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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근대

existence_of_nothing 2021. 9. 30. 11:48

1840년의 아편전쟁은, 동양 근대사의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중화사상의 중국, 이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던 조선, 천황/쇼군 봉건제의 일본 모두에게 영국 군함 몇 척에 천하의 중국이 힘도 못쓰고 항복한 것은 참으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 사건의 본질은 동양세계의 서양세계에 대한 완패였으나, 당시 청과 조공관계인 화이질서(華夷秩序)의 체재하의 조선은 중국 관보의 왜곡된 시각을 받아들여, 그냥 하나의 해프닝 쯤으로 여기게 된다. 실제로, 동양의 귀퉁이 나라인 조선에 대해서 타 제국의 관심이 그다지 크지도 않았기에 잠시는 문제가 없었지만,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근대화 시점을 당길 수 있는 안타까운 기회를 놓친 것이다. 반면 일본은 네들란드가 전해준 생생하고 비참한 동양의 현실을 그대로 접하게 되고, 이미 메이지 유신이 발생하기 전에 개항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한다. 

 

이전에 얘기한데로 중국에서는 증국번 이홍장의 중체서용(중국을 기반으로 서양을 응용) 기반의 "양무운동"을 전개하지만, 이것은 양무기업의 이익을 위한 사적 운동으로 변질하고, 결국 메이지 유신 이후 아시아 최초의 근대 국가로 변신한 일본에게 1894년 중일전쟁에서 처참히 패배한 후, 근대화의 필요성을 자각한다.

 

그것은 두갈래, 즉, 청나라 체제를 유지하면서 점진적인 개혁을 하는 강유위중심의 "변법자강"파와, 왕조를 타파하고 공화제를 세우자는 손문의 "혁명파"로 진행한다. 당연히 청 황제 광서제는 변법운동을 지지하였지만, 보수파인 서태후에 의해서 100일만에 실패한다. 그 후 1899년 의화단이 기독교 신자 거주지이니 평원현을 습격하고 이를 빌미로 서구 열강 8개국(영/미/일/러/독/프/오/이) 연합군은 다시 침략하여 1901년 불평등조약인 "신축조약"을 맺는다. 열강의 관리하에 들어간 것이다.

 

 

손문은 1905년 일본 동경에서 "중국 동맹회"(국민당 전신)을 결성하고, 청왕조를 타도하는 "민족, 민권, 민생"의 "삼민주의"를 기치로 1911년 호북성 무창에서 군사봉기를 일으키고 1912년 남경(난징)에 중화민국 임시정보를 수립한다. 손문(쑨원)은 임시대통령(대총통)이 되고, 중국동맹회는 "국민당"으로 개명한다. 260년의 청왕조, 2000년의 황제체제가 무너지고 공화제가 탄생한 것이다. "신해혁명(신하이가이밍)"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국민당내 파벌들은 분열되고 가장 세력이 센 "원세개(위안스카이)"에게 대총통의 자리를 넘기지만, 그는 애초에 공화제보다는 황제체제에 관심이 있는 복고적 인물이었기에 1913년 의회를 해산하고 국민당을 해체한다. 손문은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여 "중화혁명당"을 만들고 1919년 광주에 국민당 정보를 세운다. 

 

1914년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세르비아 침공으로 시작한 1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군의 편에 섰기에, 이참에 열강의 지배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만 1919년 파리강화회의는 중국의 요구를 묵살하고 중국에 대한 권리는 일본으로 넘긴다. 이에 분노한 북경대 학생들은 그 해, 천안문 광장에서 "5/4"운동을 일으키고, 이 때 공화정의 대안으로 공산주의가 대두되고, 1921년 상해에서 모택동을 비롯한 13인이 중국공산당을 창립한다. 

 

 

원세개라는 군벌을 타도하기 위하여 1923년 국민당과 공산당은 제 1차 국공합작을 맺고 북상 진행 중, 1925년 손문이 사망하자, 국민당의 장개석은 공산당을 배제하고자 동맹을 깨고 1927년 상해에서 공산당에 대한 테러를 개시한다 ("4/12 반공 쿠데타"). 북벌에 성공한 장개석은 공산당 토벌에 나서고 공산당은 농촌으로 잠입하여 세력을 넓히지만 1934년 거의 섬멸단계에 이른다. 

 

1934년 국민당의 포위망을 뚫고 모택동과 10만명은 11개 성/18개 산맥/17개의 강을 건너는 1만2천 km의 대장정을 시작하는데, 1/10인 1만명이 생존하여 섬서 지방에 근거지를 마련한다. 그러나, 그 과정의 끈끈한 동료의식에 의해서 그들은 훗날 공산 혁명의 최정예부대가 된다.

 

일본이 만주를 기반으로 북경의 화북일대를 장악하려고 하자, 공산당과 국민당은  1936년 장학량이 장개석을 감금하여 협상을 강요한 "서안사변"을 계기로 제 2차 국공합작을 단행한다. 1937년 7/7사변(노구교사변)을 계기로 다시 중일 전쟁이 발생하고 12/13일 남경대학살을 자행한다.

 

 

국민당 세력의 기반인 대도시와 상업지대는 속속 일본에 장악되지만 중국공산당의 팔로군/신사군은 국민당 철수지에 "농촌해방구"를 건설하면서 세력을 확장한다. 장개석은 다시 공산당과 충돌하고 1941년 원난사건(신사군 사건), 1942년 환남사변을 계기로 계기로 연합은 붕괴되고, 중국은 일본군/공산당/국민당이 분할 지배한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하자, 국공내전이 발발하고 1949년 공산당은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다. 

 

1949년 모택동은 반공세력을 제압하면서 국가 발전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 5대운동(토지개혁/3반5반/반혁명진압/사상개조/항미원조), 소련과의 독립을 위한 삼면홍기(대약진/인민공사/사회주의건설)의 대약진 운동을 전개하지만 실패한다. 유소기/등소평이 자본주의적 요소의 도입으로 성과를 올리자 이념논쟁인 "문화대혁명"으로 반격하지만, 모택동 사후 급속히 무너진다. 

 

1978년 등소평이 권력을 잡고 "흑묘백묘론"의 자본주의적인 시장개방/경쟁 원리를 도입하여 경제를 발전시키지만 이 과정에서 소득 불균형이 심해진다. 이에 1989년 천안문 사태가 발생하지만, 등소평은 강경진압한다. 1997년 등소평 사후, 강택민은 이를 계승 발전시키고, 1997년 홍콩을 돌려받아, 역사상 유례가 없는 1국 2체제(자본주의/사회주의의 동거)를 실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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