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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단상

existence_of_nothing 2023. 1. 31. 16:05

무아, 나는 없다. 그러면 지금 이렇게 타이핑을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허상이고 없는 것인가? 당연히 그렇지 않음을 누구나 안다. 그렇게 타이핑을 치고 있는 것을 "나나"라고 부르자. "나나"는 존재한다. 그러나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나"는 연기적으로 존재하기에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범인들은 이러한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아상"에 집착한다. "나나"를 "나"로 착각하는데서 아상이 생긴다.

나는 있다. 지금 이순간 이 자리에 내가 존재하고 내가 기쁨과 슬픔과 화남과 자비를 느낀다. 그러나, 그러한 나는 순간순간 변화한다. 좀 전의 나는 화를 내는 나였고, 지금의 나는 자비의 나이다. 그러한 변화는 왜 생기는 가, 누군가 나를 긁었기 때문이거나 내가 만든 상을 곱씹어서 생각한 결과 감정의 동요가 생겼기 때문이다.

요즘 주식을 한다. 심심 풀이로 천연가스 레버리지 주식을 사서 좀 재미를 보았다. 그러나 요 며칠은 연속적인 폭락으로 인해 재미가 반감되었다. 주식 창을 보니, 온갖 생각들이 떠오르고, 온갖 갈등들이 떠 오른다. 조용히 주식창을 닫는다. 그리고, 현재 투자한 금액은 그냥 원래 나에게 없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거액이 아니니, 있으나 없으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러면 감정의 동요는 사라지고, 나는 다시 타원 곡선이론에 집중할 수 있다.

"나"는 오온(색,수상,행,식)에 따라 연기적으로 행동하는 "나나"이다. 그것은 사실 자유롭지 못하다. 이러한 연기 작용은 끝없이 연결되고, 나의 행위의 결과는 언젠가는 다시 나에게 영향을 준다. 이러한 업의 축적과 그에 따른 보에 따라 나는 집착하고 다시 습관적 형태를 반복한다. 원래 이것이 자연스러운 것이고 흔히 주위에서 보는 보편적인 인간들의 행위이다.

이제, "나나"와 "나"를 분리해 보자. "나나"는 이제까지의 업에 따라 습관적인 행위를 반복하게 되고, "나"라는 아상에 집착하여 "나"를 즐겁게 하기 위한 여러 행동들에 집착한다. 그러한 것들은 때로는 행복감을 가져도 주지만, 그 행복은 길게 가지 못한다. 인간은 기대 이상의 보상이 주어질 때, 도파민이 분비되기 때문이며, 예상된 기쁨은 기쁨으로서의 가치가 소멸되기 시작하고 새로운 집착거리를 찾게 된다.

인생은 본질적으로 고, 괴로움일까... 억만 장자에게도 고민이 존재할까... 당연히 그러하다. 그것은 현재의 나의 모습만 곰곰히 관찰해도 알 수 있다. 나는 언젠가는 사라질 존재이고, 본질적으로 사형수이다. 그러나, 아상에 집착하고 그러한 본질적 허무에 대면하지 않는 많은 이들이 있다. 그러나 가끔씩 찾아오는 그러한 허무의 본질, 부조리를 피하기 위하여 우리는 본능적으로 무의 자리를 무엇인가로.. 유로 덮어본다. 그러나, 그러한 빈자리는 무엇으로 덮는다고 없어지는 자리가 아니기에, 인간들은 계속 그 공허를 채우려고 집착한다.

금강경에서 수보리가 대답한다. "세존이여, 사다함은 한번만 윤회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경지라고들 하지만 실상은 윤회에 구애됨이 없기에 사다함이라고 이름하는 것입니다. 아나함은 윤회를 끊은 경지라고 하지만 실상은 그런것에 집착함이 없기에 아나함이라고 하는 것이옵니다.아라한의 경지에 오른 사람은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지 않는 자를 말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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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행을 해서 선업을 쌓아서 다음 생에는 좀 더 나은 환경에서 시작하겠다는 생각.. 그러한 생각에 따라 선행을 행한다면 그것은 선행인가 아니면 이기심의 발로인가? 칸트는 그것을 조건부 선행 즉 "가언명령"이라고 여기고 그것을 경계하라고 얘기한다. 윤회가 없다면 그러한 선행을 할 동인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대신, 칸트는 좀 더 공리주의적인 명제, 정언 명령 "남이 나에게 했으면 하는 그대로 나도 남에게 행동하라" 를 얘기한다.

마이클 샌델은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트롤리 문제를 얘기하면서 칸트의 의무주의에 따르면 기관사는 도덕적 의무에 따라 1명의 목숨을 구하지만 5명의 목숨은 사라진다. 1명의 배트콩을 자비심으로 풀어준 결과 전우 10명의 목숨이 희생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마주친다. 때로는 선한 행위가 나에게, 내 주변인들에게 나쁜 보로 돌아온다. 선과 악의 경계가 항상 뚜렷한 것은 아니기에, 도덕에 관한 질문은 항상 우리에게 많은 고민을 하게 만든다.

칸트의 정언명령은 두 사람만이 존재할 때, 그 때에는 윤리 행위의 준칙으로 작용할 수 있다. 너와 나가 다른 이가 아님을, 인간은 도구가 아니라 목적임을 가정할 때 그리고 두 사람의 공리주의적 입장에서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그러나, 3인 이상의 이해가 걸린 상황에서 정언 명령적 윤리는 행동 준칙으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바닷가의 작은 보트에서 식량이 떨어져 모두 죽을 운명에 쳐했을 때, 가장 약하고 빨리 죽을 것 같은 한 사람을 희생시켜야 하는 상황이 직면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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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본질성, 무를 똑바로 쳐다보게 될 때, 무는 그 본질이 드러난다. "나나"를 똑바로 바로보면 "나"를 보게 된다. 모든 것이 연기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연기를 제외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에너지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환되는 것임을 이해하면 세상의 동작원리를 이해하는 것이다. 보존의 법칙을 이해하면 물리학의 많은 부분을 이해하게 된다. 연기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것의 무의 본질이다.

부파불교중 상좌부 불교에 대한 반발로서 대중부 불교가 분리된다. 사실 이것은 단순히 불교적 해석의 차이에 의해서만 발생한 것은 아니다. 상공업이 발전함에 따라 물건의 교환은 화폐 혹은 소금의 교환으로 대체되고, 이에 따라 보시를 화폐로 받아야 할 필요성이 대두된다. 사실, 물건을 받으나 물건에 해당하는 화폐를 받으나, 그 둘의 차이가 무엇이겠는가.. 상좌부에서는 상에 집착하여 화폐 보시를 금지한다. 사실 화폐의 위험성, 부의 위험성을 인지하였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대중부에서 보았을 때는 이것은 구태의연한 해석에 지나지 않았다.

대중 불교는 상좌부 불교의 아공법유 해석, 즉 무의 자리에 법을 앉히려는 해석을 거부하고 무의 자리에 무인듯/유인듯 애매모호한 공을 앉히고, 공의 본질을 철학적으로 엄밀하게 분석한다. 그 결과물이 금강경이다. 금강경은 불교 경전 중, 그렇게 길지도 않고 여러여러 얘기들도 없이, 공, 무의 핵심을 직설적으로 설명한다. 사실, 불교의 핵심적인 차원에서, 붓다의 직접적인 설명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얼마나 쉬우냐 하면, 평생 글을 한자도 모르던 혜능 선사가 "응무소주 이생기심" 편을 읽고 그 자리에서 해탈하게 될 정도로 그 핵심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금강경 정신유희분에서 붓다는 자신의 설법이 뗏목과 같음을,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면 더 이상 자신의 말, 토씨 하나하나에 집착하지 말 것을 얘기한다. 또한, 자신의 가르침은 그냥 방편일 뿐, 그것이 절대적인 진리가 될 수 없음을, 모든 법은 이름만의 가명일 뿐임을 얘기한다. 진리에 이르는 수많은 방법이 있을 수 있고, 나의 해탈을 도울 수천명의 부처가 있을 수 있으며, 자신이 얘기한 법과 계율은 깨달음의 경지 이후에는 도리어 불필요한 짐이 될 수도 있음을 얘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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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오냐 점수냐... 한번 깨달으면 끝이냐 아니면 계속 정진을 해야 하느냐... 사람들마다 해석이 판이하다. 선종은 주로 돈오를 교종은 점수를 얘기할 것이다. 공으로서의 마음으로 깨달은 것은,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진정 깨달은 것이냐, 아니면 그냥 가명을 하나 더 더한 것 뿐인가... 쉽지 않다. 이에 대한 작은 해프닝에 관해 과거에 글을 쓴 적이 있다. 
내게는 이 논쟁에 개입한 모든 이들은 최소한 깨닫지 못한 이들임은 명확해 보인다. 깨달은 자에게 이러한 논쟁은 모두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과학 지식으로 무장한 우리가, 반드시 불법의 교리를 따라서 깨달음을 갈구할 이유는 없다. 예전 사람들은 우리가 입자로 이루어져 있고, 그 입자들은 법에 따라 철저히 인과적인 맺음을 한다는 것, 우리가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이 실제로는 외부 자극에 대한 인과적인 반응에 불과하다는 것을 전혀 몰랐겠지만, 오늘날 우리는 붓다가 얘기하려고 한 큰 주제를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이해했다고 말하는 것 조차 가명에 불과하겠지만, 최소한 가명으로서는 이해한다는 얘기이다.

본질적인 차원에서 세상은 에너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에너지는 원래부터 있음과 없음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존재했으며, 에너지는 입자를 만들고, 입자는 다시 에너지로 변화함을, "나" 혹은 자유의지라고 부르는 것이 허상일 수 있음을, "나나"와 "나"는 다를 수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선과 악의 개념은 상대적일 수 있음을, 극단적인 선은 극단적인 악으로 연결될 수 있고, 악행이 때로는 선한 결과로, 선행이 때로는 악한 결과로 연결됨도 예전보다 훨씬 잘 이해하고 있다.

우리는 바다라는 큰 몸통의 한 물거품임을, 그러한 물거품은 다시 말하면 거대한 바다의 한 조각임을, 물방울은 잠깐의 상을 만들면서 다시 바다로 합쳐지고, 바다는 다시 작은 물방을의 모습을 만들어냄을 잘 알고 있으며, 그러한 세상에서 물방울에게 윤회는 없지만, 바다로서는 수많은 윤회를 만들어냄을 보다 잘 인식하고 있다.

해가 떠오를 때의 힘찬 노을과, 해가 저물 대의 희미한 노을은 실제로 같은 현상임을, 우리가 태어나기 전을 슬퍼하지 않는 것처럼, 죽은 후의 나의 모습이 슬픈 것이 아님을 깨닫는 것이 해탈임을,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윤회의 의미에서 벗어나는 것이 해탈임을 깨달으면, 사실 한편으로는 허무함을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을 모르던 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사라질 지 모른다. 그러한 상태가 돈오의 상태가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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