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인식하는 물질, 존재와 의식... 자연철학적 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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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타키온 입자

existence_of_nothing 2021. 9. 15. 12:16

 

시간과 공간에 대한 사유는 물리학과 철학 모두에 있어서 가장 난해한 아포리아(aporia)중 하나이며, 가장 궁극적으로 이해하고 싶은 주제일 것이다. 많은 이들이 시간이란 실재하는 것인가, 시간의 본질은 무엇일까에 대해서 오랫동안 사유해 왔다. 오랜 시간동안 인류는 절대적인 시간과 시간축과 수직을 이루는 공간, 주어진 시공간의 배경하에서 물질과 에너지는 흘러가는 것으로 이해해왔다.

 

근대와 현대에 들면서 이러한 시간의 본질적 구조는 깨어졌다. 인간들은 4차원 시공간상에서 항상 동일한 속도, 광속으로 이동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가 사물을 어떤 면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시간과 공간은 다른 모습을 취하고, 블랙홀의 내부에서는 우리가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이 공간으로, 우리가 공간으로 부르는 것이 시간에 해당한다. 

 

양자 역학은 우리가 아주 좁은 공간을 바라보면, 그 공간의 에너지 스펙트럼은 아주 넓어지고,  따라서, 입자의 에너지는 무한대로 치솟을 수 있다고 얘기한다. 불확정성의 원리이다. 일반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에너지는 공간을 휘게 하고, 따라서 아주 좁은 영역에서의 에너지의 집중은 때로는 블랙홀을 이룬다. 두 사고를 결합하면, 아주 좁은 영역안의 세상은 블랙홀이 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우주 초기에 아주 좁은 곳에 엄청난 에너지가 몰려있었다면, 그것이야 말로 블랙홀이고, 자체의 수축력에 따라 시간과 공간이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이러한 거친 묘사, 단순한 논리로는 좁은 공간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휠러라는 물리학자, 그리고 다른 몇몇은 시간은 없을지 모른다고 얘기했다. 움직임의 연쇄 반응을 우리는 관측하고 이것에 시간이라는 의미를 붙인 것이라고 말이다. 로벨리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라는 책에서는 우주 전체의 슈뢰딩거 방정식인 휠러-더윗 방정식에서 시간항이 없다는 것을 화두로, 시간 혹은 공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물체의 주변에 배경처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화두를 제시한다.

 

초끈이론은 초대칭(supersymmetric)에 입각한 페르미온을 중심으로 우주의 본질을 얘기한다. 초대칭은 페르미온과 보존간의 대칭성을 얘기한다. 우리가 물질이라고 부르는 것과 우리가 힘 혹은 물질들간의 관계라고 부르는 것들이 실제로는 서로 대칭관계에 있는, 따라서 서로 모습을 달리할 수 있는 존재라는 가정이다. 물론, 초대칭 이론은 현재 운명이 풍전등화이지만 재미있는 철학적/과학적 상상이다. 그러나, 원래의 끈이론은 보존 입자에 대한 묘사에서 시작했으며, 이러한 초기 끈이론을 전개하면 항상 타키온 입자, 빛보다 더 빠른 입자가 출현하게 된다. 

 

타키온 입자, 빛보다 더 빠른 존재가 있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빛보다 더 빠른 존재는 인과관계를 무너뜨리기 때문에 우주에 대한 우리의 인식론을 한꺼번에 무너뜨릴 수 있다. 빛에 아무리 가까운 속력이더라도, 빛보다 느리다면 과거는 항상 과거이고, 미래는 아주 출현하지 않는다. 그러나, 타키온 입자가 존재하면, 우리가 어떠한 면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미래가 과거에 선행하게 된다. 

 

흔히들 인간들은 자유의지를 가졌다는 점에서 다른 모든 생명체와 차별화가 된다고 얘기한다. 뇌과학적 많은 실험들은 자유의지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제시하고 있고, 아마 반반 정도의 비율로 과학자들 중, 자유의지가 실재하는지에 대해 의견이 갈릴 지 모른다. 자유의지의 부재에 관해서 흔히들 착각하는 것이, 우리의 의식이 기계론적으로 작동, 즉, 어떤 상황이 주어졌을 때 항상 기계적으로 동일한 선택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우주의 존재와 생명 현상에서 확률적 무작위성이 있음은 오늘날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자유의지의 존재의 문제는  인간이 deterministic machine이냐 stochastic machine이냐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의지라고 부르는 물리현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이 존재하느냐의 문제이다. 그렇게 문제를 정의한다면 나의 대답은 인간의 자유의지는, 인간에 대한, 의식에 대한, 결정 과정에 대한 우리들의 무지, 그로 인해서 나타나는 확률적 특성에 대한 환상이라고 생각한다.

 

타키온 입자가 실제로 발견된다면, 혹은 인간들이 결국 타키온 입자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자유의지에 관해서 논의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지 모른다. 시간의 흐름과 이에 따른 인과 관계, 인과적 행위에 대한 주체의 자유로운 결정이 모두 사라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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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플란다스의 개를 보고, 그 마지막 결말을 알고서 묘한 슬픔에 빠진적이 있다. 그 당시에는 흙수저의 비극, 자본주의 사회의 어두운 측면등에 관한 생각은 없었고, 그냥 착하게 순수한 네로와 충실한 개 바트라슈의 죽음이 슬펐을 뿐이다. 원작은 1872년 Ouida(가명:Marie Louise de la Ramee)라는 영국인 여성이 만든 소설이고, 그 소설에서 네로는 구원을 받지만, 1975년 쿠로다 요시오 감독의 결론에서 네로는 평생동안 보고싶어했던 루벤스의 그림앞에서 바트라슈와 함께 동사한다. 

 

원작의 결론은 happy ending이지만 감동적이지는 않은데 반해, 요시오 감독의 결말은 철저히 현실적이고, 너무나 비극적이지만 큰 감동을 준다. 벨기에 플랑더르의  "호보켄"마을이 배경이지만, 정작 그곳 사람들은 어느날부터 몰려든 일본인 관광객들에게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네로가 그토록 보고싶어했던 그림은 안트베르펜 성모대성당의 루벤스(1577-1640)의 "승천하는 성모 마리아"였다. 루벤스는 17세기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벨기에 화가이며, 외교관이자 사업가이면서 동시에 화가로 활약하였다. 

 

미술사에서 루벤스로 대표되는 색채파와 푸생으로 대표되는 소묘파의 17세기말의 색채논쟁은 유명하다. 자연을 잘 묘사하기 위해서 소묘, 스케치가 중요하냐 아니면 색채의 조화가 더 중요하냐... 사실, 둘 다 미술에 있어서는 없어서는 안될 요소겠지만, 소묘파의 입장에서는 빛에 따라 항상 변화하는 색채는 자연을 묘사하는데 비본질적인 요소로 취급되었다. 

 

그리스/로마/비잔틴 미술이후, 중세 암흑기에 대한 반발로 16세기 이탈리아 피렌체를 중심으로 르네상스가 발생한다. 다빈치(1452-1519), 미켈란젤로(1475-1564), 라파엘로(1483-1520)로 대변되는 르네상스 시기 후, 17세기에 화려하고 과장된 기풍의 바로크(Perola barroca, 일그러진 진주라는 포르투칼어에서 기원)시대가 열린다. 신교와 구교의 종교전쟁의 와중에 남부에서는 구교에서 성화를 통한 권위 회복을 위해서 화려하고 과장된 기풍의 그림들이 유행한다. 카라바조(1573-1610), 렘브란트(1606-1669), 루벤스(1577-1640), 벨라스케스(1599-1660), 베르메르(1632-1675)등이 바로크를 대표하는 화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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