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인식하는 물질, 존재와 의식... 자연철학적 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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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

중세 철학 단상

existence_of_nothing 2021. 2. 26. 12:09

인간들은 항상 영원히 변하지 않는 본질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살아왔다. 자신이 어떻게 태어난지도 모르고 자신이 언제 죽을 지도 모르는 부조리의 존재 (사실 인간들이 수명을 누리며 병으로 죽기 시작한 것은 아주 최근에야 가능한 일이었다)로서 그냥 사라지는 허무를 인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한 집착은 첨단 과학이 지배하는 현대에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영원한 본질에 대한 증거는 불행히도 확실하지 않다. 이것은 형이상학, 관념의 세상에 태양처럼 빛나지만 물질의 세상에서 그 증거는 미미하다.

 

계몽사상에 의해서 인간의 이성이 해방되어서도 그 본질주의는 해체되지 않는다. 플라톤의 본질주의,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주의는 데카르트가 이성을 해방시켰지만 그 자신도 놓을 수 없었고, 스피노자는 무한양태의 영원한 존재, 자연 혹은 자연의 운행원리를 신으로 묘사한다. 이성만능론자 헤겔에게서는 시대정신으로 나타나고 소쉬르에게는 구조의 형태로 본질은 살아 숨쉰다. 베르그송/퐁티/화이트헤드등 수많은 철학자에게도 본질주의는 살아숨쉰다. 자연철학도 신과 인간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본질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프롤레마이오스(83~168)의 천동설은 1500년 동안 중세 과학을 지배한다.

 

이러한 중세 암흑의 시기에도 본질 타파에 대한 탈주선이 시작되었으니, 코페르니쿠스(1473-1543)는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1543, 1758년 금서해제)”란 책에서 세상의 중심이 지구가 아닐 수 있음을 기록으로 남긴다. 그 무서운 시기에 제대로 출판도 못하고, 세상의 관심도 받지 못하여 초판 400부도 팔리지 않은 채 그냥 세상에 던져졌다. 브루노(1548~1600)는 태양을 우주의 중심으로 세상이 움직인다는 지동설이 아닌, 태양도 무수히 많은 별들 중 하나 뿐이라는 무한 우주론을 주장하였으나 “자비와연민단”이라는 예수회사제들에게 자비롭게(?) 고문당하고 화형에 처해진다.

 

16세기 들어서 자연철학에 질적인 변화가 발생한다.

케플러는 스승(?) 티코 브라헤의 엄청난 천문학적 데이터를 토대로 행성 운행의 규칙성/법칙을 찾아낸다. 그의 이전에 천문학과 점성술은 분리되지 않았고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인, 존재 내부의 의지가 운동의 원인으로 추정되던 시대였다. 케플러는 데이터를 정밀 분석하여, 행성 운항에 관한 규칙성을 찾아낸다. 즉, 행성의 움직임이 우리의 운명을 게시하는 신의 의지가 아니라, 자연 스스로가 정한 규칙에 따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운행한다는 점성술에 대한 이성의 승리를 선언한다. 케플러의 법칙은 다음과 같다.

1.타원 궤도의 법칙 : 행성의 궤도는 타원이다.

2.면적속도일정의 법칙 : 태양과 행성을 잇는 선이 쓸고가는 면적은 일정하다.

3.조화의 법칙: 주기의 제곱은 타원의 긴 반지름의 세제곱

 

케플러는 이러한 규칙성을 찾아냈으나, 왜 행성들의 운동이 그러한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지는 알지 못한다. 이를 위한 수학적 도구와 중력의 존재를 몰랐기 때문이며, 뉴턴은 자신이 개발한 미적분과 3개의 운동법칙으로부터(사실 그것은 1개로 축약할 수도 있다) 토대로 케플러의 법칙을 정확히 유도해낸다.. 케플러의 법칙의 증명은 고등학교 과정, 미분과 물리를 이해하면 유도가 가능하다. 그러나, 쉽지는 않다. 본 포스팅에서는 그 과정을 생략한다. 3개의 법칙의 증명하는데에는 한페이지정도의 수식을 나열해야 한다.

 

행성이 태양을 중심으로 완벽하게 원운동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사실 충격적이었다.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고, 행성들이 그 신하들이라면 어떻게 완벽한 원운동을 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위대한 갈릴레이 조차도 케플러의 제 1법칙이 틀렸을 거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관념과 직관은 때로는 우리를 오도한다. 그러한 잘못된 믿음, 특히 그것이 역사에 대한 믿음이면 그 잘못된 주장을 입증하기 위하여 수많은 생명들을 희생양으로 바쳐야 하기도 한다. 칼 포퍼의 열린 사회의 주적은 바로 그 잘못된 믿음이며, 장미의 이름에서 오컴의 면도날로 유명한 월리엄수사가 가장 경계한 것도 그러한 잘못된 믿음의 폭력성이다. 또한 소크라테스가 경계한 것도 이성의 그러한 오류 가능성이다.

 

갈릴레이(1564~1642)는 이탈리아 몰락귀족 출신의 과학자였다. 반골기질의 아버지는 재정난을 극복의 도구로 그를 의대를 보냈으나 수학으로 전공을 바꾼다. 돈이 없어 대학졸업도 못하지만 계약교수직과 귀족 자제들의 사교육으로 연구를 계속한다. 1609년 우연히 접한 망원경으로 목성의 위성을 발견하고 모든 것이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는 기존 관념을 타파한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데카르트(1596~1650)는 “코기토 에르고 줌”을 외치며 인간 이성의 해방을 선언한다. 갈릴레이는 케플러가 정교하게 만든 망원경을 더욱 개선하고 이를 이용하여 수많은 과학적 발견을 한다.

 

데카르트는 이성을 신에게서 해방시킨, 계몽의 시작을 알리는 종을 울린 위대한 철학자로만 흔히 알고 있지만, 그는 또한 위대한 수학자였다. 개인적으로 사고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수학과 논리학에 대한 공부가 필수라고 생각한다. 흔히들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분들을 종종 본다. 그러한 분들은 어렸을 때, 혹은 자신의 성장과정에서 수학/논리학적인 훈련을 받지 못해서이다. 예전에 회사에서 직원을 배치받으면, 한동안 세미나를 통해서 논리력 향상 훈련을 강하게 시켰다. 그 과정에서 일부 개선은 있지만, 인간들에게 업보의 힘은 끊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함을 느낀다.

 

데카르트의 위대한 수학적 업적은 해석 기하학의 창시와 흔히 말하는 데카르트 좌표계라는 것을 통해서 존재들을 수학적으로 묘사하기 시작한 데 있다. 오늘날에는 우리의 세상이 (x,y,z)라는 3차원 좌표계로 표시됨이 너무나 당연시되지만, 데카르트 이전에는, 여전히 사람들은 불명확한 얘기들,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인 같은 것들을 얘기하였다. 그 좌표계를 보통 cartesian coordinate라고 한다. 여기서 carte가 바로 데카르트이다. 갈릴레이는 데카르트의 좌표계를 발전시켜서 관성좌표계의 개념을 창시한다. 움직이는 사람을 중심으로 본 데카르트 좌표계이다. 모든 사람의 운동은 어떤 점을 원점으로 잡더라도 해석이된다. 이것을 상대성 원리라고 부른다. 상대성 원리의 시작은 갈릴레이이다.

 

갈릴레이는 관성의 법칙을 찾아내고, 물체가 땅에 떨어지는 것은 물체가 지구의 중심과 한몸이 되고 싶은 의지 때문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개소리를 작살내는 피사의 사탑 실험을 한다(정확히는 경사면 실험이었을 것이다). 모든 물체들은 저항이 없을 경우 정확히 같은 시간에 땅에 떨어진다. 서로에게 의지가 있다면 그래서 그 의지데로 운동을 했다고 설명해도 될 것이다. 오컴의 면도날은 그러한 의지가 필요하지 않은 가설이 진실일 가능성이 높음을 얘기한다. 갈릴레이가 사망하던 해에 태어난Isaac Newton(1642~1726)은 “거인의 어깨위에서 남들보다 좀 더 봤을 뿐이다”라고 한다. 그 거인 중 한명은 갈릴레이일 것이다. 갈릴레이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정밀과학의 태두였다는 것이다. 사실 그와 거의 동시대에 살았던 케플러(1571~1630)가 조금 더 원조일 수도 있다.

 

계몽의 흐름… 인간의 역사에서 피할 수 없는 흐름이었을까… 아니면 우연히 기독교가 도입되고, 본질주의가 도입되어 본질의 정체를 찾으려는 서양적인 환경의 특수한 산물이었을까.. 왜 중국은 천년이상 뉴턴 같은 인간이 출현하지 않았고, 우리나라는 한심한 당파싸움이나 하고 있었을까… 헤겔은 세계정신을 얘기하고 세계정신의 흐름과 방향을 얘기한다. 동양의 철학은 원시적이고, 서양의 계몽사상, 이성의 혁명이야 말로 역사의 진보의 흐름이고, 세계정신의 발로라고 주장한다.

 

그 결과, 현대는 첨단 산업이 발전하고, 수천개의 원자폭탄이 어느 순간에든 인류를 원시시대로 돌릴수 있으며, 인간들은 끝없는 노동과 욕망 기계로 변신하고 있다. 조만간 인공지능과 인간노동력보다 저렴한 로봇들이 출현할 것이며, 세상은 더욱 더 자본과 생산수단의 가치가 올라가면서 노동의 가치는 사라질 수도 있다. 이것을 진보라고 불러야 할지, 진정 인류가 원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은 맹렬하게 그러한 세상으로 행해서 달리고 있다. 칼 포퍼는 역사법칙주의를 강하게 부정했지만, 세상은 정해진 끝, 종말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다는 불길한 느낌은 나만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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