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사

칸트

existence_of_nothing 2021. 3. 4. 13:19

 

 

선함이란 무엇인가, 왜 선하게 행동해야 하는가?

 

칸트는 철학계의 뉴턴과 같은 존재인 것 같다. 데카르트가 갈릴레이처럼 근대 과학의 태동을 알렸다면 칸트는 근대 철학의 정립에 크게 기여하였다. 흔히 철학은 칸트 이전의 철학과 이후의 철학으로 구분한다고도 한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우리는 무엇을 알수 있는가라는 인식론을, 실천이성비판에서는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는가라는 윤리학을, 판단력 비판에서는 인간은 무엇을 바랄수있는가라는 미학을 즉, 진/선/미에 대한 종합적인 철학적 사고를 전개하였다. 

 

칸트는 흔히 본유 관념(선험적 이성)을 강조하는 합리주의와 경험된 것들만이 이성을 이룬다는 경험주의를 비판적으로 종합한 철학자로 불린다("경험없는 지성은 공허하며, 지성없는 경험은 맹목적이다").  칸트이전까지는 흄과 버클리는 서로 자신들이 같은 부류인지,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가 같은 부류인지 전혀 의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의 주장에 공통점이  크게 있는지도 개인적으로 크게 공감은 가지 않는다. 하지만 칸트이후의 많은 철학자들은 그같은 대분류에 대체적으로 동의하는 것 같다. 

 

그는 교수로 임용된 후 11년동안 논문을 전혀 발표하지 않고, 기존의 철학(뉴턴의 자연학, 루소/흄의 철학)에 대한 깊이있는 충분한 성찰을 수행한다. 10년동안 놀고먹는 교수라는 비난을 들었지만 자신만의 길을 꿋꿋하게 따라간다. 왜 한국에는 노벨상 수상자가 없는가, 왜 국내 교수들은 임팩트 있는 논문을 쓰지 못하는가? 그것은 아마 숫자만을 count하는 문화, 줄 세우는 문화, 기다려주지 않는 문화도 큰 원인중 하나일 것이다. 

 

칸트에 따르면 인간은 외부대상을 감각 기관의 경험을 통하여 받아들이고 이것을 선험적 이성에 따른 인식 형식에 따라 범주화되고 표상화된 관념을 인식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자연학/수학이 아닌 순수 형이상학은 진위의 판단을 객관적으로 할 수 없기에 경험의 대상이 아니고 따라서 종합판단의 대상이 아니라고 본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의 용도폐기론). 형이상학의 가치는 인정하지만 그것은 진위 판단의 대상은 아니라는 것은, 현대의 시각으로 보면 너무나 당연한 주장이다.

 

칸트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물자체"일 것이다. 이성은 "이율배반"적인 논제를 만든다. 이율배반은 각각은 논리적으로 타당성을 가지지만 공존할 수 없는 논리를 말한다. 인간의 이성은 감성->지성->이성의 형태로 진행된다. 인간의 감성은 외부의 입력을 받아들이고 지성을 통해서 개념화와 범주화를 진행한다. 외부대상은 이러한 표상화를 통해서 재구성되어 관념화가 되고 뇌는 관념화가 된 대상을 상대로 인식작용을 수행하기에 대상 그 자체의 존재(물자체)를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없다. 이성은 감성과 지성을 넘어 물자체의 인식을 추구하기에 여러 추상적인 개념들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율배반이 생겨난다. 

 

칸트의 인식론을 흔히들 인식론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주장한다 (본인은 "사고 방식의 혁명"이라고 표현). 그 의미는 코페르니쿠스가 우주를 정지시키고 지구의 운동을 상상한 것처럼, 칸트도 의식의 대상을 정지시키고, 대상을 바라보는 의식을 바라보았다는 점에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좋은 것은 행복한 것을 추구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얘기한다. 칸트의 윤리학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으로 종래의 행복지향적인 목적론적 윤리관을 부정하고 정언명령을 따르는 의무론적인 윤리관을 주장한다. 행복은 감정에 관한 문제이며 도덕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언 명령은 조건을 전재로 하는 가언명령과 달리 인간에 내재된 도덕의식을 무조건적으로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정언명령인지 아닌지의 판단은 1. 보편적 입법의 원리(남들도 나와 같이 행동할지), 2. 인간은 수단이 아닌 목적(존엄한 존재) 라는 두 가지 원리로 판단하면 된다고 한다. 흔히들 선한 거짓말을 한다. "오늘 참 예쁘다" 이것은 상대방을 기분좋게 하기 위해서 하는 흔한 거짓말이고 누구도 피해를 보지 않지만 칸트의 윤리관에는 위배된다. 목적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고, 거짓말 자체는 잘못된 행위이기 때문이다.

 

트롤리 문제가 있다. 테러범이 선로에 인질들을 묶어두고, 그들을 치면 열차 승객들은 살고, 그렇지 않은 선로를 선택하면 폭발하게 되어 있다.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비슷한 예는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태평양에서 표류하다가 식량이 떨어져서 여러 동료가 가장 약한 동료를 죽인 실제적인 사례도 있다. 칸트에게 1000명을 살리기 위해서 5명을 죽이는 행위는 허용될 수 없다. 목적이 개입되어 있고 또한 사람을 죽이는 행위는 잘못된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점이 칸트주의와 공리주의가 부딪히는 점이다. 

 

정언명령은 인간에게 내재된 도덕회로가 있음을 가정한다. 보편적으로 선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이성의 명령이 있으며 이를 따라야 한다. 그것은 인간에게 선험적으로 내재되어 있기에 시대와 상황에 따라 (크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주장에 참 공감하기 어렵다. 우리가 선하다고 느끼는 것들은 시대와 상황의 지배를 받는다. 감정을 떠난 정언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고 그 당위성, 즉 왜 나는 명확하지도 않고, 보편적인지 그렇지 않은지도 확실히 판단하기 어려우며, 나의 행복과 밀접한 관련도 없는 그런 허구적으로 보이는 명령에 따라야 하는가? 

 

데이비드 흄은 인간의 이성이 정념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정념이 주인이며 이성은 정념의 노예라고 주장한다. 이성은 행위의 동기를 만들 수 없으며 감정이 동기를 만들고 이성은 사후적으로 이를 분석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에게 도덕적 행위의 동기는 감정이며, 감정은 주관적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다행히도 인간에게는 타 동물에게 찾기 어려운 동감이라는 감정회로가 내장되어 있기에 타인의 고통과 불행을 마치 자신이 그러한 일을 당한 것처럼 공감한다. 이러한 공감때문에 도덕적 행위가 나오며, 도덕적으로 선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공감의 훈련과 경험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개인적으로 칸트의 정언명령보다 훨씬 동감이 가는 윤리관이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존재론과 인식론은 철학보다는 자연과학의 발전에 기대를 하는 편이며 철학은 윤리학, 과학이 대답을 할 수 없는 가치 문제에 집중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윤리학적 행동에 크게 영향을 주는 자유의지에 대해서도 인지/뇌 과학 분야에서 많은 연구 결과가 나오고 있다는 점에서 윤리학 역시 현대 과학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것 같다. 인지학에서 바라본 뇌는 도파민 분비를 목적으로 하는 보상 시스템에 의해서 움직인다. 즉 도파민이라는 화학 물질이 분비되는 상황을 목적으로 인간은 행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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