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인식하는 물질, 존재와 의식... 자연철학적 접근

하버마스 본문

철학사

하버마스

existence_of_nothing 2021. 4. 17. 10:47

 

의사소통행위이론     -하버마스-

 

계몽을 이끈 이성은 인간의 해방을 외치지만, 반대로 자연을 지배함으로 한계를 극복한 이성은 다시 인간을 객체화하고 지배하는 방향으로 동작한다. 이것은 이성의 자기보존 메커니즘으로 인한 동일화, 즉 이성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이것이 프랑크푸르트 학파 1세대인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진단한 계몽의 변증법이다.

 

이전 포스팅에서 얘기했듯이, 이로 인해 이성과 주체는 현대 사회의 병리적 현상의 주범으로 낙인찍히고 이성과 규범의 해체를 통한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가던지, 아니면 이런 부조리를 인증하고 온몸으로 반항하는 실존주의를 가던지 해야 한다. 이런 암울한 선택지외에 보다 건설적인 대안은 없는가? 과연 이성은 본질적으로 퇴행적인가? 에서 하버마스의 고민은 시작된다.

 

위르겐 하버마스(1929-현재)는 현존 독일 철학/사회/심리학자이다. 한국에서는 송두율 (간첩사건으로 기소되어 대법원 무죄 판결)의 박사학위 지도교수로 좌파의 이미지가 강하나, 그는 자본주의/민주주의의 옹호자이다. 실제로 68 학생운동 당시 학생들의 폭력 시위를 “좌파 파시즘”이라고 반대하다가 대학에서 쫓겨난 후에, 저서 “의사소통 행위 이론”이 성공을 거두면서  다시 대학에 복귀한다. 은사인 가다머와 현상학 논쟁, 포퍼와 실증주의 논쟁 등 다양한 분야의 주제에 대해서 많은 논쟁을 벌인 것으로 유명하다. 오늘날 시민사회라는 공론의 장을 만드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대표적인 저작은 “인식과 관심(1968)”, “의사소통행위 이론(1981)”이다.

 

칸트에게 이성은 선험적 인식 구조가 경험을 토대로 세상을 재구성한다. 헤겔은 이러한 경험 초월적인 선험적 구조가 실제로는 개인/사회적 역사구조에 의해 생성되었음을 지적했으나 조금 더 나가서, 본질주의의 향수를 버리지 못하고, 절대정신의 자기실현까지 얘기한다. 마르크스는 생산수단과 노동을 통해서 자기를 실현하는 노동 주체로서 이성을 얘기한다. 그들은 모두 계몽과 위대한 이성의 승리를 예측했으나, 불행히도 도구적 이성은 파시즘, 나찌즘, 공산주의 독재의 형태로 퇴행적 형태를 보여주었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이성의 동일화 작용과 지배원리로서의 퇴행성을 얘기하지만, 하버마스에게 이성은 목적 합리론적 행위 외에도 의사 소통 행위를 한다. 전자의 경우, 동일화를 통한 타인의 객체화/지배화를 하고, 이러한 지배화의 목적을 위한 도구로 이성이 변질된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타인을 나와 동등한 하나의 주체로 간주하고, 타인의 관점에서 나를 반성해서 바라볼 수 있게 하고 타인을 지배하기 보다는 타인과 타협을 하면서 공존을 모색하게 된다. 사실, 이것은 도구화된 이성을 주장하는 경우, 비판의 대상인 이성이 스스로를 교정해야 한다는 모순이 발생하거나 혹은 이성 기반의 주체를 버려야 한다는 딜레마를 빠진 프랑크푸르트 학파 1세대 이론을 구하기 위한 고육지책에 가깝다.

 

그러면 의사 소통 행위가 이성의 본질적인 요소인가? 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그는 베버/루카치/뒤르케임/파슨스/마르크스등 여러 철학/사회학자들을 소환/비판한다. 마르크스는 생산력과 생산관계라는 개념으로 인간 소외를 설명한다. 생산력은 기계나 노동력 등 생존을 위해서 자연을 변형하여 무엇인가를 만드는 수단을 말하고, 생산 관계는 생산력의 소유관계에 관한 것이다. 생산성이 향상되면서 교환가치와 사용가치의 격차가 벌어지면서 발생하는 잉여가치를 소유/독점하기 위한 생산관계의 왜곡과 이를 은폐하기 위한 이데올로기가 도입되고 노동력만을 소유한 노동자의 소외가 발생한다는 개념이다.

 

하버마스는 헤겔의 개념을 차용하여 노동과 상호작용을 분리하는 작업을 시작한다. 노동이 주체가 객체를 자신의 목적에 맞게 지배하는 과정이라면, 상호작용은 주체와 주체사이의 타협과 조정행위로 그 둘은 서로 관련이 있지만 어느 하나로 환원될 수 없는 대상으로 본 것이다. 헤겔과 마르크스 모두 노동과 상호작용을 얘기했지만, 헤겔은 절대정신으로, 마르크스는 노동의 자체 운동으로 노동관계를 노동의 결과로 환원하는 오류를 범했다는 것이다. 이를 확장하여 그는 대표 저서인 “의사소통행위이론”에서 인간의 행위를 도구적/전략적/의사소통행위로 분류한다. 즉, 의사소통행위는 이성의 고유 기능이라는 주장이다. 이렇게 어렵게 이성의 순기능(합리적인 의사 소통 기능)을 살려서 , 이성을 통하여 이성을 구제할 길을 연 것이다.

 

하버마스는 사회를 체계와 생활세계로 구성된다고 본다. 체계는 경제/행정과 같은 기능적/공적 영역이고, 생활세계는 문화/규범/인성 등의 사적영역이다. 그 둘은 서로가 서로에 영향을 주면서 자립적 질서를 유지한다. 즉, 사회 구성원들 간의 원활한 의사소통과 조정행위로 규범적,문화적 질서를 만들고 이를 기반으로 경제/행정적 체계가 형성된다. 그러나, 산업사회가 복잡해짐에 따라 도리어 체계의 명령이 생활 세계에 침투하는 생활세계 식민지화가 진행된다. 권력/이데올로기에 의한 담론의 제한, 언론의 통제등을 생각하면 된다. 생활세계는 후설이 얘기한 개념으로 “과학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원초적인, 경험되지만 언어로 기술되기 어려운 영역”이다. 과학에 잠식당한 철학을 살리기 위한 방편적인 용어에 가깝다.

 

이성적 방법의 가능성을 회복한 하버마스는 도구적 이성을 견제하기 위한 의사소통적 이성행위를 강조한다. 의사소통 행위는, 타인을 주체로 바라보고 타인의 관점에서 나를 반성하며, 따라서 나의 주장만큼 타인의 주장의 합리성을 인정하고, 체계 이데올로기 등의 영향으로 인한 내 생각의 오류 가능성을 생각하고 나와 상대방 입장의 상보성에 입각해서 논의와 합의를 하자는 것이다. 두 사람만 모여도 개 난리를 치는 작금의 상황에서, 다수의 화자들 간의 이러한 이상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하리라는 기대는 하버마스의 순진함, 이상주의적 모습을 드러낸다.

 

하버마스는 90세의 나이에 현존 사회학자이며, 사회개혁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고 한국 사회학 논쟁에서 중심을 차지하는 인물 중 하나이다. 하버마스는 자본주의 사회의 효율성, 민주주의의 절차적 합리성을 인정하면서도 도구적 이성에 따라 물신화,양극화,미국에 의한 일방적 규범화 현상등을 비판한다. 그는 이러한 도구적 이성, 목적 합리주의적인 효율성 만능을 견제하기 위하여 체계 외의 공론의 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예를 들면, 싸이버 공간에서의 다양한 정치적 논의와 의사 소통 행위, 촛불 집회와 같은 시민의 자발적인 정치/토론 문화의 활성화를 주장한다. 그러나, 댓글조작/가짜뉴스가 범람하고, 목소리 큰 소수가 마치 다수의 의사를 대변하는 것처럼 변질된 현대 공론장이 과연 하버마스가 목표로 하는 도구적 이성의 좋은 견제자가 될지는 상당히 의문시된다.

 

합리적인 이성에 대한 기대를 버리면, 부조리의 이성 혹은, 구조에 의한 주체의 해체, 다양성과 차이를 인정하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대안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모두 본질주의에 반대편에 있는 상대주의적 대안들이다. 이러한 상대주의는 사회 전체적인 규범적 질서를 만들기 어렵고, 사회 변혁 주체와 인간성회복/역사적 진보를 위한 실천적 행위를 어렵게 한다. 어떤 것이든 동일한 가치와 의미를 가진다면, 도대체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서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는가... 하버마스는 마르크스 주의의 붕괴후의 가치의 난립상을 막고, 올바른 방향으로 사회를 이끌기 위하여 이성적 규범체계를 살리려고 노력한, 실천적 방향성을 도출하기 위하여 노력한 철학/사회학자이다.

반응형

'철학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회학자 뒤르켐  (0) 2021.04.20
아우라, 벤야민  (1) 2021.04.19
계몽의 변증법 -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0) 2021.04.16
시뮬라크르 시뮬라시옹  (0) 2021.04.14
구조주의, 알튀세르  (0) 2021.04.13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