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인식하는 물질, 존재와 의식... 자연철학적 접근
알튀세르 본문
구조주의 철학자 알튀세르 (1918~1990)
구조주의는 기호와 언어로 생성된 자아, 주체를 대체한 구조등으로 인해서 주체의 주도적 역할이 상실된다. 이러한 구조주의의 보수적 이미지는 알튀세르에 의해 완화된다. 그는 평생토록 정신병에 시달리면서도 마르크스 주의를 재해석하고 쇄신하는 이에 전념했으며,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 이론적 기여를 한 전형적인 진보적 지식인이었다. 정신분열로 인해 아내를 살해하고 (1980), 여생(10여년)을 정신병원에서 보낸다.
18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인간의 역사는 우연적 사건 혹은 종교적 계시에 따라 흐르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역사학자들은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혹은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기술할 뿐이었다. 인간 이성이 발전함에 따라, 역사적 사실에서 보편적인 규칙을 찾고 필연성을 찾고자 하는 노력이 활발해졌고, 이것은 헤겔에 이르러 정점에 이른다. 인간 이성은 과거의 경험과 반성으로 부터, 미래에는 좀 더 나은 행동을 하려고 노력한다. 개개인의 이성은 또한 사회내에 보편적인 이성의 흐름을 낳게 되고, 그 이성의 흐름데로 사회는 진화한다. 이것이 이성의 시계지배라는 원리이고, 그러한 방향이 시대정신의 흐름이다.
이러한 본질주의적 세계관에서는 보다 발전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발전의 방향이 옳은 것과 퇴행적인 것등의 가치 판단이 가능해 지고, 만약 역사가 퇴행의 기미를 보이면 그것을 올바른 방향으로 돌려야 한다는 당위성이 부여된다. 헤겔에 있어서 신은 이러한 절대정신이며, 절대정신의 발현이 나폴레옹같은 위인들이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역사 발전의 원리에 기반해 봉건주의 사회에서 산업,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행을 설명하고, 결국은 자본주의 사회의 자체 모순에 따른 붕괴와 프롤레타리아 혁명, 계급과 국가의 소멸을 예측한다. 물론, 이 모든 예측은 완전히 빗나갔다.
이데올로기란 용어는 드 트라시가 1789년에 형이상학에 대비되는 과학적 관념론으로 주창되었으나 마르크스가 포이에르바흐등 자신 이전의 독일 관념주의(공상적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용어로 사용하고 특히 이를 자본가계급의 지배를 재생산(합리화)하는 허위의식으로 정의한다. 즉,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와 같이 어떤 (계급적) "정치적 이념"과 비슷한 용어가 되었다. 현재에도 이데올로기라는 용어는 단순히 어떤 관념을 나타내기도 하고, 정치적 "프로프간다"를 의미하기도 한다.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의 호명"으로 유명한 철학자이다. 그는 1970년에 발표한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라는 논문에서 그 개념을 소개한다. 그에게 이데올로기는 "대중들의 무의식적인 표상 체계"이다. 라캉의 무의식적인 대타자 위의 주체를 떠올리면 된다. 인간들은 누구나 자신이 토대로 한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배경에 의해서 생성된 무의식의 영향을 받는다. 누구나 자신의 자유의지로 의사를 결정짓는다소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이데올로기 혹은 내적 표상 체계에 따라서 사고하고 행동한다. 마르크스는 이데올로기가 국가나 지배 계급이 만든 허위 의식이라고 주장하지만, 알튀세르에게 이데올로기는 의식조차도 아니며 피할 수 있거나 타파할 수 있는 대상도 아니다. 인간들은 단지 호명될 뿐이다.
인간은 세상에 피투된다. 이미 세상의 다양한 관계, 권력관계의 지배를 받기에 이를 이데올로기의 호명 (interpellation)이라고 부른다. 이데아/구조/이데올로기는 보이지 않고 배경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를 의식하지 않고 자신이 자유로운 것처럼 행동하지만 실제로는 주어진 이데올로기, 대타자의 욕망에 길들여진 것이다.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는 우리가 항상 물질과 돈을 추구하도록 만든다. 자본주의의 호명인 것이다. 호명에 의해서 주체가 되기에(혹은 호명되는 상황에 의해서 주체로 규정지어 지기에) 그러한 호명을 주체가 스스로 거부하기는 쉽지 않다.
지금까지의 얘기를 듣고 떠오르는 몇몇 철학자들이 있을 지 모른다. 자신이 의식하지도 모르는 사이에 이데올로기에 호명된 주체에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는 없다" 라고 주장한 스피노자가 떠오를 것이다. 원인을 모르면서 날아가는 돌은 스스로의 의지로 날아간다고 생각할 수 있다. 스피노자는 인간들이 사물들에 의미와 목적을 부여하는 이유는 그 원인에 대한 무지때문이다라고 얘기한다.
또한 샤르트르가 그린, 실존적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자유로운 주체가 아니라, 자신이 호명당한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적이고 수동적인 존재로서의 주체이론에서, 언어의 의해 대타자와 분리된, 결여로서의 무의식적인 주체를 주장하는 라캉도 떠오를 것이다. 당연히, 알튀세르는 스피노자와 라캉의 영향을 받았다. 알튀세르를 분석한 여러 논문들이 있다. 그를 스피노자주의자로 볼 것인가, 헤겔주의자 혹은 라캉의 계승자로 볼것이냐에 따라 다양한 독법이 제시된다.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를 "자신들의 현실적 존재조건에 대한 개인들의 상상적 관계의 표상"이라고 한다. 개인을 주체로 호명한다는 것은 개인을 사회구조속의 특정위치에 자리잡게 함으로써 그 위치에 맡겨진 역할을 적절하게 수행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표상적 지식의 한계를 갖는다. 즉, 세계를 그대로 보지 못하고 이데올로기의 표상으로 보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착취과정이 이데올로기에 은폐되어 있기에 근본 모순을 자각하지 못한다. 자본가의 음모도 노동자의 무지도 아니다. 생활상에 무의식적으로, 시스템에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세상을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왜곡된) 표상을 통해서만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이렇게 자신이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사회적 관계속에서, 이데올로기의 호명으로 생성된 주체는 본인이 호명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따라 주체적으로 행동한다고 착각한다. 이러한 은폐된 이데올로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주체의 인식능력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 호명의 바깥에서 사유하는 것이필요하다.
호명은 큰 주체(Party)가 주체를 인지하는 과정, 개인이 사회구조속에 발을 들여놓는 과정이다. 작은 주체가 큰 주체를 인지하고 그에 대해 수긍하면 주체가 완성, 호명이 완성된다. 이 과정에서 저항이 가능하다.가장 명확한 방법은 이데올로기의 파괴, 계급 투쟁의 길이라고 얘기한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호명된 주체가 어떻게 이데올로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구조주의 내의 주체는 어떻게 그 구조를 탈피할 수 있을까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부딪힌다. 사실 이것은 구조주의 철학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구조에 의해서 수동적으로 생성된 주체가 어떻게 그 구조를 개선할,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있나?
주체는 구조에 의해서 생성되지만, 구조를 수용하는 그 무엇으로서의 주체가 존재한다. 그러면 그 무엇 또한 구조의 영향을 받았어야 하고.. 무한역행의 순환논리에 빠질 수도 있는 쉽지 않은 문제이다. 아래 왼쪽 그림은 거울안의 거울 영상을 통해서 이러한 끝없는 순환관계를 표현하는 크레모니니(Leonardo Cremonini, 1925-2010)의 "욕망의 등뒤에서"라는 작품이다. 초현실주의 작가인 에셔(Maurits Cornelis Escher, 1898~1972)의 "오르내리기", "서로를 그리는 손"도 순환적 구조를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알튀세르 이후 이 후 발리바르, 바디우, 랑시에르 그리고 지젝같은 여러 철학자들이 이러한 문제를 비판하고, 주체 이전의 주체(개인), 주체의 자기 초월 가능성을 얘기한다.
알튀세르의 이론은 구조주의 몰락과 함께 (거의) 폐기처분 상태이다. 지젝을 비롯한 많은 철학자들이 그의 이론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막시즘의 유령은 인문학에 아직도 뿌리깊게 내려져 있다. 알튀세르는 구조주의 이론을 적용하여 막시즘을 새롭게 해석하고 현대에 맞게 살리려 했고 오늘날에도 여러 알튀쉐리안들이 그 명맥을 이어가지만, 별로 효과적이지는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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