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인식하는 물질, 존재와 의식... 자연철학적 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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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경 - 불교를 철학하다

existence_of_nothing 2021. 3. 29. 08:42

 

저의 주 관심사는 과학(물화지생뇌) 분야이다. 그 외는 철학 분야만 약간 관심이 있을 뿐이다. 대부분의 밴친분들처럼 40대 후반까지 앞만 보고 살아오다가 몇년 전부터 존재와 의식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왜 무엇인가가 존재하고, 어떻게 물질로 구성된 무엇이 살고자 하는 의지를,  "나"라는 의식을 가지기 시작하였을까.. 내가 살 수 있는 날이 그렇게 많이 남은 것 같지는 않아서 생업이외에는 그러한 본질적인 질문에 관련된 부분을 깊이 공부하고 있다. 

 

이진경교수의 "불교를 철학하다"는 불교에 대한 소개서로 읽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깔끔하게 잘 전달되는 책도 아니다. 그것보다는 이진경이라는 철학자, 나와 다른 한 인간이 생각하는 불교에 대해서 살짝 엿보기 하고 싶은 분들은 일독을 해도 괜찮을 것이다. 이 책도 300페이지 정도로 그다지 양이 많지는 않고, 앞에서 부터 순서데로 읽을 필요도 없으니 가볍게 읽으면 될 것이다.

 

이 책을 통하여 이진경 교수는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 존재에 대한 철저한 사유를 바탕으로 한 철학체계임을 얘기하고자 한다. 그래서 종교적인 해석은 상당히 배제하고 글을 전개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중요한 내용은 무엇일까? 아마 세 단어로 요약하자면 개인적으로는 제행무상, 무아, 연기가 아닐까 생각하고 이진경 교수의 의견도 비슷한 듯하다. 이 책의 많은 내용은 제행무상과 연기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담고 있다. 

 

샤르트르가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얘기했다. 인간들은 세상에 투척된 실존적 상황에서 자신만의 가치 혹은 본질을 그려야 한다. 고정된 실체로서의 "나"는 실재하지 않는다. 바이올린은 연주자에게는 악기이지만, 나무꾼에게는 불쑤시개에 불과하다. 바이올린 자체가 가지고 있는 본질, 본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과의 상호작용과 연기에 따라서 정보가 형성되고 정보는 생명을 만들고 생명은 의식을 만들고 그 의식은 "나"라는 허상(아상)을 만들 뿐이다. 이진경은 "카게무사(그림자무사)"를 예로 들어, 고정된 본질로서의 "나"는 없다는 무아론을 설명한다.

 

자유의지란 존재하는가... 철학자들이 오랫동안 고민한 주제이다. 사실 철학자들이 그 대답을 찾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것은 형이상학적 주제라기 보다는 지극히 과학적인 주제이며 현재 뇌/신경 과학자들이 열심히 그 대답을 찾고 있다 (벤야민 리벳외 다수 실험 결과 참조). 그러나 다시 결과 해석에 대한 다양한 견해 차로 궁극적인 대답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돌고 돌아 다시 "자유의지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주제로 귀착된다.

 

스피노자는 자유의지란 없다고 얘기한다. 자유의지가 없다면 "나"는 세상에서 주어지는 자극에 루틴하게 반응하는 자동기계인가? 며칠전 글에서도 심리학자 조너선하이트가 정치적 양극화에 대해서 얘기한 적이 있다. 뇌는 바른 판단을 하는 기계가 아니라 세상을 자신이 편안한 방식으로 합리화하는 기계 (도파민 보상 시스템)이기 때문에, 인간들은 진실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편안하게 느끼는 진실을 믿고, 그것에 반하는 것에 대해서는 불편함을 느낀다. 외계인 손 증후군을 구글링하시면 뇌가 어떤 일을 하는 존재인지 의미를 좀 더 잘 아시게 될 것이다.

 

인간들은 경험(업)에 따라 형성된 뇌 회로가 편리하게 느끼는 방식으로 기계적인 사고를 한다. 내가 자유롭다고 느낀다고 내가 진정 자유로운 것은 아니고  철학을 공부하는 주된 이유는 진정한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 일 것이다. 이진경은 책에서 챗봇 테이를 예로 들면서 입력된 정보에 따라 인공지능조차도 편향된 시각을 가질수 있음을 설명한다. 이러한 경험에 따라 많은 인간들은 관성적 사고를 한다. 좋은 업은 좋은 업을 낳고 나쁜 업은 나쁜 업을 낳는다 (주: 좋음과 선함은 같지 않다: 니체의 도덕의 계보 혹은 스피노자의 에티카 참조).

 

비록 윤회 개념 자체는 힌두교에서 오고, 붓다가 윤회를 직접적으로 언급한 것 같지도 않으며 그 의도 자체도 그렇게 순수하지는 않지만 불교와 윤회를 분리해서 생각하기는 어렵다. 불교의 이해에서 "식"에 대한 해석과 "윤회"에 대한 입장 차이는 여러가지 혼동을 만든다. 이진경은 유식론적인 "식"에 대한 해석은 전혀 소개하지 않는다. 생전의 업이 저장되는 개념으로서의 식, 현생의 의식과 과거의 의식이 직접적으로 연기된 개념의 윤회는 사실, 철학적으로나 과학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그 부분은 신앙 혹은 믿음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완벽한 대칭의 우주에서 자발적인 대칭 파괴에 따라, 우연적인(혹은 역동적인) 불균형에 따라 물질이 생긴다.. 물질은 시공간을 흐르면서 서로 연기하여 비슷한 지점을 지나가며 별을 형성한다. 별은 조건이 되면 에너지의 흐름에 따라 생명을 탄생시키고, 생명은 다양성이 진행함에 따라 지능과 의식을 탄생시킨다... 우주의 크기가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에도 우주의 많은 곳에서 의식은 탄생한다. 

 

현 생의 의식은 사라지지만 다음에 눈을 뜨면 다른 의식을 살고 있을 것이다. 우주의 시간과 크기가 거의 무한이기에 이것은 영원회귀에 가깝게 반복할 것이다. 해탈하여 윤회를 탈피하고자 하겠지만, 그것은 적어도 과학적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이 부분에서 "식" 특히 아뢰야식(업의 저장식)에 대한 해석이 많이 갈린다. "깃발은 스스로 움직이는가, 바람에 따라 움직이는가, 마음이 움직이는가" 마음이 움직인다고 생각하면 유식의 입장일 것이고 유식의 입장에서는 윤회의 탈피가 가능할 수도 있다.

 

이진경은 그러한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영원회귀를 벗어날 수는 없으며 단지, 그것을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그 자연스러움을 받아들이는 해탈은 가능하다. 니체의 영원회귀 해석이 다양할 것이다. Triangle이라는 영화에서는 어떤 행동을 해도 원래 시작점으로 돌아오는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를 보게 된다. 책에서 소개하는 들뢰즈는 차이나는 것의 영원회귀를 주장한다. 해탈한 사람은 인과 관계에서 초연하고 영원회귀를 탈피하는 것이냐? 이진경은 "불락인과"와 "불매인과"의 차이를 예로들어 진위를 얘기한다. 달마대사는 인과를 초월했느냐라는 질문에 불락인과라 답한 이는 500년동안 여우삶을 살고, 1자 차이인 불매인과로 대답한 여우는 해탈한다. 그 한 글자의 차이는 무엇일까..

 

무주상보시.. 연민에 의한 자비가 아니라 자비가 자비임을 모르고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 왼쪽 뺨을 맞으면 오른쪽 뺨을 내밀라.. 이것이 가능하려면 감정의 개입이 없어야 한다. 감정은 파충류의 뇌인 "변연계"에서 처리하고 진화단계의 끝인 "전두엽"은 이를 억제한다. 때리는 사람은 좋을 것이다. 왼뺨을 때리니, 알아서 오른뺨을 내주니.. 가진자에게 딱 좋은 논리가 아닐까? 이진경도 이를 인정한다. 그러나, 자비의 의미를 상대편에게 좋은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존재 전체에 좋은 행위를 하는 것이라고 확장하면 투쟁도 자비가 될 수 있음을, 불의에 정의롭게 맞서는 것이 자비가 될 수 있음을, 대승적 논리를 주장한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12연기를 나름대로 해석하여 설명한다. 12연기는 붓다가 연기 과정을 12개의 단계 (무명, 행, 식, 명색, 육입,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로 구분하여 설명한 것이다. 그 중 앞의 4단계의 이해와 해석이 쉽지 않으며 이에 대해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보통 깨우치지 않은 전생에서 행한 업이 식으로 저장되어 형성된 세상(명색)에서 6개의 센서로 처리한 정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인고가 생기고 죽는다는 형태로 설명한다. 그러나 이진경은 식이 저장되는 윤회를 인정하지 않기에, 후생유전과 생명(미생물 포함)의 본질적인 정보처리라는 관점에서 설명한다. 조금 억지스러운 주장으로 보일 것이지만 이런 해석도 가능하겠구나라고 인정하고 읽으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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