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인식하는 물질, 존재와 의식... 자연철학적 접근
카메라와 미술사 본문
카메라라는 말은 (Camera obscura, 라틴어로 "어두운 방")를 칭한다. 좁은 방에 구멍을 뚫고 그 빛을 통해서 외부 사물을 비추면 상하좌우가 역전된 영상이 벽에 비치는 것에서 나온 말이다. 이미 기원전 4세기 묵자의 "묵경"에도 그 원리가 나오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 "자연학적인 문제들", 이븐 알하이삼의 "광학의 서"에서도 언급된다.
인류는 오래중세에 계기일식등을 관찰할 때 사용하는데, 다빈치가 옵스큐라 이론을 상세히 정리하여 "코덱스 아틀란티쿠스"라는 책에서 작동 원리를 상세히 설명하고, 이를 미술의 원근법의 원리를 파악하는데 이용한다.
1558년 이탈리아 과학자 "포르타 (1505-1615)는 저서 "자연의 마술"에서 화가들이 이를 이용할 것을 권장하고, 실제 베르메르의 "우유따르는 여인"등 홀바인의 "대사들" 등 빛을 잘 이용한 몇몇 작품들은 그러한 옵스큐라 기법을 사용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산업 혁명 이후, 부르조아 계층이 양산되고 이들의 문화 욕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기존의 그림으로 그 수요를 감당하기 어렵자, 먼저 판화를 통해서 대량생산을 시작한다. 판화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현존 가장 오래된 판화는 868년 당나라 말에 만들어진 "금강반야경"의 "석가설교도"라고 한다. 당/송/명/청대에 판화는 이미 널리 보급되었고 2세기에 중국에서 시작한 제지(종이) 기술이 14세기에 유럽에 전파되며 목판화, 이후 금속 판화로 진화한다. 현존 가장 오래된 서양 목판화는 1423년 "성 크리스토퍼"라고 추정된다.
1827년 프랑스의 조제프 니엡스의 헬리오그래피, 1839년 다게르등의 은판사진 기반의 사진기를 발명하면서 회화의 역사에 일대 변혁이 발생한다. 이전의 옵스큐라가 화가를 보조했다면, 사진기는 자연을 자세히 묘사하는 화가의 본질적인 부분까지도 침범했기 때문이다. 이제, 자연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의 의미가 사라지게 되고, "세잔"은 이러한 변화와 화가들의 본업의 변화를 정확히 파악한다. 아래는 1827년 세계 최초로 조제프 니엡스가 장장 8시간의 노출끝에 촬영한 세계 최초의 사진이다.
다게르(1787-1851)는 카메라 옵스큐라를 이용하여 자연 풍경을 그리던 화가였고, 사업적으로도 승승장구한다. 좁은 구멍을 통해 역상으로 비치는 영상을 그대로 따라 그리던 중, 벽에 비친 그림을 그대로 종이로 옮길수 있다면... 하는 생각을 한다. 우연히 니엡스의 사진에 관한 얘기를 듣고 10년 장기계약으로 그를 스카우트하지만 계약기간중 4년을 남기고 니에프가 사망하고 혼자서 연구를 이어가 1937년, 9년만에 "다게레오 타입"이라는 획기적인 신 기술 개발에 성공한다.
니엡스의 "헬리오그라피"는 역청에 빛을 쪼인 후, 라벤더 오일로 이를 지우면 빛을 받은 부분은 그대로 굳어서 남고, 나머지 부분만 제거되기에 태양의 그림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8시간의 노출이 요구되는 오랜 과정이기에 일단, 흔들리는 풍경, 움직임을 묘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게르는 이를 개선하여 요오드화은을 이용한 "다게레오 타입"기술을 개발하여 노출 시간을 20분으로 줄여서 본격적인 카메라의 시대를 연다. 아래 사진을 보면, 니엡스의 최초 사진과는 비교 불가의 해상도를 보인다.
다게레오 타입을 간단히 정리하면,
1. 구리(Cu)판위에 은판(Ag)을 도금하고 거울처럼 반짝반짝 가공
2. 요드(Iodine)와 반응하면 표면에 요오드화은(AgI)이 생성
3. 이것을 카메라 옵스큐라 방에 두고 빛에 감광,
4. 빛이 닿은 부분만 요드가 증발하여 은으로 환원 (AgI-->Ag), 이 과정이 노출
5. 수은 (Hg) 증기로 은을 아말감화 (Ag-->AgHg), 빛을 받은 부분이 밝은 "양화"
6. 정착액(sodium thiosulfate)으로 고정하여 더 이상의 화학반응을 멈춤, 이 과정이 현상
다게레오 타입은 20분의 노출만 필요하고 해상도는 오늘날의 기준에서도 뛰어났지만, 그 20분동안 모델은 꼼짝도 할 수 없었기에 그 당시 찍은 초상화들의 인상들이 별로 좋지 않다고 한다. 또한, 필름에 노출한 후, 종이에 현상하는 기술이 아니라, 감광판 그대로 현상을 하기에 대량 생산도 불가능하다는 단점, 그리고 수은 증기의 유독성등 다양한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그러나, 한해에 미국에서만 300만장이 소비될 정도로 폭발적으로 유행한다.
1882년 뉴욕 로체스터 은행의 서기로 일하면서 사진을 즐기던 조지 이스트만(1854-1932)이 세계 최초로 필름에 감광하는 기술을 개발한 후, "이스트만 코닥"이라는 회사를 설립한다. 1887년 세계최초의 휴대용 사진기를 만들고 "You press the button.. we do the rest"라는 캐치 프레이즈로 소비자는 사진을 찍고, 필름만 보내면 사진을 보내주는 사업을 시작한다. 카메라=코닥의 공식을 만들고 사업가로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지만, 독신의 외로운 이스트먼은 1932년 "이제 더 이상 할일도 없고, 사는 의미가 없다"라는 유서와 함께 자살한다.
1975년 코닥은 세계 최초의 디지털 카메라를 발명하지만, 이것이 자신들의 주요 사업수단인 "필름"시장을 잠식할 것을 우려해 쉬쉬하고 아시다시피 오늘날 2012년 파산신청을 한다. 자신들의 OS(운영체제) 심비언이 잠식당할까봐 스마트폰을 외면한 노키아, 디자인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보이다 소프트웨어 역량을 잃어버린 LG 전자등, 가진 것이 많은 이들이 기득권에 집착하다 한순간에 몰락한 많은 예들이 즐비하고, 코닥도 그 중 하나의 사례로 기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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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기의 발명으로 더 이상,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그림은 그 의미를 잃어버린다. 이것은 화가들의 밥그릇을 뺏는 계기가 되면서 동시에 그들에게, 회화의 본질 자체를 재인식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그들은 더 이상 사물의 외관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주관적으로 느끼는 색채, 질감, 사물의 본질등에 대해서 충실해 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래는 1872년 모네(1840-1926)의 "인상, 해돋이"이라는 그림이다. 항구에서 해가 뜨기만을 기다렸다가 순식간에 뜨고 사라지는 해돋이의 순간을 그린 것이다. 이전까지, 그림같은 그림만을 보던, 최소한 성의는 느껴지던 그림을 주로 접했던 부르주아 상류층들에게 이 그리다 만것 같은 그림, 걍 얼핏보고 슬쩍 그린 스케치 같은 그림을 "인상주의"라고 이름 붙인다.
모네에게 순간 순간의 빛의 변화는 무엇보다 중요한 주제였다. 서른두살의 나이에 죽어가는 부인 카미유의 죽음을 슬프하면서도, 죽어가는 아내에게서 느껴지는 빛의 변화를 그림으로 표현한다. 1879년 "임종을 맞은 카미유"라는 작품이다.
그리고, 부유하고 공부 잘하던 칸딘스키를 매혹시켜 법학자에서, 한 순간에 화가로 변신하게 한 작품 "건초 더미"(1890)도 모네의 작품이다. 1894년부터 1890년까지 비슷한 건초 더미를 주제로 빛의 변화를 연작 형태로 남긴다.
모네와 비슷한 시기에 이름도 비슷한 절친 화가 마네가 있다. 마네는 모네보다 8살 연상이고 모네가 활동을 시작한 시기에 이미 명성이 자자한 화가였고 처음에는 자신과 이름도 화풍도 좀 비슷한 모네를 사람들이 혼동하는 것에 불쾌감을 느낀다. 그러나 1869년 한 카페에서 만나게 된 그들은 그 이후, 절친 사이가 된다.
1863년 파리 미술전 낙선자 전시회에 에두아르 마네(1832-1883)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라는 충격적인 작품이 전시된다. 벌거벗은 여인과 그 주위의 신사들, 비록 평소 그들의 생활태도였겠지만, 허위의식의 부르주아 대중들이 미풍양속을 해친 그림이라고 난리를 친다. 마네는 그들의 가식을 여인의 벗은몸과 그녀를 스폿라이트처럼 주변의 검색과 대비시켜서 솔직하게 드러낸다.
또다른 대표작 "올랭피아"(1890)이다. 알렉상르러 뒤마 피스 (삼총사, 몽테크리스토퍼 백작을 쓴 뒤마의 아들)의 소설 "춘희"의 주인공이자, 당시 매춘부를 상징하던 "올랭피아"가 도도하게 정면을 응시한다. 원제는 "고양이와 함께 한 비너스"였다. 아래는 올랭피아를 그리기 위하여 참조한 1532년 이탈리아 화가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그림이다. 솔직히, 아래 그림을 보다가 위의 그림을 보면, 좀 짜증이 나기도 한다. 당연히 위의 그림을 보고 격분한 많은 이들이 그를 비난한다.
마네를 흔히 인상주의의 아버지 혹은 근대 미술의선구자라고 한다. 별로 인상파의 화풍같지도 않고, 실제로 인상파들의 전시회에 작품을 전시한 적도 없었지만, 도발적이고 자유로운 화풍, 그리고 인상파 화가들에게 물심양면으로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기에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