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사

독일 관념론

existence_of_nothing 2021. 3. 5. 13:21

 

 

칸트에 의해서 철학은 비로소 하나의 체계적인 학문으로 자리잡는다. 그러나 칸트의 인식론의 테마인 "물자체"개념은 그 이후 계속 철학자들의 공격 대상이 된다. 인식의 대상인 아닌 순수 객체로서의 물자체가 존재한다면 그것이 존재하던 하지 않던 무슨 의미가 있느냐이다. 사실 공돌이들에게 칸트의 물자체 개념은 상당히 합리적인 이야기이다.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뇌가 감각신호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표상으로서의 세상을 인식하고 있다. 에델만이 말하는 개념의 범주화이다. 현대 물리학을 배운 우리는 세상이 물질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들의 상호 작용에 따라 물질로 인식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17세기 문돌이들에게는 이러한 인식이 없을 뿐더러, 주체와 객체의 분리라는 개념을 견딜수가 없었다.

 

피히테, 셸링, 헤겔은 독일 관념론을 대표하는 3명의 철학자이다. 관념론은 세상의 실체는 물질이 아니라 정신작용으로 본다는 측면에서 흔히 유물론과의 상대개념으로  다루어지고, 주체와 독립적인 객체의 존재를 불인정한다는 측면에서 실재론과 대비되기도 한다. 

 

피히테는 칸트의 물자체 개념에 의해서 분리된 객체와 주체의 문제를 객체를 주체의 일부로 흡수함으로써 해결한다. 세상은 생각하는 나 (자아)와 나를 제외한 것 (비아)로 분리가 된다. 비아는 자체적으로 정립될 수 없으며, 자아의 정립 후에 자아에 대립 개념으로 정립되며 비아에 의해서 다시 자아의 존재는 좀 더 명확해 진다. 자아(정)는 비아(반)를 낳고, 비아가 다시 자아를 재정립(합)하는 구조의 유기적인 진행은 향 후에 헤겔과 마르크스의 변증법의 토대가 된다.

 

피히테에 따르면 선험적 주체 이전에 절대자아가 존재하며 절대자아는 물자체를 인식하여 자아와의 관계를 설립한다. 즉 물자체를 물자체 그대로 인식하고 이것을 관념화하여 자아에게 전달한다는 개념으로 추측된다. 절대적인 자아와 표상으로서의 자아의 순환 운동을 Tathandlung 이라는 철학용어로 표현한다. "cogito ergo sum"의 cogito는 자아이고, 그 생각을 하게 한 무엇인가는 절대자아이다. 즉, 자아는 행위하는 자인 동시에 행위의 산물이다. 칸트를 흔히 초월적 관념론자라고 하고, 피히테는 주관적 관념론자, 헤겔은 절대적 관념론자라고 말한다. 

 

셸링은 주체와 객체의 문제를 주체와 객체를 통합시킴으로써 해결한다. 스피노자는 신의 무한양태가 자연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세상 모든 것들은 신의 자기 발현이며 신은 자신의 존재 원리에 따라 표현할 수 있는 모든 형태로 존재한다. 신의 넘침이 인간이고 인간은 결국 자연과 혼연일체의 존재인 것이다. 쉘링은 스피노자의 철학을 이어받아, 나와 자연 혹은 주관과 객관은 동일하다는 동일성 철학을 주장한다. 우리 눈에 보이는 개체성은 질적인 차이 즉 본질적인 차이가 아니라 단지 양적인 차이, 외양만의 차이일 뿐이라는 것이다. 

 

헤겔은 피히테와 쉘링이 어린 나이에 천재성을 보인데 비해서 비교적 늦은 나이에 쉘링의 도움으로 교수자리를 얻는다. 헤겔은 글쓰기 실력도 뛰어난 것은 아니어서 헤겔 철학은 주제의 어려움에 용어와 표현의 난잡성이 더해져서 난해하기로 악명이 높다. 그러나, 헤겔은 자연과학, 역사까지 모두 철학의 범주에 포함시키고, 거의 모든 학문 분야를 자기만의 일관된 철학으로 기술하여 칸트에 버금가는 대가의 반열에 오른다. 많은 철학자들이 외톨이로 살다가 외롭고 비참한 운명을 맞이한 이가 많은데 비해, 헤겔은 아름다운 부인과 똘망똘망한 자식들, 대학총장의 명예까지 모든 권력과 천수를 누린다.

 

인식 불가능한 물자체를 가정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물자체는 주체와 객체의 분단을 고착화할 뿐이다. 헤겔에게, 이성이 포착하지 못하는 것은 존재할 이유가 없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감성->지각->오성 에 의해서 객체는 사유되며 인간은 이에 더해 자기의식과 정신이라는 단계를 더 가진다. 헤겔의 정신(Geist)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정신과 다르며 세계속에서 스스로를 전개하는 유기체적인 절대정신이다. 세계 자체는 정신의 자기 현용이며 이는 스피노자의 신의 개념과 유사한 것으로 추측된다.

 

헤겔은 절대정신의 자기 발현인 역사의 진행원리를 설명하기 위하여 피히테의 변증법을 차용한다. 즉 절대정신은 한번에 완벽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정반합의 운동의 형태로 진행한다. 즉 특정한 시간에 어떠한 모습으로 존재하지만 그 내부에 자체 모순을 안고 있기에 반으로의 움직임이 드러나며, 반은 그 자체가 다시 모순을 안고 있기에 합의 형태로 진화하며, 이러한 과정은 절대정신의 궁극적인 목적에 다다를때까지 계속 진행된다. 

 

인간 이성의 본질은 자유이다. 자유가 없다면 그것은 이성이 아니라 기계적인 움직임, 흐름일 뿐일 것이다 (이것은 사실 셸링이 이미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헤겔의 자유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데로 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니다. 그것은 감각적이고 이기적인 자유로움일 뿐이고, 헤겔의 자유는 공동체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개인이 적극적으로 행동할 자유를 의미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하여 헤겔은 유명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예로 든다. 형식적으로 노예는 주인보다 자유롭지 못하지만, 노예는 주인이 시키는 일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실현함으로써 자유를 누리는데 비해서 주인은 노예의 결과물에 전적으로 의존하기에 도리어 주인이 노예보다 자유롭지 못하다는 재미있는 비유이다. 

 

헤겔은 철학자들에게 종종 죽은개로 취급받고, 파시스트들을 위한 철학으로 매도된다. 그것은 헤겔 자신이 민주주의보다 왕정을 선호하고 나폴레옹을 절대정신의 발현으로 표현하고 프로이센 독재를 옹호하였으며 개인의 자유보다는 공동체적인 선, 자유를 주장하여서일 것이다. 그러나 칸트가 정태적이고 개인적인데 반해서 헤겔 철학은 동적이며 역사적으로 기술하며 역사는 진보하고 있고, 진보해야 한다는 역사철학을 주장하였기에 마르크스는 헤겔의 이 점은 높이 평가하였다.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고,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다", 이 문장은 간단히 설명하면 "세상에 보이는 것은 이성의 자연스러운 발현(따라서 좋은 것)이냐, 아니면 우리가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모습으로 현실을 만들어야 하느냐" 라는 2가지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 단순한 이 문장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헤겔좌파와 헤겔우파로 극단적으로 나눠진다.

 

세상은 물질들로 구성되어 물질들의 상호 작용으로 존재하느냐, 아니면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의 존재 원리가 물리학이라는 법칙적 운용을 통해서 자기를 실현하는 것이냐. 과학을 믿는 신자들은 무목적적이고 물질적인 자연의 우연한 한 순간에 우리가 실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대과학은 다시 우리에게 "물질이란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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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은 아래 그림과 같이 당시의 거의 모든 학문을 논리학, 자연철학, 정신철학이라는 3개의 학문으로 분류하고 그것들에 대해서 변증법과 절대정신의 일관된 ㅣ논리체계로 모두 정리하였다 (사람들이 철학사적으로 별 영향력이 없는 피히테나 셸링과 달리 헤겔을 칸트와 동급의 반열에 두는 이유일 것이다). 예를 들면 법철학의 경우에도 절대정신의 발현에 따라 정반합의 과정으로 발전한다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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