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인식하는 물질, 존재와 의식... 자연철학적 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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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

돈오돈수, 돈오점수

existence_of_nothing 2021. 11. 5. 16:06

 

 

불교는 종교로서도 철학적으로도 흥미있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존재론과 인식론, 윤리에 관한 다양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석가모니의 원래의 깨달음이 구전을 통해서 전승되면서, 그리고 언어적 자아를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한계로 인해서 그의 사후, 수많은 자신들만의 해석이 부파불교를 양산하였다.

 

상좌부, 대중부 논쟁을 거치면서, 그기에 힌두 브라만 사상까지 가미되면서 생성된 불교적인 내용이 원래 석가모니가 설한 것인지, 그것을 오해한 것인지, 논쟁이 치열하였고, 항상 그렇듯이, 위대한 인물의 사후에는 그에 대한 신화가 만들어지기 때문에 원래의 내용은 더욱 더 각색되게 된다. 수많은 이론과 논쟁이 있었지만, 실험을 통한 반증이 불가능한 형이상학적 내용에 대한 합의는 도출되지 못하였고 그 논쟁은 오늘날, 최근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마음으로 깨달아야 하는가 아니면 머리의 도움으로 깨달아야 하는가, 한번 깨달으면 깨달은 것이냐, 아니면 지속적으로 깨달음의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가, 선종이냐 교종이냐의 논쟁은 예전부터 있어왔다.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1158-1210)은 돈오점수, 즉, 깨달은 이후에도 정진이 계속 있어야 한다는 것을 얘기하고, 태고국사 보우(1301-1383)은 점수가 필요한 돈오는 완전한 깨달음이 아니며, 완전한 깨달음 후에는 더 이상 깨달음을 추구할 필요는 없다고 얘기한다. 법정 스님은 돈오점수를 얘기하고, 성철 스님은 돈오돈수를 얘기한다. 돈오는 깨달음을, 점수는 수행을 의미한다. 

 

두 분의 깨달음은 같은 깨달음인가, 다른 깨달음인가... 만약 진리가 하나라면 왜 깨달았다는 이들이 모두 다른 주장을 하는 것인가.. 깨달음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깨달음인가, 아니면 인간 내면에 본질로서 존재하는 보편적인 여래장이 유도하는 보편적이고 일치된 깨달음인가... 어려운 문제이다. 

 

2016년 우리나라의 가장 큰 종파인 조계종 교육원장 "현응 스님"이 "깨달음의 역사"발간 25주년 기념 학술 세미나에서 이 뜨거운 감자인 "깨달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강연하면서 잠시 뜨거운 논쟁을 유발한다. 

 

모든 것이 공하고, 공하다는 마음조차도 공하다면 공하다는 것을 공한 마음으로 깨닫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의미인가, 마음이 공인데, 마음을, 마음으로 깨닫는 다는 것이 가능은 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결국 솔직히 얘기하면 우리가 깨닫는 것은 경전에서 부처님이 말한 그 의미를 깨닫는 것이라고 coming out을 한 것이다. 

 

한국 조계종은, 선불교.. 특히 돈오돈수를 중요시하는 남선종 계열이 지배적이고, 기본적인 수행법이 불경의 이해를 통한 교종적인 이해가 아니라, 화두를 붙잡고 계속 마음을/으로 깨닫는 것, 언어적인 수단보다는 비언어적인 수단을 강조하는 "간화선"이기에 현응스님의 이 돌발적인 outing은 종파내에서 격한 반대에 부딪힌다. 부산 범어사 주지인 "수불 스님"은 바로 현응 스님은 깨달음에 이르지 않았기에 이상한 소리를 한 것이라고 반박하며 깨달음은 말을 떠난 언어도단의 세계, 마음의 작용이 사라진 심행처멸의 경지라고 반박한다. 

 

불교학자인 한자경 교수는 현응스님의, 공으로서 자성이 없는 마음으로 깨달음을 구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에 관한 기고문을 내는데, 여기서 그는 염오심에 물든 변화하는 마음이 아니라, 모든 중생에게 내재하고 있는 불멸불생의 불성, 여래장 혹은 진여, 일심으로서의 마음으로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진여/여래장 논쟁을 불러 일으킨다. 한교수의 주장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아래 링크에 그의 주장이 나타나 있다.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dlpul1010&logNo=220599906686

 

아공법공, 모든 것은 연기 작용에 의해서 잠시 상을 맺은 것이며, 우리의 마음 조차도 자성이 없는 공이라면, 도대체 공한 것을 공한 것이게 존재하게 하는 그것은 공한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 만약 마음이 공하다면 마음조차 도려낸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은 실재하는 것인가 실재하지 않는 것인가? 만약, 여래장/진여/우주심이 불멸불생의 본질적인 존재로 세상에 존재한다면 마음도 공하다는 석가의 얘기는 어떻게 된 것인가?

 

철학/불교학자인 홍창성 교수와 박용태 교수는 한자경 교수의 주장을, 형식적으로는 다르지만 일정부분 힌두 사상의 영향을 받은 브라만/아트만을 기반으로 하는 본질주의적 주장이라고 주장하며 그것은 석가모니의 초기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여래장은 우리 모두가 깨달을 가능성이 있다는, 근본적으로 해탈이 가능한 존재라는 가능성의 개념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그러한 유명(이름)으로서 존재하는 보편적인 개념이 실재하는 것으로 착각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에 관심이 있다면 아래 링크들을 쫓아가 보시면 된다.

http://www.mediabuddha.net/m/news/view.php?number=17641

http://www.mediabuddha.net/news/view.php?number=17614

 

이러한 논쟁들이 발생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철학적이면서 동시에 종교적인 성격을 띤 불교의 이중적인 모습 때문일 것이다. 원래 부처의 주장은 모든 형이상학적인 불필요한 논쟁을 접어두고, 자신의 마음이 어떻게 동작을 하는지를 잘 살펴보고, 자신의 괴로움의 실체가 실제로는 마음이 만든 상에 불과한 것임을 깨달아서 괴로움에서 벗어나라는 얘기였을 것이라 추측한다.

 

사실, 초기 경전의 내용은 오늘날 물리학/뇌과학적 관찰 결과와도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으며 따라서 포항공대 강병균 교수 같은 초기불교 옹호자 혹은 나같은 공돌이들도 쉽게 이해를 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그러한 공으로서의 "나", 무아인 내가 짓는 업의 의미는 무엇이고, 그러한 업이 윤회를 하는 것이 나와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느냐, 왜 우리는 착하게 선업을 쌓아야 하느냐라는 질문에 대해서 무아론만으로 답변이 쉽지 않다. 그러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인간들은 견뎌낼 수 없기에, 인간들은 다시 윤회의 주체로서의 본질을 찾게 되고, 결국 아뢰야식, 여래장, 진여라는 개념적 존재를 만들어 낸 것으로 추측한다. 이부분 부터는 형이상학, 믿음의 영역이기에 논쟁을 통해서 합의에 이르기는 어려워진다. 

 

동양 불교 철학의 논쟁들을 바라보면서, 오래전부터 서양 철학에서 격한 논쟁을 불러온 본질주의냐 상대주의냐, 주관주의냐 객관주의냐, 관념론이냐 경험론이냐, 유명론이냐 실재론이냐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한편으로는 아이러니컬하고, 한편으로는 재미있기도 하며, 한편으로는 언어적 존재의 한계를 바라보는 것 같기도 하다. E=mc^2이라는 법칙은 법칙으로서 존재한다. 그러면 E=mc^2을 그것이게 하는 그것은 존재하는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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