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인식하는 물질, 존재와 의식... 자연철학적 접근
베르그성, 반지성주의 본문
점들이 모이면 선이 될까, 선들이 모이면 면, 면은 부피가 될까, 아니면 그들은 애초에 다른 존재들이였을까?
==============================================
철학사에서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 철학자들이 여러명 있다. 쇼펜하우어, 니체, 그리고 지금 얘기할 베르그송이 그들이다. 그들은 과학적 분석에 기반을 둔 이성보다는 감성과 직관에 의한 본질 파악을 강조한다.
한때 철학 관련 자료들을 열심히 보다가 요즘은 별로 안 보고 있다. 일단, 서양 주요 철학자 여러명을 시대별로 한번 쭉 훑어 보았기에 그 흐름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자한 목적을 달성한 부분도 있고, 철학은 그 난해함에 비해서 실질적으로 얻을 수 있는 부분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특히 반지성주의 계열의 철학자들의 이해는 더더욱 그러하다.
서양 철학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은 지대하다. 눈으로 보는 현상계의 저변에 변하지 않는 본질이 존재하는가, 본질은 이데아의 세상에 보편자로 존재하는가 혹은 물체 하나하나에 개별자로 존재하는가, 우리가 인식하는 현상계는 실재하는가, 실재한다면 그것을 있는 그대로 실제로 인식할 수 있는가 아니면 인식 체계가 재 구성한, 관념상의 세상에 그들이 존재하는 것인가, 세상은 정신과 물질이 별개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물질 기반은 혹은 관념 기반의 실체만이 존재하는가..
베르그송이 보기에 그들 모두의 논쟁은 고정된 실체, 혹은 절단된 한 단면으로서의 본질들을 논하고 있다. 오래 전 헤라클레이토스가 만물유전, 모든 것은 변화한다고 얘기했지만 그 조차도 변화하는 사물을 얘기한 것이지, 변화를 일으키는, 변화 자체, 혹은 변화의 원인으로서의 그 무엇을 얘기하지는 않았다.
세상에는 무엇인가가 존재한다. 그 존재들은 크게는 물리 화학적 법칙성을 그대로 따르면서 살아가는 무기물들과 그 법칙을 거스르면서 행동하는 유기물, 생명들로 대별된다. 생명과 물질(무생물이라고 하자)의 차이는 무엇일까? 과학자들은 생명과 무생물을 구분하는 기준을 DNA(혹은 RNA)의 형태로 정보를 저장하고 생명활동을 위한 물질대사를 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바이러스는 정보는 저장하지만 물질대사를 타 존재에 의존하기에 그 중간의 존재이다.
베르그송은 우주의 존재의 너머에 우주를 지속시키고 생명체의 지속을 위한 의식이 관통하고 있다고 가정한다. 이것에 의해서 생명체는 존재 내부에 진화의 씨앗을 품고 있으며 이것에 의해 진화하는 과정을 창조적 진화라고 주장한다. 존재 내부에 존재의 경계를 벗어나려는 생명성을 "엘랑 비탈"이라고 부른다. 엘랑 비탈은 진화의 동인이며 데리타와 들뢰즈에서 차이를 만드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토인비는 문명 성장의 역사에서도 엘랑 비탈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베르그송의 주 저서 중 하나인 "창조적 진화"는 문학이 아닌 철학서이다. 이 저서만으로 베르그송은 192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다. 철학자들 중 노벨상을 수상한 이가 여러명 있다. 베르그송, 러셀, 카뮈, 샤르트르(수상 거부)이 그들이다. 베르그송의 노벨 문학상 수상에 대해서 여러 말들이 있었다. 최근에 대중 가요 가수인 밥 딜런이 노래하는 시인으로 문학상을 시상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5분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동일한 나인가? 철학에서 말하는 자아 동일성의 문제이다. 5분 전의 나와 현재의 나는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다고 얘기할 수도 있고 같다고 얘기할 수도 있다. 만약 그 둘이 같다면 무엇이, 어떤 근거로 그 둘을 같다고 얘기할 수 있는 것인가? 불교에서는 흔히 제법 무아라고 하여 고정된 본질로서의 나는 존재하지 않고 단지 인연에 따라 관계하는 나만이 존재할 뿐이라고 얘기한다.
기억은 부재하는 대상에 대한 표상이다. 우리들은 현존하지 않는 대상에 대해서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들은 현재에 다시 변형되고 때로는 왜곡되어 되살아난다. 베르그송은 "물질과 기억"에서 인간에게는 기억에 의해서 생성된 심층적 자아와 행위를 하는 표면적 자아의 두 층이 있다고 한다. 심층 자아는 이제까지의 경험의 축적을 바탕으로 새로운 관계를 맺고자 한다. 즉 인식하는 주체로서의 고정된 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관계 맺음을 하는 심층 의식으로서의 자아가 있다.
베르그송은 라이프니츠의 단자론(존재는 정신적/물질적 단자들의 유기적 결합)처럼 우주의 근원에 창조와 변화의 주체로서의 존재나 원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들은 다른 것들과의 관계맺음으로 끊임없이 형체를 변화하고 새로운 모습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생명이 넘쳐나는 우주의 근원이며, 존재 (being)이며 동시에 생성(becoming)인 신을 얘기한다.
범신론(pantheism)을 떠올리는 여러 철학자들이 있다.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베르그송, 화이트 헤드가 드들이다. 스피노자는 신플라톤주의와 유사한 일자의 유출, 무한 양태로서의 신과 우주를 얘기한다. 라이프니츠는 정신을 이루는 모나드(단자)들의 구성 원리로서의 신을 얘기하고 우주는 신이 미리 계획하고 예정한 길을 따라 운동하게 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화이트헤드에게 신은 티마이오스의 데미우르고스처럼, 신은 세상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편집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세상의 창조자가 아니라 그 자신이 피조물이면서 현실적 존재들을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역할을 한다.
유대인으로서 비록 카톨릭으로 개종하지는 않았지만, 카톨릭을 받아들인다고 얘기하며 마지막을 신부의 성사와 함께 한다. 공교롭게도 교황청은 그의 범신론적인 사상의 전파를 우려하여 "창조적 진화"를 금서 목록에 올린다.
심신 이원론과 관념 혹은 물질에 기반을 둔 일원론은 동서양 철학사 전체를 관통하는 큰 주제중 하나이다. 데카르트가 육체와 정신의 이원론을 주장하면서, 뇌하수체인 송과선을 바로 그 둘의 결합점이라고 논란을 일으킨다. 어떻게 연장의 속성인 육체와 사유의 속성인 정신이 하나의 실체로 결합할 수 있을까?
베르그송도 데카르트와 같은 정신의 실체성을 인정한다. 그 둘이 결합하지 않는 상태에서의 육체 혹은 정신만의 인식을 순수 지각 혹은 순수 기억이라고 하며 그것은 이론적인 존재일 뿐이라고 얘기한다. 베르그송은 순수 기억은 그 자체로 존재하고 뇌가 기억을 불러들여 현실화하는, 즉 정신과 물질 혹은 기억과 물질의 전화교환국의 기능을 수행한다고 얘기한다. 이것을 과학적인, 지성적인 방법으로 이해가 어렵기에 직관에 의한 깨달음을 강조한다. 실제로 당시 철학자로서는 방대한 과학적 지식과 수학적 재능을 타고난 그가 직관을 강조한 것은 일견 아이러니컬하게 보이기도 하다.
제논의 논법에서 아킬레스는 영원히 거북이가 이동한 거리의 1/10 지점을 지날 수 밖에 없다. 이 과정이 영원히 이어지기에 절대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앞지를수 없다는 궤변을 주장한다. 베르그송은 이것을 아주 간단하게 반박한다. "그러한 시간은 없다". 1/10이라는 정지한 시간은 없고 지속으로서의 시간만이 있을 뿐이다. 시간은 지속과 질적 도약으로 이루어진다. 즉 순간의 연속이 현실이 아니고, 질적인 변화의 연속이 현실이다.베르그송이 말하는 "지속"이다. 흔히 그러한 시간을 크로노스의 시간에 대비해서, 이벤트의 연결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시간을 카이로스의 시간이라고 부른다.
철학에서 xx의 망각이란 용어는 여러 군데에서 등장한다. 예를 들면, 스피노자는 '자아 망각', 하이데거는 이를 이어서 ‘존재 망각’을, 베르그송은 '시간 망각'을 들뢰즈는 ‘차이 망각’을 논한다. 철학은 이처럼 이전 사고에서 놓친 한 꼭지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베르그송은 종래의 철학자들이 질적으로 다가오는 시간이 아니라 분할 가능한 공간화된 시간만을 전제로 하였다고 비판한다.
우리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는가? 우리는 다양한 경험에 의해서 생성된 기억과, 현재의 상태를 탈주하려는 생명성을 포함하고 있다. 어떤 고정된 자아가 있어서 그 자아가 A혹은 B의 선택을 하는 그런 자유의지는 없으며, 그렇다고 현재 상태에서 A라는 선택을 기계적으로 하는 그러한 기계론적 해석도 없다. 생명이 흐르는 과정.. 나의 기억과 생명성이 이끄는 길로 가는 것이 자유의지라고 베르그송은 주장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하여 수많은 생물학적인 사례를 책에서 열거하였기에 러셀은 서양철학사에서 베르그송을 벌레 철학자라고 (약간은 조소적으로) 평한다.
베르그송은 존재의 저변에 있는 변화의 원리로서의 생명력을 가정하고 이를 직관적 인식으로 감지하고 설명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부분은 사실 비트켄슈타인의 말할 수 없는 것에 해당하므로 한동안 잊혀지다가 들뢰즈에 의해서 차이의 철학으로 부활한다. 또한, 메를로 퐁티의 후기 철학, 존재의 저변에 있는 "살" 개념으로도 연결된다. 마지막으로, 무계보 철학자(스피노자, 베르그송, 화이트헤드 등등)인 화이트 헤드에 의해서 우주의 존재 원리로서의 신의 형이상학으로 연결된다.
'철학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들뢰즈, 차이의 철학자 (0) | 2021.04.27 |
---|---|
화이트헤드, 생성과 과정의 철학자 (0) | 2021.04.23 |
철학 단상 (0) | 2021.04.20 |
사회학자 뒤르켐 (0) | 2021.04.20 |
아우라, 벤야민 (1) | 2021.04.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