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인식하는 물질, 존재와 의식... 자연철학적 접근

들뢰즈, 차이의 철학자 본문

철학사

들뢰즈, 차이의 철학자

existence_of_nothing 2021. 4. 27. 16:13

차이의 철학자 들뢰즈

들뢰즈의 철학을 한번 정리해보고 싶었으나 사실 쉽지는 않다. 그의 철학, 혹은 저서는 다양한 분야의 얘기를 난해하게 전개하기 때문이다. 계속 늦춰질 것 같아서, 일반 이번에 한번 정리를 시도해본다.

 

들뢰즈는 파리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서 교수와 철학자로서 활동하다가 말년에 폐암의 고통과 우울증으로 투신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미셸푸코는 들뢰즈를 높이 평가하여 21세기는 들뢰즈의 시대일 것이다라고 한다. 유명한 저서로는 "천의고원"과 "안티-오이디푸스"가 알려져있다. 가타리라는 의사겸 철학자와 공동 집필하였다.

 

들뢰즈는 다양한 저서에서 스피노자, 칸트, 니체, 헤겔등을 재해석하고 차이와 생성(becoming), 노마디즘(유목주의)과 리좀으로 표현되는 탈주와 탈경계의 철학을 주창하였다. 그의 철학의 키워드는 요약하면 "차이"와(들뢰즈의 1968년 박사 학위 논문 제목이 "차이와 반복"임) "노마디즘"이다.

 

들뢰즈는 "차이는 모든 사물들의 배후에 있다. 그러나 차이의 배후에는 아무 것도 없다" 라고 얘기한다. 하이데거가 존재자를 존재하게 하는 원리로서의 존재를 얘기한 것과 비슷하다. 차이의 철학은 존재론, 그 중 존재의 일의성/다의성과 관련된다. 만약 신이 우주의 밖에 존재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신의 존재를 알 수 있을까.. 만약 신이 우주 안에 존재한다면 우리와 신의 차이는 무엇인가.. 중세철학의 딜레마였다.

들뢰즈는 차이가 존재를 만든다고 얘기한다. 그 "차이"라는 놈은 존재하는 것인가 ^^.. 알랭 바디우는 들뢰즈가 존재를 "차이"라는 추상자를 통해서 일자로 설명한다고 비판한다.

 

사실 데리다가 먼저 "차연 (differance)" 라는 말로 차이에 관한 얘기를 시작한다. 데리다는 차연이란 말, 차이와 지연이라는 말을 통해서 현재 확정되어 보이는 것 같은 text가 향후에는 다른 의미로 와닿을 수 있다는, 존재의 역동성을 얘기하였다. 들뢰즈는 존재들의 내부에 스스로 차이를 만들어내는 현 존재를 부정하려는 의지가 있음을 말한다. 데리다 차연을 얘기한 것은 목적이 있다. 기존의 로고스 중심, 본질주의, 음성 중심 주의를 해체하고, 어느 순간, 맥락에서 읽느냐에 따라 해석의 차이가 날 수 있는 텍스트 중심 사회로 변화시키고자 했기 때문이다.

 

철학사 전체를 통해서 본질주의와 상대주의는 여러번 반복해서 언급된다 (유명론과 실재론, 경험주의와 합리주의). 존재의 내면에 존재하는 본질로서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려는 인간들의 욕구와 본질주의의 관념성을 비판하는 상대주의 혹은 변화에 대한 철학은 항상 정반합처럼 진행된다. 들뢰즈는 스피노자, 니체, 베르그송으로 연결되는 상대주의적 철학의 연장선 상에서 그들의 철학을 계승 발전하고자 한 것 같다.

 

가타리와 공저한 "천의 고원"에서 그는 다양한 신 용어와 개념들을 소개한다. 들뢰즈 철학은 난해하기로 유명하다. 하지만 이해가 어려운 철학자는 그 외에도 차고 넘친다. 철학이 어려운 이유는, 말로 할수 없는 부분을 얘기하는 것... 그리고 용어사용의 남발이 큰 원인일 것이다.

 

"천의 고원"에서는 기계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한다. 전쟁하는 기계, 욕망하는 기계 등등.. 기계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러한 기계가 아니라 사물들을 (재)배치하는 메커니즘을 일컫는 용어이다. 들뢰즈는 천의 고원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를 말하라면 "배치"라고 하겠다고 했다. 같은 물건이나 개념이라도 배치가 달라지면 다른 의미를 나타낸다. 자는 건축가에게는 제도의 수단, 선생님에게는 매의 수단, 등이 가려운 이에게는 등긁기를 위한 존재이다. 사실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게임이론에서도 비슷한 얘기를 한다. 같은 언어가 다른 맥락에서는 다른 의미로 해석된다.

 

기계들은 사물들의 배치를 만들고, 하나의 배치들 사이에는 다시 새로운 배치에 대한 가능성이 존재한다. 배치된 상태를 현실성(코드화)이라고 하고, 배치 가능한 상태를 잠재성이라고 표현하고 기존의 배치 상태는 탈주선을 따라 재배치(재코드화)된다. 베르그송의 인식의 3개층 역원뿔의 그림을 상상하면 된다.

 

존재들은 탈주성을 내재하고 있다. 스피노자 코나투스(conatus), 베그르송의 엘랑비탈(elan vital), 생의 의지, 권력에의 의지, 불확정성의 원리... 모두 존재 내부에는 탈주의 본능이 숨겨져 있음을, 심지어는 무생물로 환원하려는 탈주선(타나토스, 쥬이상스)도 존재한다. 선분에 추가적으로 그려지는 탈주선들은 존재들의 변화를 유도하고 새로운 창조를 유도한다. 

 

그러한 존재 내부의 탈주선들은 정해진 경계를 벗어나려는 욕구를 유발하며 탈영토화, 탈구조화, 탈지층을 유도한다. 이러한 탈주의 선들은 다시 서로가 만나고 그 만나는 지점에서 다시 재배치에 의한 탈주를 시도한다. 보편적인 질서에서 탈주하여 이질적인 재접속을 시도하는 것, 그래서 존재들이 다양하게 나타나는 현상을 "리좀"의 원리라고 책에서 설명한다. 리좀은 큰 몸통의 나무와 반대되는 고구마 뿌리줄기같은 중심이 없는 연결을 의미한다.

 

책에서 "오르키데"라는 식물(서양란)의 예로 설명한다. 오르키데는 꽃의 형태를 말벌 암컷 모양으로 만들어(재배치하여) 말벌 수컷을 유혹한다. 그 때, 말벌은 오르키데가 되어 (동물/식물되기) 오르키데의 꽃가루를 옮기는 기능으로 역할한다. 말벌은 자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오르키데와 기능적 분화(탈주)와 재접속을 통하여 리좀을 이루고 새로운 기능을 수행한다. 이러한 탈주선들은 다양한 존재, 보편자의 형태를 띠지만 어느 하나도 같은 것이 없는 차이의 존재들, 스피노자의 무한양태로 표현된다. 

 

이렇게 존재의 내부에서 존재들의 경계를 벗어나게 되면, 기관없는 신체가 될 수 있다. 데리다가 들뢰즈의 이론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렵다고 얘기한 그것에 대해서 천의 고원에서 많은 얘기를 하고 있으나, 결국 하고자 하는 얘기는 탈영역, 탈경계를 말한다. 기관없는 신체는 신체를 재배치하여 새로운 기능을 만들어낼 수 있는 근원, 알 혹은 줄기세포와 같은 존재이고, 기존 배치를 탈주하여 새로운 기관없는 신체를 만들어낼 수 있다. 좌파적인 해석이라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통한 국가와 계급의 소멸을 예로 들 수 있다.

 

들뢰즈와 라캉은 모두 욕망에 대해서 얘기한다. 들뢰즈의 욕망은 욕망하는 기계가 만들고, 라캉의 욕망은 주체의 빈자리가 만든다 (플라톤은 "향연"에서 이데아에 남겨진 잃어버린 반쪽이, 이상적인 상태로 돌아가려는, 충족되지 않은 주체의 빈자리가 욕망의 실체라고 주장하고 이후 많은 철학자들이 이개념을 차용한다). 프로이트와 라캉이 욕망의 부정적인 면을 얘기했다면, 들뢰즈는 마르크스가 욕망의 생산의 원동력으로 보는 것처럼 욕망을 진정한 창조의 원동력으로 바라본다. 

 

인간 고유의 창조적인 욕망은 제도권에 의해서 코드화되고 통제된다. 예전에는 군주가, 국가가 코드화를 했다면 현대에는 자본이 인간 고유의 욕망을 왜곡하고 코드화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제도화하고 만들어진 욕망에 의해서 인간들은 무목적적인 욕망하는 기계로 편입되고, 존재 내부의 고유한 욕망, 탈주의 욕망은 길들여지게 된다.

 

반응형

'철학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칼, 지적 사기  (0) 2021.04.28
살아있는 텍스트, 데리다  (0) 2021.04.27
화이트헤드, 생성과 과정의 철학자  (0) 2021.04.23
베르그성, 반지성주의  (1) 2021.04.22
철학 단상  (0) 2021.04.2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