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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서양 중세사 요약

existence_of_nothing 2021. 3. 11. 17:43

 

유럽 중세사를 간단히 정리해 본다. 초간단 정리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관련 민족이 너무 많았다. 여러권의 서양사 책과 인터넷 자료들을 찾으면서 공부한 내용을 그냥 스스로 정리한 내용일 뿐이니 조금 산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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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프랑크 왕국 건립(481-843): 메로빙거 왕조 시작.

 

로마 멸망후(AD476) 켈트족(클로비스)이 갈리아(프랑스) 지방에 프랑크 왕국을 세우고 메로빙거(혹은 메로베우스) 왕조(481-751)를 연다. 당시 게르만족이 아리우스파였으나 클로비스는 로마카톨릭을 지지한다. 그러나 형제에게 땅을 나눠주던 관습을 따르던 프랑크 왕국은 8세기 중반까지 통일 왕국을 유지하지 못한다. (통일후 자식들에게 나눠주고, 저들끼리 싸워서 통일하면 또 나눠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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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슬람 제국 건립

 

6C 후반 페르시아와 동로마제국간의  전쟁으로 기존 무역로가 막히자 메카(현 사우디)가 새로운 무역중심지로 성장하고 카라반 중심의 무역이 성행한다. 마호메트는 부유한 과부 하디자와 결혼한 후 히라산 동굴 명상 중 가브리엘을 만나 전해들은 알라의 계시를 전한다. 지배층이 이슬람을 핍박하자 그는 군사를 일으켜 630년 메카와 사우디를 정복한다. 이후 사산왕조페르시아(208~651, 조로아스터교(배화교)숭배)를 651년 멸망시키고 주변으로 세력을 확장한다.

 

마호메트의 후계자를 두고 친구이자 장인인 아부바르크를 추대하는 수니파와 사촌인 알리를 지지하는 시아파로 나뉜 싸움은 4대 칼리프인 알리의 암살사건을 두고 철천지 원수지간으로 벌어진다. 현재는 수니파가 85%로 절대 다수이다. 아래 지도를 보면 이란/이라크외 소수 국가를 제외하고는 시아파는 찾기 어렵다.

 

알리의 암살 사건후 무아위야가 우마이야 왕조(661-750)를 설립하고 칼리프를 세습한다. 이후 상당기간의 내전을 거친 후, 6대 칼리프인(705-715)인 왈리드1세 전성기에 아프리카 북부지방을 접수한 후, 지브롤터(타리크의 산) 해협을 거쳐 이베리아 반도(스페인)에 상륙한다. 그 뒤를 이어서 아바스 칼리프 왕조(750-1258)가 들어서지만 총독들이 독립하여 북부 아프리카에는 파티마 왕조(909-1171), 이베리아 반도에는 후옴미아드 왕조의 3인 칼리프 체제로(929-1031) 분할된 뒤 계속 세력이 약화되어 결국 1258년 몽골에게 멸망한다. 아래에 이베리아 반도는 표시되어있지 않다.

 

이슬람 제국은 아니지만 유럽 역사에 중요한 다른 국가는 1037-1194년 사이에 이란지역을 거점으로 한 셀주크(투르크) 제국이 있다. 우크라이나 지방의 유대교국가인 하자르 제국(618-1048)의 붕괴 후, 남하한 유목민들이 이슬람교를 접하고 이란의 토착 맹주이던 사만왕조(819-999)의 용병으로 있다가 새로운 지배자가 된다. 이후, 셀주크는 끊임없이 콘스탄티노플을 위협하여 훗날 십자군 전쟁(1095-1291)을 불러온다. 아래 그림 초록색이 셀주크 제국 영토이다.

 

몽골지배 후, 셀주크투르크의 빈자리는 다시 오스만(ottoman)투르크 제국(터키)으로 (1299-1922) 연결되어,메흐메트2세(1444-1481)시기에  비잔틴(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키고 (1453) 콘스탄티노플을 이스탄불로 개명한다. 슐레이만대체(1520-1566)때 영토가 가장 확대되고 유럽 합스부르크의 카를 5세(1519-1556)와 경쟁 관계를 이루며 동유럽의 강자로 떠오른다. 아래가 전성기때의 오스만 투르크 족의 영토이다.

 

 

3. 카롤링거 왕조 (중프랑크(751-875), 동프랑크(751-911), 서프랑크(751-987)) 시작

 

왈리드 1세의 전성기에 우마이야왕조는 이베리아 반도에 상륙 후, 서유럽으로 서북진하다 732년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메로빙거왕조의 마르텔 장군에게 패배한다. 여기서 승리했다면 유럽의 역사는 (이슬람으로) 달라졌을 것이다. 마르텔의 아들 피핀이 반란을 일으켜 카롤링거 왕조를 시작한다. 교황은 그 (반란) 계획을 사전승인하고 피핀은 그 보답으로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드 왕국을 침략하여 라벤나 지역에 최초의 교황령(교황의 영토)을 만든다. 다시 이에 대한 보답으로 피핀의 아들 샤를마뉴(샤를대제)에게 교황 레오 3세가 (로마의 후계자로 인정한다는 의미로) 황제의 관을 씌운다(800년).

 

4. 동서 교회 분열 (726)

 

동로마는 이슬람의 끊임없는 공격에 시달리고 전투에서 거의 100전 100패하여 영토가 계속 쪼그라든다. 그래도 동로마제국의 맷집 역할로 서유럽은 안전해졌지만 은혜를 모르는 로마교황과의 갈등이 증폭되다가 726년 동로마 교황 레오 3세(샤를마뉴에게 제관을 씌운 교황과 동명)의 우상금지령으로 폭발하여 이때부터 동방정교회와 로마카톨릭으로 완전히 갈라선다.  

 

5. 샤를마뉴=카를대제(Karl, Charles, Charlemagne, 768-814) 전성기

 

샤를마뉴는 774년 롬바르드 왕국(이탈리아 북부) 정복, 778년 에스파냐 (“롤랑의 노래”, 스페인 “론세스바예스”에서 롤랑부대 전멸) 북부 정복, 색슨족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복으로 유럽의 지배자로 등극하고 800년 성탄절날 레오3세에게 황제의 관을 받는다. 샤를은 로마의 계승자로 인정을 받고, 교황은 황제를 승인하는 모양세이니 서로가 win-win이다. 카드게임의 K가 바로 그의 얼굴이다.

 

6. 프랑크 제국 분할(베르됭, 메르센 조약): 오늘날의 프랑스/독일/이탈리아 시초

 

샤를마뉴 사후, 후계자 루트비히 1세는 838년에,  중(로타르1세)/동(루트비히2세)/서(카를2세) 프랑크로 분할하여 아들들에게 넘겨준다. 당연히 몫을 두고 서로간의 내란이 발생하고 귀족들의 중재로 843년 “베르됭 조약”을 맺어 영토를 나누고 황제는 서프랑크의 카를2세로 정한다. 중프랑크의 로타르1세는 다시 로트링겐/프로방스/이탈리아로 아들들에게 3등분해서 나눠주는데 869년 로트링겐의 로타르 2세가 후세없이 사망하자, 동/서프랑크가 로트링겐을 두고 전쟁을 벌인 후 870년 “메르센 조약”으로 새로운 경계를 만든다. 오늘날 프랑스/독일/이탈리아의 시초가 된 역사상 중요한 조약이다.

 

 

7. 동프랑크 작센(오토) 왕조 (919-1024년) 및 신성로마제국(962-1806년) 건립

 

동프랑크는 카를링거 왕조와 결별하고 처음에는 여러 공국의 왕들이 선거를 통하여 선제후를 선출하였다. 919년 선출된 작센 공 하인리히(영어로 헨리) 1세(919-936)는 이후 가문 세습 체제로 바꿔서 작센 왕조를 시작한다. 뒤를 이은 오토 1세(936-973)는 영토를 확장하고 962년 이탈리 교황령을 보호해준 대가로 샤를마뉴처럼 서로마 황제의 관을 받고 오토대제로 등극한다. 이때부터, 유럽사의 큰 획인 신성로마제국(962-1806)이 시작된다. 그러나 신성로마제국(Holy Roman Empire)은 조그만 공국들의 연합체 형태, 제국의 영토도 들쭉날쭉하는 가상의 제국의 형태로 운영되어 황권이 강하지가 않았고 이에 따라 교황권과 세력다툼이 끊이지 않는다.

 

 

8. 서프랑크(프랑스) 카페왕조(987-1792, 1814-1848) 시작

 

987년 루이 5세의 죽음으로 카롤링거 왕족의 혈통이 사라지고 카페 왕조가 시작된다. 카페왕조는 프랑스왕 36, 스페인/포르투갈 20 그외지역 수십명의 왕을 배출한, (합스부르크 왕가와 더불어) 유럽 최대 가문이다. 이 당시 서프랑크의 많은 지역은 이미 영국 왕족들의 여러 공국들이 차지하고 있어서 (프랑스 전체면적의 절반) 카페 왕조 초기에는 왕권이 매우 약했으며 12세기 후반 루이 6세~13세기 루이 9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왕이 제대로 권력을 잡기 시작한다.

 

9. 노르만족 남하(8~9세기)와 잉글랜드 침공

 

872년(메르센 조약 2년후) 하랄 1세가 노르웨이를 통일한다. 반대세력들은 쫓겨서 스코틀랜드와 아이슬란드로 도망친다. 10세기 중반에 동명이인인  하랄1세가 덴마크를 통일하고 손자인 크누트대왕이 영국을 정복하여 잉글랜드/노르웨이/스코틀랜드의 제국을 건설한다. 스칸디나비아에 기독교가 전파된 것은 9~11세기(핀란드는 12세기) 비교적 늦은 편이다.

 

8세기부터 추위와 땅부족으로 바이킹들이 유럽북부해안을 노략질 하다가 9세기에는 아예, 프랑스 북쪽 노르망디에 터를 잡는다. 힘이 약한 서프랑크는 전쟁대신 노르망디 공국을 주고 얌전히 있으라고 타이른다. 1066년 노르만공의 월리엄이 잉글랜드를 정복하고 노르만 왕조(1066-1154)를 열고, 영국왕실은 노르만->플랜태저넷(1154-1399)->랭커스터(1399-1470)->요크왕가(1471-1483)로 이어진다. 노르만 왕조 헨리 1세의 유일한 딸인 마틸다가 프랑스의 앙주 가문과 재혼함에 따라 (영국왕이 프랑스 공국을 겸함에 따라) 프랑스와 영국의 역사가 복잡하게 얽히고 훗날 백년전쟁(1337-1453)의 씨앗이 된다.

 

10. 카노사의 굴욕

 

신성로마제국은 작센(오토)왕조(919-1024년)에서 잘리어(프랑켄)왕조(1024-1125)로 바뀌고 하인리히 4세는 추기경 선임권을 두고 그레고리우스7세에게 대들다 파문 당한 후, 한 겨울에 빤스만 입고 (joke) 카노사(이탈리아 북부)에서 석고대죄한 후 복권된다(1077). 앙심을 품은 하인리히4세는 1084년 로마를 침공하여 그레고리오 7세를 쫓아내지만 카노사 굴욕사건을 계기로 교황의 권력이 강화된다. 물론, 잘 알다시피 십자군 원정의 실패와, 1303년 필리페4세가 이탈리아 아나니 별장에서 교황 보니파시오 8세를 습격하는 아나니 사건, 뒤이어 교황이 된 클레멘스 6세의 아비뇽 유수로 다시 교황권은 크게 위축된다.  

 

11. 십자군 전쟁(1095-1270)

 

11세기 셀주크의 콘스탄티노플 위협이 계속되고 예루살렘 성지순례자의 출입을 통제하자, 1095년 피아젠차 공의회에서 교황 우르바노 2세가 십자군 전쟁을 호소하면서 180년동안 진행된다(1~8차원정). 1차원정은 십자군이 승리하여 예루살렘을 되찾는다. 그러나 전열을 가다듬은 셀주크가 1144년 에데사지역을 함락하자 2차 십자군 전쟁이 발생하지만 루이7세(프랑스)와 콘라트 3세(신성로마)의 십자군은 대패하고 돌아간다.

 

다시 40년이 지나서 1187년 셀주크의 영웅 살라딘은 예루살렘을 다시 빼앗고, 이에 십자군 사상 최정예부대인 3차원정대가 떠난다. 그러나 가는 길에 신성로마제국 프리드리히 1세는 사고로 익사하고, 프랑스 왕 필립2세는 아프다는 핑계로 돌아가서 리처드왕(잉글랜드)의 동생 존에게 반역을 부추긴다. 혼자 열심히 싸웠지만 동생의 반란소식을 접한 리처드는 결국 1192년 급하게 살라딘과 휴전 협정을 맺고 귀국길에 오른다. 리처드의 활약상은 “갈리아의 아마디스”라는 소설로 그려지고 이는 다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가장 즐겨읽는 소설로 등장한다.

 

리처드를 이은 John 왕은 무능력하게 프랑스 영지를 잃고 이를 회복하기 위하여 1346년 잉글랜드왕 에드워드 3세가 노르망디에 상륙하면서 그 유명한 백년전쟁, Hundred year’s war가 발발한다. 영국군에 의해서 거의 멸망의 지경에 이른 프랑스는 잔 다르크(1412-1431)라는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갸냘픈 소녀에 의해서 반격에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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