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인식하는 물질, 존재와 의식... 자연철학적 접근
밀란 쿤데라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본문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밀란 쿤데라
풍선 인간이 있었다. 땅에 살기 위하여 여러개의 돌을 매고 있었다. 돌이 너무 무거워서 하나씩 벗어 던졌다. 마지막 돌을 던지고 해방감을 느끼는 순간 그는 하늘 높이 날아가 버렸다...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 영원한 회귀는 아주 신비스러운 사상이다...
영원히 사라져 가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삶은 하나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einmal ist keinmal ... 한번은 없는 것과 동일하다...
저녁 노을에 비치면 모든 것은 향수의 유혹적인 빛을 띠고 나타난다, 단두대까지도..."
우리는 우리가 기억하는 삶으로는 단 한번 산다. 매 순간 선택은 한 번 뿐이고, 그 선택의 결과를 우리는 예측하기 어렵다. 그리고 무수히 많은 우연이라는 소행성을 조우한다. 좋은 선택을 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 운명이 일회성이라면, 그리고 그 운명을 우리가 예측 할 수 없고 다시 돌아와서 그 선택을 바꿀 수 없다면... 좋은 선택, 나쁜 선택이란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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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한번에 쭉 읽어가기는 쉽지 않다. 소설은 무거운 니체의 철학적 명제들로 시작하고 그가 읊조리는 얘기의 시간적/공간적 순서가 직선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번 읽고 대략의 스토리를 파악한 후에, 다시 읽으면 이해가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소설에는 4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토마스는 바람둥이 의사이다. 끊임없이 여자와의 섹스를 갈구하지만 시골바에서 우연히 만난 처녀 테레사를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시골에 정착하며 교통사고로 같이 죽음을 맞이한다. 가벼움을 추구하던 그가 테레사라는 무거움에 정착한 이유가 뭘까..."Es mus sein.. 그렇게 할 수 밖에"... 베토벤 현악 4중주에 나오는 문구이다.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단 한번 사는 인생에서는 의미없는 질문일 뿐이다.
테레사는 수많은 남성과의 가벼움을 추구하던 어머니의 실수로 세상에 태어난다. 토마스와의 운명적인 만남 이후, 그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을 인생의 모든 의미로 삼는다. 그의 사랑을 얻기 위하여 그를 프라하, 취리히, 다시 프라하, 시골마을로 끌어들이고 <인생의 종착역>에 가까워져서야 늙고 힘빠진 토끼가 되어버린 토마스를 행복하게 끌어안는다.
프란츠는 저명한 대학교수이다. 부인 마르-클로드와 20년을 살지만, 애인 사비나에 충실하기 위하여 그녀를 떠난다. 그러나 사비나에게 충실은, 청교도적인 아버지에 대한(혹은 그것이 연상하는 공산주의 사회체제에 대한) 반감을 연상시키고 프란츠를 배신하고 뉴욕에 정착한다.
프란츠는 키치라고 표현되는 무거운 가치를 위하여 공산주의 체제의 모순이 드러나던 캄보디아로 불의에 저항하기 위한 대장정에 나서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연극일 수 밖에 없음을, 무거움의 본질은 가벼움임을 깨달을 뿐이다. 무거움으로 시작한 대장정은 극적인 가벼움으로 인한 (소매치기에 퍽치기) 어이없는 죽음으로 끝난다.
카레닌(개)은 일차원적인 시간의 세상을 사는 인간과 대조적으로 회귀되는 원형의 시간대를 산다. 카레닌에게 매 하루의 시작은 경이로 다가오고 매 하루는 즐거운 기억이다. 소설의 마지막에 암에 걸린 카레닌의 힘없는 모습과 죽음이 슬프게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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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약 공돌이의 길을 걷지 않았다면... 고 3 담임 선생님께서 의대와 공대 두장의 원서를 써 달라는 나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았다면... 고 3 담임 선생님이 애국심에 불타던 화학 교사가 아니었다면... 나의 인생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길이 되었을 지 모른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일회의 인생만을 살아야 하는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 육백만명의 유대인이 죽어간 것이, 히틀러의 사진을 보면서 어린 시절의 감상적인 추억을 되살리는 토마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것처럼... 단 한번만 살 수 있는 인생, 모든 선택이 일회성인 인생에서 "선"이란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어차피 캄보디아에 가봐야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도 별로 없음을 알면서 대장정을 떠난 많은 무거움의 존재들, 그들에게 그 무거운 가치의 본질은 그냥 가벼운 연극일 뿐이다. 무엇이 바뀔 것인가... 바뀐 세상은 더욱 나은 세상일 것인가... 이상적인 세상 공산주의를 그리면서 혁명을 완수하였으나... 그 세상은 모습만 바꾼 전체주의 사회였을 뿐이다. 그 사회는 다시 연극을 한다.. 이 세상에서 반동 세력이 없다면 고통은 없노라고...
신은 자신의 형상데로 인간을 창조했다... 신은 콧구멍을 가졌을까... 신은 똥을 쌀까? 더러운 얘기같지만.. 중세 신학자들에게 이 주제는 엄청 중요했다.. 일부 신학자들의 결론은 예수님은 음식은 먹었지만.. 응아는 하지 않았다... 신은 무슨 의미로 자신의 형상데로 인간을 창조했다고 한 것인가?
모든 무거움을 벗어던지면... 더 이상 벗어 던져 버릴 것이 없으면... 존재의 가벼움으로 인해서 그는 지상에 반쯤만 존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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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소설의 처음 부분, 나레이션으로 돌아와 보자
한번 지나가는 것은 없었던 것과 같은 것... 인생이 일회성이라면 하나의 물거품일 뿐이다... 물거품이 핏빛을 띠던, 영롱한 파란색을 띠던, 하얀 물거품을 띠던...
그러나 만약 인생이 영원 회귀를 한다면.. 한번 이루어진 일, 지금 이 순간은 영원히 판화처럼 새겨진다. 무거움을 쫓아갈 것인가... 아니면 가벼움을 쫓아갈 것인가?
파르메니데스는 아주 오래 전, 세상은 대립의 쌍으로 즉, 남자와 여자, 빛과 어두움 등으로 나누어져 있다고 보았다. 음과 양.. 그 중 가장 심오한 것은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의 대립이다... 그러면 무거운 것이 양이냐 아니면 가벼운 것이 양이냐? 파르메니데스는 가벼운 것이 양이라고 했다.. 그의 대답은 옳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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