 라캉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얘기한다 (정확히는 그 때의 타자는 대타자라고 불리는 존재이며 흔히 말하는 타자인 소타자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스피노자도 이러한 사실을 지적하며 수동적인 정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욕망을 만들어내는 조건이나 환경을 바꿈으로써 욕망 자체를 전환하는 것, 쉽게 얘기하면 환경을 변화시켜서 무의식의 동작 상태를 전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5. 선악과 윤리

스피노자에게 보편적인 선이란 존재할 수 없다. 스피노자의 선의 정의는 "나의 본성(코나투스의 요구)에 도달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 혹은 나에게 유익한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윤리적 이기주의자라고 불리며 그의 저작 에티카(윤리학)가 실제 윤리학계에서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나에게 유익"하다고 할 때, 나의 욕망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본성에 도달하는데, 즉 해탈에 도움이 되는 것을 선으로 정의한 것이다. 삶에서 무엇보다 유용한 것은 지성 , 즉 이성을 가능한 한 완전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선과 악은 실재적 존재가 아니라 이성, 메타 윤리의 존재들이다. "모든 사물들은 필연적이며, 자연안에는 선과 악도 없다"고 주장한다. 

 

 

보통 윤리라고 하면 "어떠어떠하게(착하게 ^^) 행동하고 살아야 한다"라는 규범적 의미를 상상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우리가 윤리라는 과목을 학교에서 배우며, 자연스럽게 유교적 윤리관을 직/간접적으로 강제받는다. 이것은 일견은 사회의 안정성을 유지하는 측면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현재의 시대적,역사적, 지배자의 논리에 지배받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경우도 있다. 

 

 

스피노자에게 윤리란 "착하게 살자"가 아니다. 기쁨의 감응을 야기하는 양태와의 만남을 지향하는 행위가 좋은 삶이다. 여기서 기쁨이란 당연히 코나투스의 자연스런 욕구, 외부의 자극이 아니라 이성에 의한 의지에 의한 경우이며 어떻게 보면 해탈의 경지를 추구하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는 어떤 것이 선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그것을 향해 노력하고, 의지하며, 욕구하고, 욕망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것을 향해 노력하고, 의지하며, 욕구하고, 욕망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선하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라는 스피노자의 말을 들으면 마치 니체를 보는 듯한 느낌도 가진다. 

 

 

그러나 에티카 5부에서 그는 신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신에대한 신의 사랑을 주장한다. 우리 모두는 신의 무한 양태이기에 나는 타자이고 타자는 나이기에 이기와 이타라는 용어 자체의 의미도 무색해 진다.

 

 

"영원의 상" 아래에서, 신의 품안에서 세상을 바라본 그는 무엇을 얘기하려고 한 것인가... 아직도 question mark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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