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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역사 요약 본문
고대 서양사의 이해는 그리스와 로마의 이해로 이루어진다. 이번에는 로마의 역사에 대해서 초간단 정리를 해 보자. 아마 밴드에서 가장 많이 다루어진 역사가 로마사일 것이므로 상세한 설명은 생략하고 단지 다음 얘기를 위한 remind 정도로만 초간단/요약 정리한다.
로마 신화는 BC753년 늑대소년인 로물루스(Rome의 유레)가 동생 레무스를 죽이고 시작한다. 좀 없어 보였던 듯, 나중에 베르길리우스는 좀 더 멋있게 트로이의 영웅 아이네이아스(Aeneas)가 유민을 이끌고 건국했다고 포장한다. 그리고 그리스 신화를 배끼는데 면이 안 섰던지 신들의 이름만 싹 바꾼다(제우스->쥬피터, 포세이돈->넵툰, 하데스->플루토 등등). 정치제도도 그리스의 행정관대신 집정관, 귀족회의 대신 원로원을 둔다. 그 외 평민들로 구성된 호민관이 귀족의 권력을 견제한다.
로마의 역사는 끊임없는 전쟁과 정복의 역사이다. 해상무역 중심의 그리스와 달리, 농경을 위한 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먼저, BC264~146년(80년) 포에니 전쟁을 통해서 카르타고를 멸망시킨다. 1차전(BC264-241,23년), 2차전(BC218-201,18년) 한니발 대 스키피오, 3차(BC149-146, 3년)전으로 카르타고는 지도에서 영원히 사라진다. 3차전의 잔인함은 “선한전쟁은 없다”는 말을 떠올린다.
BC133~122년 호민관 그라쿠스 형제의 농지개혁이 실패한다. 마리우스(107년), 술라(BC88)의 뒤를 이어 노예 스파르타쿠스의 난을 제압한 폼페이우스가 크라수스와 집정관에 오르고(BC70), 이어서 카이사르와 삼두정치를 시작한다(BC60). 카이사르는 샤를마뉴/나폴레옹과 유럽의 3대 정복자로 불린다. 그는 켈트족을 갈리아(프랑스)지방에서 몰아내고 영국까지 영토를 넓힌다.
원로원은 그를 두려워하여 BC50년 군대해산을 명하지만 주사위는 던져졌다며 루비콘 강을 건넌다. 폼페이우스를 쫓아 이집트를 정복하고 BC47년에는 파르티아(BC250-AD226, 걍 간단히 페르시아쯤 됨.)군과 맞서 “veni, vidi, vici”세마디만의 멋있는 승전보를 전하지만 BC44년 독재관에 오르자마자 암살된다.
혼란을 잠재운 옥타비아누스부터 제정이 시작되어 아우구스투스(BC27-AD14)->티베리우스(14-37)->칼리굴라(37-41)->클라우디우스(42-54)->네로(54-68)를 거친후 오현제(96-180)때 POX-ROMANA 전성기를 구가한다. 아래 사진들의 전성기 로마(위)와 마케도니아(아래)의 영토를 비교해 보자.
이제, 유대의 이 당시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자. BC66-61년에 폼페이우스의 동방원정에서 팔레스타인은 로마제국에 편입된다. 이 때, 유대인도 아닌 이교도 출신의 헤롯(BC37-BC4)이 왕에 오르고 성전 재건을 시작한다. 그의 사후 반란이 잦자 로마에서 총독을 파견하는데 빌라도(AD26-36)가 5대총독이었다. 예수 탄생 시점(BC4년 전후)의 유아살해를 지시한 것은 헤롯1 세, 예수를 처형한 것은 헤롯 안티파스로 다른 인물이다.
로마 지배 초창기에 로마가 유일신만을 고집하는 유대 속주를 핍박하자 유대인들은 반란을 일으키고(66-73, 1차 유다-로마전쟁) 나중에 황제(79-81)가 된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성전을 파괴 후 “통곡의 벽” 한쪽면만 남겨둔다. 73년, 마지막까지 저항하다가 천명이 집단 자살한 “마사다 항전”을 끝으로, 나라 잃은 유대인들은 로마제국 전체로 퍼져 나간다 (디아스포라). 베수비오 화산 폭발(폼페이멸망)도 이때이다.
오늘날 기독교의 교리는 정확히는 예수가 직접 얘기한 내용은 아니다. 예수는 자신이 정확히 누구이고 자신의 생각은 무엇인지를 체계적으로 얘기하지 않았다. 예수 사후(64-100년) 마가복음을 필두로 여기저기서 “카더라”라는 얘기를 적기 시작한다. 실제, 363년 열린 59차 라오디게아 공의회와 397/419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27권의 정경(canon)을 확정하기 전까지는 위경과 정경의 구분 조차 없었다. 카톨릭과 개신교는 각각 46/39권의 구약을 인정하기에 각각 73/66권의 성경을 각자의 정경으로 본다.
예수를 구경도 못한 “바울 서신”이 신약성경 중 권수 기준으로 전체의 절반을 차지한다. 원래 로마 자유인으로 유대인을 핍박하고 다니던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던 중 “왜 나를 괴롭히느냐?”라는 예수의 음성을 듣고 기독교로 개종 후, 베드로와 함께 수많은 곳에서 전교하면서 초기 교회 조직을 체계화한다. 그 둘은 로마 방화 사건 때 네로에 의해서 처형된다.
영원한 천국의 이데아를 꿈꾸는 이들에게 현세의 고통과/죽음은 큰 의미가 없다. 기독교는 갖은 박해에도 평민/노예를 중심으로 세력을 키워서 3C말에는 전체 로마인들의 10%의 비중을 차지한다. 콘스탄티누스1세가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한 것은 서구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일 것이다. 이와 함께 391년 테오도시우스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음으로써 유럽 전체에 기독교 사상이 퍼지게 된다.
초기에는 기독교 교리가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는데 가장 큰 issue는 예수를 어떻게 positioning 할 것인가 였다. 콘스탄티누스가 자비로 개최한 제 1차 니케아 공의회(325년)에서 아타나시우스파는 삼위일체에 반대하던 아리우스파를 몰아낸다. 그러나 중세 초기까지도 그 세력이 남아있다가 카룰루스 대제에 의해서 사멸된다. (예수는 왜 마지막 순간에 “주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는 전혀 불필요한 말을 했던 것일까?)
4~5세기경 유럽에 뜬금없이 나타난 훈족에 대한 여러 얘기가 있다. 그들은 제대로 된 언어도 문자도 없고,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도 않았기에 문명(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게르만(고트족)전사들조차 혀를 두를 만큼 무시무시한 그들(아틸라왕)에게 쫓겨 서고트족들이 남하했고 이들과의 전쟁에서 로마는 패하여 영토를 허락하고 다수를 로마 용병으로 채용한다. 계속 되는 혼란으로 한심한 나라 꼴을 보다 못한 용병 장군(오도아케르)은 AD476년, 로물루스 황제의 견장을 떼어내고 서로마(395년 테오도시우스에 의해서 동/서 로마로 분리)제국을 해체한다. 이제 유럽은 중세 사회로 접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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