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인식하는 물질, 존재와 의식... 자연철학적 접근
역사와 수학 본문
헬레니즘 시대의 자연철학이 그대로 로마로 계승될수만 있었다면 (무식한 게르만민족이 훈족을 피해 남하하지만 않았다면, 알렉산더가 동쪽만 아니라 서쪽을 조금이라도 바라봤다면), 우리는 현재와 전혀 다른 세상에 살고 있을 지 모른다.
만약, 기독교가 유럽신앙/철학으로 자리잡지 않았더라면, 1000여년의 자연철학의 퇴보는 없었을 것이다. 논란의 여지는 많지만, 사실에 가깝다. 중세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과학/수학 수준은 기원전 그리스의 수준보다 떨어져 있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아랍권의 문화가 유입되지 않았다면 이들은 상당기간 과학적으로는 미개한 수준에 머물렀을 것이다.
중세 사람들은 지구가 편평하다고 믿고, 지구의 끝에 가면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가르쳤다. 물론, 모든이들이 이것을 믿지는 않았으며, 콜롬부스와 마젤란에 의해서 과학적으로도 그렇지 않다는 것이 증명되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4세기에 이미 지구는 둥글고 동서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하였고 에라토스테네스는 지구의 원주 길이를 오늘날 수준으로 정확히 예측하였다. 불행히도 476년 로마의 멸망과 함께 (사실은 헬레니즘의 몰락과 함께) 대부분의 성취는 사라지고 과학은 도리어 후퇴한다. 유클리드 기하학은 20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중고교 교육 과정에 사용되고 있고, 최근에야 리만기하학이 유클리드 기하학을 보완하고 있다.
1675년 라이프니츠가 “분수에도 무리수에도, 장애 없이 적용할 수 있는, 극대와 극소. 또한 접선에 대한 새로운 방법, 그리고 그것을 위한 특이한 계산법”이라는 요상한 제목의 논문을 발표한다. 미적분을 개발했다고 발표한 것이다. 물론, 10여년전부터, 1665년부터 뉴턴은 이미 미적분을 역학 문제에 적용하고 있었지만 학술논문으로 발표를 하지 않았기에 저작권(??) 문제가 발생한다. 그 둘은 신나게 10여년동안 싸우고, 결국은 각자의 독자적인 업적으로 인정받는다. 오늘날, 고교과정에서 배우는 미적분은 라이프니츠에게 기인한다.
구분적분법, 즉, 조그만 도형을 무한히 쌓아서 면적이나 부피를 계산하는 것이 적분의 기본 개념이다. 동일하지는 않지만 유사한 개념은 사실 기원전 그리스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아르키메데스(BC287~212)는 “포물선의 구적법”에서 아래 그림과 같은 포물선과 직선으로 둘러싸인 도형의 넓이가 4/3이 됨을 증명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면적을 작은 도형들로 합으로 표시하는 개념, 그리고, 무한 수열의 개념(1+1/4+1/16+…)을 알고 있어야 하는데, 그가 체계적으로 계산하였던, 아니면 단순 직관이었던 오늘날 적분의 기본 개념은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 외에도 많은 기발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타인이 자신의 생각을 도용한다고 생각해서 기록으로 별로 남기지 않았다는 점이 안타깝다. 또한, 로마의 병사가 선을 밟았다고 성질내다가 칼에 찔려 죽은 것도...

또한, 기원전 240년경에 그리스인들은 소수의 개념과 소수를 찾는 체계적인 방법 (에라토스테네스의 체)도 이미 알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오늘날 알고 있는, 2의 배수를 모두 지우고, 3의 배수를 모두 지우고 하는 간단한 방법으로 특정 크기까지의 유한한 소수들을 찾아내는 간단한 방법이다. 정수론 혹은 소수에 관한 이론은 많은 수학자들에게 항상 흥미있는 주제이다. 리만 가설, 골드바흐의 추측, 메르센 소수 찾기 등은 암호 알고리듬 연구의 핵심 중 하나이다. 정수론과 대수학의 기본 개념이 헬레니즘 시대에 정립되기 시작한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BC356-323) 사후에 왕국은 분열되고 이집트는 프톨레마이오스가 지배한다. 헬레니즘 시대의 학문은 이집트 북부도시인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더욱 계승 발전된다. 아리스토텔레스, 유클리드, 아르키메데스의 많은 업적들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차곡차곡 저장되어 다음 세대를 위한 찬란한 거름을 700년동안이나 제공했다.
그러나, 권력 투쟁에만 눈이 먼 어리석은 정치가와 아무런 생각 없는 미친 광신도들은 도서관을 약탈하여 모두 불에 태우고, 그곳에서 연구하던 이들을 살육한다. 진리와 결혼했다며 연구에만 열중하던 히파티아(355-415)는 아무런 죄도 없이 발가벗겨져 능지처참을 당한다. 그들의 복수는 한순간이었겠지만, 그 결과는 1000년의 지성의 퇴보를 가져온다 (다행히 아랍 이슬람권에서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에 대한 연구를 이어간다).
17세기의 페르마(1607-1665)는 디오판토스(214-284)의 “산수론” (AD250)이라는 말도 안되게 오래된 수학책의 여백에 a^n+b^n=c^n이라는 페르마 정리를 갈겨둔다. 자신이 증명했다는 개뻥을 남겼지만 오늘날, 그것을 아무도 믿지 않는다. 수많은 수학자들을 폐인으로 내몬, 가우스도 오일러도 두손 다든 문제는 350년이 지나서 (프린스턴 대학에서 7년동안 놀고먹고 있는 줄 알았던) 영국 수학자 앤드루 존 와일즈에 의해서 (1993년) 증명된다. 증명도 증명이지만, 페르마가 17세기에 1300년 된 수학책을 보면서 공부했다는 사실이 더욱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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