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인식하는 물질, 존재와 의식... 자연철학적 접근
가스통 바슐라르 본문
가스통 바슐라르(1884-1962)
우리가 흔히 칼 포퍼 혹은 토마스 쿤의 과학 철학은 비교적 아는 분들이 많지만 가스통 바슐라르에 대해서는 잘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실 과학 철학의 원조격에 해당하는 프랑스 철학자이다. 패러다임 전환으로 포퍼가 유명하지만, 실제로는 바슐라르가 원조이다. 이름이 독특하다. 가스통 ^^
바슐라르 본인이 즐겨쓰지는 않았지만, 타 철학자들이 많이 인용하는 거의 용어가 있다. “인식론적인 단절”이라는 용어이다 (실제 이 용어는 바슐라르 자신이 아니라 미셸 푸코가 강조한 것으로 나온다). 콩트 같은 실증주의자들은 과학의 역사를 연속적인 진보의 흐름으로, 거인의 어깨에서 살짝 앞으로 한발 한발 나아가서 점진적으로 개선되는 것이라고 바라보았다. 그러나, 바슐라르는 과학의 역사를 돌아볼 때, 오늘날의 시각에서는 상당히 비과학적인 내용이 상당히 오랜 기간, 주류 자연철학으로 자리 매김한 것에 주목한다.
뇌는 진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에 적합하지는 않다. 합리주의를 추구하기 보다는 합리화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자주, 외계인 손 증후군을 언급한 적이 있다. 사실 하고 싶었던 얘기는 증후군 자체가 아니다. 그 실험 과정에서 좌/우반구간의 연결을 절개한 환자들에게 (그래서 좌우뇌 간의 정보교류가 차단된 환자들에게) 재미있는 실험을 한다. 우측 눈이 못보게 좌측눈이 보이는 영역에 “물을 마시시오”라는 명령지를 둔다. 그러면 실험자는 물을 마신다. 이제, 우측 눈이 보이는 영역에 “당신이 물을 마신 이유를 설명하시오”라는 명령지를 둔다.
인간의 뇌가 합리성을 추구한다면 당연히 이때 답은 “잘 모르겠다”이다. 하지만, 인간의 뇌의 본질은 합리화를 추구하기에 “목이 말라서요”라는 얘기를 만들어낸다. 그래야 세상이 설명되고, 자신의 행동이 설명되기 때문이다. 즉, 뇌는 합리화를 추구하는 기계이다. 다 큰 성인에게 이런, 저런 얘기를 해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이유이다. 이미 그들은 믿고 싶은 것들만 믿을 뿐이다.
바슐라르의 의견에 따르면 과학의 진보에 있어서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발생한다고 얘기한다. 즉, 인간들에게는 제대로,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사고하기 어려운 인식론적인 장애들이 즐비하다는 것이다. 인간의 뇌는 제대로 제어가 안되면 망상을 하고 무엇인가를 계속 만들어내고, 없는 얘기에 대한 작화를 계속한다. 뇌가 편한 상태로 설명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인, 플라톤의 이데아, 천지를 순식간에 창조한 신, 곰이 마늘을 먹고 인간이 되었다는 구전… 이러한 것들이 상당히 오랜기간동안 진실처럼 믿어진 이유는, 바로 인간 자체의 근원적인 한계, 인식론적인 장애들 때문이다. 그는 “불의 정신분석”에서 이러한 “몽상에 의한 시적인 이미지”를 인식론적 장애물로 얘기한다.
그러나, 과학은 인간의 주관성, 뇌의 본질에 계속 의문을 던지면서 기존의 이론과의 인식론적인 단절을 추구해왔다. 과학의 발전에 때로는 앞선 거인들의 위대한 업적들이 큰 도움을 주지만, 때로는 이러한 기존의 완고한 이론들이 인식론적인 장애로 작용한다. 기존 이론으로 설명이 된다면, 정확히 이해가 안가더라도, 혹은 이론과 조금 틀린 내용이 목격되더라도 가능하면 그 체계 내에서, 그 이론내에서 이를 설명하려고 한다. 이러한 인식론적인 장애를 단절하고 인간의 창조성이 새롭게 발휘되는 과정을 통해서 과학은 진보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희안하게도 그는 그렇게 뜨지 못하고, 그의 이론을 차용한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 이론”은 빅히트를 친다.
사실 그가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데에는 당연히 계기가 있을 것이다. 20세기 초, 과학계에는 혁신의 바람이 분다. 1905년 아인슈타인은 특수 상대성이론을 발표하여, 종래 사람들이 도저히 상상하지 못한 도발적인 선언을 한다. 광속은 누구에게나 불변이고, 시간과 공간은 짬뽕이 되어 흘러간다… 또한 그 당시는 양자역학이 태동되어 에너지의 양자화를 얘기하고 1923년 드브로이는 물질 조차도 파동일 수도 있음을 얘기한다. 1927년 하이젠베르크는 불확정성의 원리를 얘기하며 철학과 과학 모두에게 거센 충격을 가한다.
실증주의자들은 이 모든 것들이 근본적 원리의 연속적인 확장으로 본데 반해 그는 그 당시의 혁신적인 과학의 발전은 종래의 과학과 직관의 관념과 단절하면서 진행한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인식론적인 단절이 과거와의 단절을 의미할 수는 없다. 그것은 이전의 내용을 자신의 새로운 이론안으로 포함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는 측면에서 연속과 단절의 이중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과학은 객관적인 진실을 얘기하는가? 일부 과학 신봉자들 중에, 현재의 과학적인 설명을 하나의 종교적 신념처럼 받아들이는 분들이 있다. 카오스 강연중에도, 양자 역학이야 말로, 세상의 본질을 설명하는 학문이고 그것이 실재이다라고 자신있게 주장하는 분들도 있다. 그러나, 바슐라르에게 현재의 과학이론은 본질적으로 절대적이고 객관적적인 것이 아니다. 객관성은 과학의 목표일 뿐이고, 현재 패러다임의 절대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그러한 목표에 좀 더 다가갈 수 있을 뿐이라고 얘기한다.
바슐라르는 과학철학 분야보다는 시학, 시 이론에 더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사실, 그 둘(과학과 시)은 정 반대를 추구한다, 즉, 과학은 과도한 망상과 상상을 제어하여 인식론적인 장애를 극복하기 위한 학문이며, 시는 망상과 상상을 자유롭게 허용하는 분야이다. 그는 “시의 축과 과학의 축은 우선 대립 관계이다”라고 얘기한다. 그러면, 과학의 객관성이 시의 주관성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냐? 일부 과학 만능주의자들은 그렇게 얘기하기도 하고 오늘날 인문학 무용론자들도 그렇게 얘기한다. 그러나 바슐라르는 둘 모두 소중하며 “철학”이 이 두축을 통합해야 한다고 얘기한다 (^^).
바슐라르는 그의 저서 “불의 정신분석”을 통해서 과학적 명증성을 방해하는 인간 의식의 주관성, 몽상적이고 이미지적인 사고, 즉 인식론적인 장애를 분석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는 불이 가져다 주는 시적 몽환성에 매료되어 주 종목인 과학철학에서 미학 분야로 관심을 돌린다. 그의 표현을 들어보면, “과학의 실용적 교육에서 철학교육으로 옮겨 왔는데도 완전히 행복하지 못하였다. 그 불만족의 이유를 찾고 있었는데, 디종의 한 학생이 “나의 살균된 세계”를 상기 시켜 주었다. 그건 하나의 계시였다, 살균된 세상에 생명력을 불러오기 위하여 미생물을 들끓게 해야 했고, 상상력을 회복시키고 시를 발견해야 했다”라고 얘기한다.
밴드에서 계속 객관적이고 수식으로 가득찬 매마른 과학 얘기를 계속하고 있다. 이것은 현대 과학의 설명을 정확히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일 뿐이며, 현대 과학의 설명이 세상의 본질, 근본적인 존재 원리를 설명하지 못하리라는 생각한다. 메마른 살균을 통해서 과학적 명증성을 확보한 후에, 다시 생명의 도래를 위하여 인문학적 오염(감성)이 필요할 것이다.
'철학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파울클레, 칸딘스키, 화이트헤드 (0) | 2021.09.25 |
---|---|
알튀세르 (0) | 2021.07.12 |
소칼, 지적 사기 (0) | 2021.04.28 |
살아있는 텍스트, 데리다 (0) | 2021.04.27 |
들뢰즈, 차이의 철학자 (0) | 2021.04.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