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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파

existence_of_nothing 2023. 1. 31. 16:10
몇달 전 독일 포츠담 바르베리니 미술관에 전시된 인상파 원조인 클로드 모네 (1840-1926)의 유명한 연작 작품 "건초더미"를 환경 운동가들이 으깬 감자로 훼손하는 시위를 한다. 그 작품은 1890년 모네가, 자신이 머물던 곳의 건초 더미를 여러 해에 걸쳐 총 25작의 연작으로 그린 것으로 경매가 1600억원에 이르는 고가의 작품이다. 물론 명화들을 원작 그대로 노출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단단한 유리 내부에 전시하기에 작품 자체는 보존되었지만, 환경 운동가들에게 고가의 작품 보존은 의미가 없다. 그보다 훨씬 절실한 문제들이 많으며, 그러한 문제들에 대한 인간의 무관심에 대해서 분노하기 때문이다.
인상파를 연, "인상:해돋이(impression:sunrise)"이다. 도대체 뭘 그린 것인지, 완성을 하고 제출한 것인지, 그리다 말고 제출한 것인지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었다. 제작 중인 벽지도 이 그림보다는 나을 것이다(루이 르로이), 빗자루로 그린 것이냐, 건강에 해로운 그림이다는 등의 숱한 조롱과 멸시를 당한다. 이 작품은 인상파의 효시 격으로 여겨지지만 모네 보다 한 세대 전의 월리엄 터너(1775-1851)는 그보다 앞서, 태양의 강렬한 빛을 묘사하는 다수의 작품들을 그린다.
화가 하나하나 마다의 개성과 미묘한 차이들이 존재하며, 화풍도 계속 변화하는 것이기에 미술 사조를 인상파, 야수파등으로 대 분류하는 것은 사실 우스운 얘기일 것이다. 모네는, 순간순간 변화하는 빛의 색채감, 자연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자신이 받은 강한 인상으로 변형/이해하여 이를 자신의 화폭에 담는다.

모네의 친구였던 바지유라는 부유한 친구를 든 덕분에, 모네, 르느와르, 바지유는 몰려다니며 인상주의를 개척한다. 바지유는 보불 전쟁에 참전하여 29세라는 어린 나이에 전사하여 운명을 달리한다. 아래는 1870년작 바지유의 아틀리에 이다. 지팡이를 들고 있는 모네, 그림 오른쪽의 바지유와 르느와르와 시슬레 등을 그린 작품이다. 바지유의 그림인데, 자신의 그림은 모네가 대신 그려준다.
1800년 초에 증기기관차가 발명되고 때마침 튜브형 물감과 그림 도구들이 개발되어, 인상파 화가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어떤 장소로던 이동하여 자신의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모네는 기차역 자체를 그려보기로 마음먹고, 깨끗한 옷을 차려입고 웨스턴 철도회사를 방문하여 기차역장에게 자신이 대작을 그릴 예정인데, 노드역과 생 라자르 역 사이에 고민중이라는 뻥을 치고, 역장은 절호의 홍보찬스라고 여겨서 역을 통제하고 열차를 그림 그리기에 가장 적절한 시간에 출발하게 지연시키고 그 시간에 일제히 연기를 뿜게 만든다. 그 결과, "생 라자르 역"이라는 명작이 탄생하고, 모네는 인정받기 시작하고 노년의 부로 연결된다.
60이 되어 백내장으로 고생하고 실명하게 되는 모네는 집 정원을 수련으로 꾸미고, 시시각각 변하는 수련의 모습을 거의 250여점의 작품으로 표현한다. 수련은 일반적인 연잎과 혼동하기 쉬운데, 수면에 닿을듯 말듯 떠 있는 연잎이나 연꽃을 보면, 그것이 수련이라고 생각하면 되고, 일반적인 연잎은 수면의 바깥으로 조금 더 드러나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의 모네 전시관에는 높이 2미터, 총 너비 91 미터의 대작이 타원형으로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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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은 인상파들에게만 아니라, 우리 일반인들에게도 신비의 대상이다. 지금 이순간에도 138억년을 살아남은, 빛 알갱이들이 끊임없이 나에게 내려앉아 사라지고 있다. CMB photon의 밀도는 1cm3당 약 400개라고 하니,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내가 우주 태초의 숨결을 끊임없이 느끼고 있다고 상상하면 그것도 대단한 일이다. 그 빛은 바로 나의 곁에서 탄생했지만, 오랜 시간 공간에 밀려서 나에게서 멀어졌다가 다시 오랜 시간을 달려와서 우리에게 우주의 본질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빛은 전자기파이며, 한번 생성되면 영원히 공간축으로만 여행을 시작하는 존재이다. 빛을 세울 수 있다면, 빛의 성질을 조사할 수 있겠지만 불행히도 빛은 세울 수가 없다. 빛의 속력을 느리게 할 수 있을까.. 그렇다. 빛이 빽빽한 원자들 사이를 지나갈 때, 빛은 속력이 느려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을 통과하면 다시 빛은 빨라진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누가 에너지를 준 것도 아닌데, 빛은 어떻게 가속이 된 것인가.. 여러 해석들이 있지만 완벽한 하나의 해석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들은 여전히 빛을 잘 모른다.

존재의 대부분은 사실 비어 있음을 잘 안다. 그 들 사이에 엄청 틈이 많기에 만약 그 공간들을 제거하면, 지구의 지름은 약 143미터로 압축될 것이다. 태양이 중성자 별로 되면 지름이 약 5km정도로 압축된다. 중성자별의 밀도는 대략 4x10^11kg/1cm3=4억톤/cm3 정도이고, 중력은 지구 중력의 약 1000억배정도로 예상된다. 이 정도의 단단함을 짓누를 것은 블랙홀 밖에 없으며, 중성자들의 반발력으로 형태를 유지한다. 백색왜성의 경우 1톤/cm3정도로 비교적 가볍고 이 정도 수준에서는 원자들의 형태는 유지되지만, 그들 사이의 공간은 0이다.

빛과 전자가 공간을 차지 않는 point particle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원자들 사이가 거의 빈공간이기에 빛은 그대로 통과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양자역학적 상호 작용에 따라 빛은 전자에게 에너지를 빼앗기고, 그렇게 여기된 전자의 상호 작용으로 세상의 모든 연쇄 반응은 시작된다.

태양의 빛 알갱이에서 시작한 움직임은 전자의 에너지궤도를 바깥으로 밀어내면서, 한쪽 방향으로는 식물의 엽록소 안테나에 포착되어 물질의 합성에 관여하며, 그 반대의 방향으로는 합성된 물질을 해체하면서 그 전자는 다시 원래의 위치로 돌아오게 되고, 그렇게 생성된 에너지는 우리 몸을 데우고 다시 전자기파의 형태로 우리 몸에서 태양을 향해서, 온 우주를 향해서 날아간다. 간단히는 빛 알갱이의 작은 여정과 life cycle에 의해서 생명의 많은 연쇄작용들이 지구라는 작은 행성에서 이루어진다.

엽록소에 포착되지 않은 빛, 혹은, 엽록소에서 쓰고 남아서 버린 빛 알갱이들은, 지구를 푸른색, 붉은 색등으로 물들이며, 어느 화가의 망막에 사뿐히 내려 앉게 되고, 그 화가의 망막에 비친 작은 자극들이 뇌의 연쇄 작용을 통해서 세상을 재구성한다. 인간들에 의해서 재 창조된 세상 속에서 인간들은 자신에게 새겨진 뇌의 코드데로 움직이고, 다른 인간들, 동물들에게 영향을 준다. 그러한 작은 물결들은 때로는 인상파들의 캔버스에 아름답고 강렬한 붉은 태양의 모습을 그려내고, 때로는 다른 인간들의 생각과 합성/증폭되어 전쟁의 광기를 일으키고, 존재하지도 않는 마녀 사냥과 각종 야만의 광기를 일으키고, 불필요한 수많은 욕망과 집착을 만들어낸다.

이 모든 것들이 태양에서 시작한 광자 하나하나가 만들어낸 우주의 작은 요동일 뿐임을, 하나의 해프닝일 뿐임을 인간들은 알지 못하거나 안다고 하더라도 실감하지 못한다. 인간들이 우주의 마크로한 움직임, 빅히스토리의 의미보다는, 자기 주변의 미분적인 세상에 몰입할 수 밖에 없는 시공간을 향유하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 주식을 좀 하다 보니, 인간들이 얼마나 마이크로한 것들에 민감한지를 더더욱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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