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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existence_of_nothing 2021. 4. 6. 08:58

 

그리스인 조르바      by    니코스 카잔차키스

 

철학은 존재론, 인식론, 형이상학, 미학, 윤리학, 논리학등으로 나누어진다. 나머지는 사실 우리의 실생활과 크게 관련은 없지만 윤리학은 우리의 삶의 태도에 큰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선하게 살아야 하는가? 어차피 일회성으로 흘러가는 인생에서 선하게 사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왜 타인의 불행까지도 고려해야 하며, 정체도 모호한 정의를 외쳐야 하는가?

 

홍상수 감독이 김민희와 사랑에 빠진다. 감독에게는 배우자가 있고 과년한 딸이 있다. 이 경우 보통은 가정을 선택하고 불륜의 길을 선택한다. 간통죄가 폐지되었으니 더더욱... 그러나 감독은 사랑을 선택했고 아내는 바람을 피더라도 이혼을 해 줄수는 없다고 한다. 홍상수의 용기를 칭찬해야할 것인가, 그의 무책임을 비난해야 할 것인가? 20년동안 키웠는데, 그렇게 오래 가족의 의무를 지탱하기 위해서 노력했는데, 나는 더 이상, 나의 감정과 행복을 추구할 권리는 없는 것인가? 

 

내가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초반 도입부에서 (사실 책 끝까지) 너무 마초적인 이야기들로 도배가 되고, 비윤리적인 내용에 대한 미화가 많았기 때문이다. 아마 페미니즘을 지향하는 분들은 이 고비를 넘기기 어려웠을 것으로 판단된다. 나도 이 책을 끝까지 읽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실 지금도, 조르바의 탐미적인 자유로움이 내가 추구하는 가치와는 크게 다름을 느낀다. 그러나, 끝까지 읽어간 지금, 그에 대해 느끼는 거부감은 처음보다는 조금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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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벌레"라는 말에 충격을 받고 사람들속에서 그들과 더불어 행동하기 위하여 "나"는 고향인 크레타섬으로 간다. 우연히 늙은이 조르바를 만나서 갈탄사업의 책임자로 임명하고 같이 동행한다. 갈탄사업은 사실 방편일 뿐이고, "나"는 행동하는 감정을 느끼기 위해서 고향을 찾는 것 뿐이다. 섬에서 오르탕스 부인의 여인숙에 머물고 조르바는 그녀를 애인삼는다. 오르탕스 부인은 프랑스 출신의 화려한 과거를 지닌 늙은 여인이다.

 

마을에는 아름다운 과부가 있었는데 마을의 여인네들에게는 그녀가 눈에 가시였고, 남정네들에게는 팽팽한 긴장감의 대상이었다. "나"는 어느날 우연히 그녀와 동침을 한다. 마을의 한 젊은이가 그녀를 연모하지만 그녀는 그의 청을 거절하고, 상처받은 젊은이는 자살한다. 섬마을 사람들과 젊은이의 아버지는 복수를 위하여 아무 죄도 없었던 그녀의 목을 베고 살해한다. 조르바는 마을의 광기에 온몸으로 저항하지만 그들을 막지는 못한다.

 

조르바와 결혼을 꿈꾸던 오르탕스 부인은 병으로 죽고,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갈탄공사 구조물들은 개막식에서 모두 무너진다. 빈털터리가 된 "나"는 크레타섬을 떠나고 가끔씩 조르바와 편지를 하고, 조르바의 죽음을 전해듣는 것으로 소설은 마감한다.

 

카찬차키스는 기독교의 위선과 독선을 비판하고자 하는 의도인지는 모르지만, 수도사 자하리아 수사의 얘기를 더한다. 그는 음주가무를 즐기는 타락한 수도사의 면모와 광적으로 신에게 기도하고 때로는 망상하는 신실한 수사로서의 모습을 보여준다. 소설의 마지막에 그는 망상에 빠져서 수도원을 불태우고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조르바는 그의 모습에 기뻐하고 그를 수도원의 성상 밑에 두어, 신의 심판을 당한 것으로 가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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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분량이 짧지 않음에도 줄거리라고 부를 큰 스토리도, 다양한 주요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다. 조르바는 소설의 앞부분만을 보다보면 철저히 이기적이고 살인/강간을 일삼았으며 여자만 보면 환장하는, 저속한 한 늙은이에 불과하다. 그의 나레이션을 듣는 것은 일견 시간, 낭비처럼 보이고 페미니스트라면 지나친 남성우월주의, 여성 멸시의 멘트를 참기 어려울 것이다. 책 전체에서 여성의 역할은 남성의 보호와 섹스에 목멘 수동적 존재에 불과하다.

 

비록 배우지는 못했지만, 조르바도 젊은 시절에는 조국 그리스를 위한 열정으로 수많은 전투에 참가하여 필요하면 살인과 강간을 일삼았다. 어느날, 낮에는 신부로 위장하고 밤에는 저항군이던 불가리아 비정규군 신부를 살해한다. 다음날 다시 마을에 왔다가 고아로 남겨진 다섯명의 아이들을 보면서, 이 모든 무의미한 의미들에 의해서 남겨진 비극들을 깨닫게 된다 (그의 말로는, 그 날 "조국으로 부터 구원받았다").

 

그에게 인간은 한국인/일본인/중국인이 아니라 선한사람/악한사람일 뿐이며 조금더 나이가 들면 악한 사람도 그냥 한 인간, 불쌍한 인간일 뿐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리스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한 여인(인간)을 지켜주는 것 뿐이다. 과부와 하룻밤을 동침한 "나"는 광기의 공포에 질려있지만, 아무런 상관도 없는 조르바는 목숨을 걸고 한 인간을 구원하고자 마을 사람들을 혼자 상대한다.

 

어떤 연예인이 선배가 "묵히면 똥된다"는 말을 듣고, 그 다음부터 정조에 대한 고정 관념을 버리고 인생을 즐겼다고 한다. 어차피 일회성의 인생에 순결와 정조의 의미는 무엇인가? 조르바는 피고 싶은 담배, 마시고 싶은 술 다 마시고, 끊임없이 여인네들과 사랑을 나누고 지금 이 순간의 감정에만 탐닉하는 디오니소스적인

향락을 추구한다. "지금 뭐 하고 있니", "키스하고 있다", "그러면 키스만을 생각해", 그의 시계는 항상 지금 이순간에 맞춰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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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에 대한 다양한 독법이 가능하다. 어떤 이들은 조르바의 열정, 인간적인 면, 짐승남적인 면모에 반했다고 얘기한다. 조르바는 인간적이었나...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소설의 마지막에 조르바는 헤어진 후, "멋진 녹암을 찾았음, 즉시 오시오"라고 나에게 전보를 보낸다. 대공황으로 수많은 이들이 굶어죽어가고 있는데, 아름다운 녹암을 찾은 그는 인간적인 것인가... 도대체 인간적이란 어떤 의미인가?

 

조르바에게 도덕, 윤리, 정치, 종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고통에도 무감각하다. 철저히 현재 이 순간의 감정에 충실하고, 자신의 눈에 약하게 보이는 인간, 특히 여자들에 대한 강한 연민만이 존재할 뿐이다. 가장 원초적이고 즉시적인 욕구에 민감한 조르바를 자유인이라고 찬양해야 할지, 이기적인 무가치주의자라고 판단해야 할 지 쉽지 않다. 심지어, 소설의 말미에 조르바는 "시베리아의 추위"를 견딜수 없다는 단순한 이유로 결혼하고 가족을 만든다. 인간에게 진정한 자유란 "신기루"일 뿐이다.

 

가벼움과 무거움을 선택할 수 있다. 무거움을 선택하는 순간 자유를 희생해야 한다. 나에게 너무 많은 의무가 짐지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벼움을 선택하는 것조차도 쉽지 않다. 현재 이 순간, 나의 감정에 충실하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아니면 이러한 감정조차도 나를 무겁게 만들 것이기에 그것 조차도 모두 버려야 할 것인가.. 비슷한 가벼움이지만, 그 가벼운 선택이 극단적인 탐미주의자와 금욕주의자의 길로 정반대의 길로 나아가게 만든다. 조르바는 전자의 길을 선택하였다.

 

소설의 말미에 "나"는 모든 것을 상실한다. 모든 것, 모든 가치, 모든 생각이 멈춘 곳에서 진정한 자유는 시작한다. 자유를 말하는 순간부터 자유로움은 사라진다.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서 노력하면 할수록 자유는 우리 품에서 사라진다. 

 

아모르 파티, 카르페 디엠...

운명을 사랑하고, 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

그러나 정작 어려운 문제는,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즐겨야 하는가이다...

인생은 흘러갈 뿐이다... 어떻게 흘러가야 할 것인가... 항상 쉽지 않은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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