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인식하는 물질, 존재와 의식... 자연철학적 접근
계몽의 변증법 -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본문
계몽의 변증법 - 호르크하이머(1895~1973) & 아도르노(1903~1969)
계몽주의는 18세기부터 시작하여 유럽 전체를 휩쓴 철학사조이다. 신이 지배하던 중세 암흑의 시대에 대항하여 인간(이성)을 신의 자리에, 비합리적인 모든 전통을 타파하고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것들로 대체하자는 사조이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을 통하여 계몽주의는 귀족/평민의 신분구조를 타파하고, 인간의 자유로운 권리, 자연권을 도입한다. 이러한 계몽주의의 파급에는 물론, 그 하부 구조인 경제 구조의 변화가 선행했다. 즉, 산업구조의 개편에 따라 토지의 생산성보다 상업/공업 분야의 노동생산성이 증가하고 이에 따라 부유한 평민, 부르조아 계급이 생겨나고 이들의 주도로 계몽주의는 널리 파급된다.
데카르트는 1637년 방법서설에서 ㅡ다시 신으로 회귀하지만ㅡ 철학의 자리에 인간을 앉힌다. 스피노자는 인격적인 신의 자리를 무가치적, 무목적적인 자연으로 대체하는 에티카를 1675년에 완성한다. 베이컨, 존 로크, 버클리, 흄으로 대변되는 경험주의가 이어서 영국에서 태동하고, 대륙에서는 스피노자, 라이프니츠의 합리론을 얘기한다.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이 1781년에 간행되고, 헤겔/피히테/쉴링의 독일관념론이 뒤이어 등장한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1807년에 발표된다.
1589년에 갈릴레이는 피사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래된 목적인을 타파하는 낙하 실험을 한다. 1609년에 케플러가 행성 운행의 3법칙을 발견하고, 종래의 미신적인 천문학을 과학으로 승격시킨다. 1665년 뉴턴은 중력의 법칙을 발견하고 종래의 관측 위주의 과학을 현상의 저변에 있는 수학적 규칙을 찾는 학문으로 승격시킨다. 그 이후 과학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라브와지에는 질량보존의 법칙으로 불의 신비성을 해체하고 돌턴은 인간의 유물론적 본질인 원자의 발견으로 정신을, 맥스웰은 빛의 신비를 해체한다. 과학은 승승장구하고, 과학적 방법론은 계몽 사상과 궤도를 같이하고, 계몽=과학이라는 등식을 만든다.
인간은 계몽주의가 약속한 달콤한 약속,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구조를 해체하고 인간 해방, 존엄성의 회복, 자유를 가져다 주었는가? 라고 물어보면, 당연히 대답은 글쎄요이다. 계몽주의는 계속 제 갈길을 갔지만, 그 사이에 인류는 두번의 광기서린 전쟁을 겪었고, 인간이 다른 인간 6백만명을 문명의 이름으로 학살하는 경험을 하였다. 차라리, 문명이 발달하지 않았다면, 학살의 도구가 개발되지 않았다면, 그냥 조용히 왕과 귀족의 통치아래 있었다면 최소한 그정도의 학살극은 보지 않아도 되었을 수도 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본인이 무엇을 하는지도 잘 모르는 한 조종사의 버튼누름은 수십만명의 인명을 한 순간에 증발시키고, 후유증으로 수많은 고통을 낳았다.
이제, 질문을 시작한다. 이것은 계몽주의와 과학의 발달이 가져온 본질적인 결과인가, 아니면 히틀러나 뭇솔리니, 스탈린같은 일부 성격파탄자, 정신병자인 개인의 광기어린 행동의 결과인가? 이성은 스스로의 방향성을 제대로 설정할 능력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이성은 본질적, 구조적으로 이기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퇴행성을 보일수 밖에 없는 것인가?
아도르노의 대답은 후자이다. 계몽은 본질적으로 어둠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 사고 전개 과정이 동일성의 원리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동일성의 원리란, 세상을 자신과 자신이외라는 이분법적인 구도로 분리하고 자신을 보존하기 위하여 자신이외의 모든 것들을 동일화시켜서 그것들을 지배하려는 이성 자체의 사고원리를 말한다. 그것은 먼저 자연과 인간이라는 이분법적인 구도를 만들고, 자연의 지배를 극복하려는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려는 변증법적인 반의 동작을 수행한다.
그렇게 자연을 지배한 인간은 다시 타인과 나, 내민족과 타민족, 우리나라와 다른나라라는 이분법적인 구도를 만들고, 다시 다양한 개성과 역사를 가진 타인을 하나의 대상으로 동일시하고 지배의 원리가 동작한다. 이것은, 인간 이성의 동작원리이기에 계몽 사상에 의해서 인간 이성이 더 고취되면 될 수록 그 파괴적인 성향이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렇게 지배의 도구로 발현되는 이성의 모습을 아도르노는 "도구적 이성"이라고 부른다. 자본 주의 사회에서, 여러 다양한 가치와 존재 모습을 상품화하고 "가격"이라는 동일한 잣대로 획일화한다는 점을 연상하면 될 것이다.
계몽주의는 인간의 자유를 추구하는, 억압으로 부터 해방시키려는 요소를 가지고 있지만, 정의 요소를 가지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그 안에는 다시 인간을 지배의 대상으로 객체화시키는 반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반의 요소는 정과 모순적인 상응관계에 있고 정반합의 형태로 모습을 드러내기에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이것을 계몽의 변증법이라고 부른다. 신화의 탈피를 위해서 시작한 계몽은 다시 신화의 세계로 되돌아갔다고 주장한다.
이성이 본질적으로 지배구조로 변질될 수 밖에 없다면, 이성을 믿을 수 없다면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하나? 이것 외에도 아도르노에 대한 다양한 비판들이 있다. 이공계의 관점으로 볼 때 철학자들은 과학자들과 다르게 논리적 전개에 무수한 비약들이 존재한다. 그는 이성은 본질적으로 도구적이라는 그의 가정적인 결론을 전제한 상태로, 그러한 도구적 이성의 한계점, 전개 방향을 얘기한다. 그러나 이성이 본질적으로 지배적이라는 그의 논증은 사실 명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성의 대안에 대한 선택을 어렵게 만든다. 그 대안 조차도 이성의 결과물이 아닌가?
아드로노의 대안은 이렇다. 이성은 본질적으로 자기보존 욕구가 강하며 동일성의 원리에 따른 지배적 본성을 내재하고 있다. 이는 다른 주체인 타자를 객체화하고 지배의 대상으로 포섭한다. 이러한 이성의 원리를 직시하고, 이성을 극복하여 타자와의 공감과 타자의 주체성,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 포스터 모더니즘적인 해법을 얘기한다. 이성의 작용이 이러한 것을 방해하기 때문에, 그는 감성과 무의식의 발현인 예술, 미학으로 방향을 돌린다.
예술은 자기보존적인 이성을 극복하려는 (융의 말에 따르면 자아의 그림자에 해당, 혹은 라캉의 환상 가로지르기, 쥬이상스...) 기능을 가지고 있기에 이를 활용하여 이성의 광기를 잠재우자는 것이다. 아도르노가 말한 예술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예술은 아닐 것이다. 현대의 대중적인 예술은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상품화/대중화되어 있기에 도움보다는 도리어 해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도르노에게 예술은 순수한 미의 추구이다. 사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얘긴데, 요즘 순수 미술은 사망 단계처럼 보인다. 지원하는 이도 별로 없고, 몇몇 소수를 제외하고는 밥벌어먹고 살기 어렵다.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하버마스는 실증주의, 유물론, 과학만능주의에 반대하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대표주자들이다. 나중에 마르쿠제, 에리히 프롬, 뢰벤탈등이 합류한다. 그들의 사상에 기반하여 1968년에 프랑스와 일본등 대학가에서 좌파 학생 운동이 시작된다 (적군파라고 들어봤을 것이다). 처음에는 그들의 행동을 지지하던 아도르노와 하버마스는 화염병이 난무하는 폭력적인 사태로 번지자, 그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공교롭게도 아도르노는 자신의 이론을 기반으로 행동하던 학생들과의 논쟁 도중 열받아서 쓰러져 사망한다 (또한 하버마스는 그 학생들과의 논쟁 결과 교수자리를 그만두고 야인 생활을 시작한다). 아이러니한 변증법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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