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인식하는 물질, 존재와 의식... 자연철학적 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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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

후설의 현상학

existence_of_nothing 2021. 2. 27. 11:25

우리가 달을 보지 않는다고 해서 그곳에 달이 존재하지 않는가?    - Einstein

 

<Edmund Husserl, 1859~1938>

 

Cogito ergo sum ....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이며 근대 철학의 시작을 알리는 말이다.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주어진 세계의 실재성에 대한 고민인 동시에 생각하는 주체를 전면에 떠올린 것이다. 내 눈앞에 보이는 세상은 나의 밖에 실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나의 머리속 관념에만 존재하는가? 

 

이것은 철학의 중요한 문제이면서 해결이 쉽지 않은 문제 중 하나이다. 실재한다고 얘기해도 말이되고, 관념속에만 있다고 해도 말이 되기 때문이다. 사실 어떤 경우이던 우리는 현상계에 살아야 하고 현상계에서 생로병사를 경험하기에 그다지 와닿지도 않는 질문이기도 하다. 세상이 허상이던, 실재이던 "나"가 고통을 느낀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나에 대해서 인식 혹은 의심하는 주체, 자아라고 부르는 그 무엇은 존재하는가? 데카르트는 여기에서 성급한 확신을 내린다. 나에 대해서 생각하고 의심하는 무엇인가가 있다. 그것이 나이다. 과연 그것은 나인가, 아니면 나라고 생각하도록 피어난 생각이 빚어낸 또다른 생각인가?

 

모든 의식은 지향점을 가진다. 눈 앞에 있는 콜라는 내가 그것을 의식하지 않으면 그냥 배경에 불과하고 의미가 없다. 내가 목이 말라서 콜라를 지향하는 순간, 그것은 시원한 음료라는 본질로서 내게 대가온다. 이것을 후설은 의식의 지향성이라고 한다. 지향성 개념 자체는 중세 시대부터 내려온 것이며 후설 이전에 브레타노의 심리학에서 먼저 주장한 개념이다.

 

우리는 항상 생각을 할 때 무엇인가를 떠올린다. 그것은 책상이나 의자처럼 모상이 존재할 수도 있고, 수학적 기호와 같이 모상이 없는 추상적 대상일 수도 있다. 책상이라는 질료가 우리 눈 앞에 주어지면 먼저 감각기관이 그것을 인식한다. 대상을 의식이 지향하면 그것에 우리는 의미를 해석하고 재 인식을 한다. 이것을 후설은 노에마(책상)을 노에시스(인식)한다고 얘기한다. 왜 그냥 대상을 인식한다고 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노에마에는 모상이 존재할 수 도 있고, 정 삼각형 같은 자연에 모상이 존재하지 않는 대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어떤 대상을 떠 올릴때 관련된 생각이 연결되어 떠오른다. 이것은 인간이 기억을 하는 원리가 연상 작용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며 기억도 아날로그 형태의 연상 메모리 형태로 저장되기 때문이다. 같은 의자를 떠올리더라도 예술가는 작품을, 건축가는 받침대를, 장사치는 경제성을 떠올린다. 즉 어떤 대상을 그 대상으로 자연스럽게 인식하게 만드는 그 무엇이 있고 그것에 따라 대상을 인식하는 것을 자연주의적 태도라고 부른다.

 

2+2=4라는 것이 사실이라는 것은 우리가 수학적 공리 체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때 절대적 진리가 된다. 이러한 자연주의적 접근법이 있기 때문에 과학적/수학적 진리는 명증성과 엄밀함을 지닌다고 얘기한다. 뉴턴의 성공 이후, 실증주의만이 엄밀학으로서 가치가 있다고 얘기하는 것에 대해 후설은 반감을 가진다. 그것은 수학과 과학이라는 자연주의를 받아들이는 경우에만 진실일 뿐이라는 얘기이다.

 

주어진 사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태도는 사물에 대해 선입견을 가지고 판단하게 하고 때로는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게 한다. 의자에 대해서 물리화학적으로 아무리 얘기를 해 봐야, 조각가에게는 그것은 자신이 추구하는 본질과 전혀 관련성이 없는 뜬구름잡는 얘기일 뿐이다.

 

후설은 노에마와 노에시스 사이의 관계, 어떻게 세상이, 대상이 우리에게 인식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질문한다. 그리고, 우리가 인식하는 것이 실제로 그 대상의 존재방식 그대로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지에 대해서 질문한다. 후설은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취한 방법론은 현상학적 환원 (에포케)이라고 불리는 방법이다.

 

현상학자들이 얘기하는 환원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책상의 한 단면만을 인간들은 보지만, 인간들은 그 옆면과 뒷면도 상상하면서 책상이 무엇인지를 파악한다. 책상이 뒤집혀 있어도 우리는 다시 그것을 뒤집어 그것을 책상으로 인식한다. 이렇게 주어진 형상으로 부터 그 형상의 본질을 종합적으로 인식하는 과정을 형상적 환원이라고 얘기한다. 

 

현상학적 환원은  대상과 마주하는 의식에 집중하고, 세상 모든 대상에 대한 판단을 괄호화 한다. 흔히 사과에서 자연스럽게 떠 오르는 인식은 빨간 과일이다. 이제 "사과는 (빨갛다)"라고 괄호를 친다. 그리고 다양한 사과들을 다시 판단을 중지한 채로 바라보면 푸른 사과도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 이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어떠한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 실재로는 대상이 인식 주관과 관계맺음 과정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세상 모든 것을 괄호 치면 무엇이 남을까... 후설은 이 때 초월론적 자아, 순수 자아가 남는다고 얘기한다. 어떻게 순수자아는 대상과 표상을 관계맺음 하는가? 이것은 후설 이전에 칸트가 순수 이성 비판에서 던진 질문이기도 하다. "우리 속에서 표상이라 불리는 것이 대상과 관계 맺는 것은 무엇에 근거하는가?" 칸트에게 대상 자체, 물자체는 우리의 인식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후설에게 인식대상이 아닌 것은 의미가 없으며 따라서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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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일이 없어도 뇌는 무엇인가를 지향한다. 전문 용어로 망상이라고 한다. 예전에 중국의 법성사에서 두 스님이 "바람이 움직이는가", "깃발이 움직이는가"라고 한창 밥잘먹고 쓸데없는 논쟁을 하고 있을때 혜능이 "움직이는 것은 네 마음이다"하고 한마디 하고 대히트를 치면서 불교의 역사를 바꾼다. 과연 마음이 움직이는가, 깃발이 움직이는가?

 

우리가 죽었을때 어떻게, 어디에 우리가 한 일, 우리의 karma가 저장되는가? 상식적으로 알듯이 정보는 어딘가에 저장이 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의 죽음으로 몸에 저장된 모든 기억들은 사라지고 그와 함께 나도 사라진다. 그러면 우리의 업식은 어디에 저장되는가? 초기 불교에서 나를 이루는 것은 없다, 내가 없는데 업식이 무슨 의미이고, 선하게 사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세상은 공, 공은 세상이다라고 얘기를 하면서 부터 불거져 나온 해결해야 할 과제 중 하나이다.

 

불교의 한 학파인 유식파에서는 이 세상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며 이, 후,비, 설, 신의 오식으로 세상과 마음은 관계를 맺고 이것을 제 6식인 의식이 인식을 하고 말라식이라는 제 7식이 나를 중심으로 이 세상을 해석하고 모든 번뇌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업식은 제 8식인 아뢰야식에 정보로서 저장되어 다음 생에서 환생할때에 영향을 준다. 아뢰야식은 우리의 평범한 의식으로는 눈치를 챌 수 없으며 깊은 수련 단계를 거쳐서 현상학적 환원을 거쳐서 인식할 수 있는 실체이다.

 

서양 철학에서도 제 6식을 오감이라고 하고 제 7식은 이성이라고 하며 제 8식은 일종의 절대정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물론 그 연결은 Hierarchy에 따라 나눈 것이지 그들 사이에 1:1의 관계는 전혀 성립하지 않는다. 절대정신의 자기 실현에 따라 역사는 이루어지고 절대정신에서 자아의 역할은 크지 않다고 헤겔은 주장한다.

 

서양의 현상학과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은 동양의 유식 사상과 공사상에 비견할 수 있는 철학이다. 세상이 실제로 존재하느냐, 우리의 마음이 만들어낸 상이냐는 사실 과학적으로도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둘 다 말이 되기 때문이다. 과학에서는 마음이 만든 상으로서의 우주를 simulation universe 이론이라고 한다. 즉, 이 우주는 어떠한 초월 존재의 거대한 quantum simulator이며, 이 안에서 아주 많은 계산이 병렬적으로 이루어진다. 그 계산의 궁극적인 목적은 모르겠지만, 생명과 지능의 발현과 그 한계를 검증하는 것도 큰 목적 중 하나일 것이다. 실제로, 우리도 양자 컴퓨터를 통해서 기존 컴퓨터로 계산하기 힘든 물리 현상을 재현하려고 한다.

 

현상학을 통해서 후설이 주장하는 바는 실존이던 아니던, 우리는 우리의 의식이 지향한 존재만을 해석할 수 있을 뿐이며, 우리의 의식밖에 있는 존재는 우리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것을 너무 좁게 해석하면 후설이 너무 유아론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고 공격할 수 있다. 우리가 달을 보지 않으면 달은 존재하지 않는가? 후설에게 중요한 것은 일단 인식 체계에 편입된 대상과 인식 사이의 상호 작용에 관한 것이며 어떻게 지향된 대상을 순수하게 파악하는가라는 문제에 관한 것이며 지향의 대상을 노에마, 지향하는 동작을 노에시스라고 명명하며 노에마를 노에시스 하는 의식의 동작 이해에 촛점을 맞춘다.

 

현상학은 서양 철학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면서 동시에 과연 현상학의 연구란 것이 가능한 것인지, 근본적인 취지에서 현상학적 환원(에포케)이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서 의문을 던진다. 경험은 우리에게 의식적인 기억 뿐 아니라, 무의식적인 잠재의식을 형성하게 하는데, 일단 의식의 통제도 어려운데 무의식마저 통제한 상태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현상학적 환원이 어떻게 가능한지, 그리고 실제로 그 상태가 어떻게 환원된 상태인지를 검증하는지에 관해서 후설은 얘기하지 않는다. 다만, 환원된 상태에서 현상은 직관으로 단박에(통각으로, 돈오로) 인식할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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