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인식하는 물질, 존재와 의식... 자연철학적 접근

근대사 요약 본문

세계사

근대사 요약

existence_of_nothing 2021. 3. 12. 17:49

 

이제 근대 초기(16~18세기 중엽)의 역사를 정리해 보자.

 

1. 프랑스내 신구교 세력 충돌

 

1.1.위그노 종교 전쟁 (1562-1598)

 

노스트라다무스(1503-1566)의 예언대로 1559년 발루아 왕조의 앙리 2세가 창시합 도중 눈을 찔려 사망한다. 병약한 프랑수아 2세는 즉위 1년 후 사망하고 샤를 9세가 10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지만 이탈리아 메디치가출신 모후 카트린이 섭정한다. 허약한 왕권 회복을 위해 그녀는 카톨릭의 기즈 가문과 위그노를 지지하는 부르봉 가문의 불화를 이용/중재하며 종파를 초월하여 발로아왕조의 안정을 꾀한다. 그러나, 1562년, 기즈공이 예배중인 기독교인을 습격/학살한 바시학살(massacre of Vassy)을 계기로 36년간의 위그노 전쟁(1562-1598)에 돌입한다.

 

위그노의 세력이 커지자 카톨릭은 그 지도자 콜리니 제독을 암살하고자 하나 실패하고, 파리의 카톨릭 세력은 위그노의 보복을 두려워한다. 기즈 가문은 안 그래도 원한이 있던 위그노 세력을 이 기회를 이용하여 제거하기로 모의한다. 모후 카트린은 개신교파 나바라의 앙리(훗날 앙리 4세)와 딸 마르그리트(“여왕 마고”)를 정략 결혼시켜 화합을 도모하고자 하나, 기즈공은 파리의 카톨릭 세력들을 사주하여, 결혼식 6일 뒤인 1572년 8월 24일, 콜리니 제독 암살을 시작으로 “성 바르톨로뮤 축일의 대학살”을 벌인다.

 

1.2.낭트칙령

 

앙리 3세를 끝으로 발로아 왕조는 대가 끊기고 부르봉 왕조를 연 앙리 4세는 1598년 위그노의 종교자유를 인정하는 “낭트칙령”을 선포하고 위그노 전쟁을 종료한다. 불행히도 앙리 4세는 1610년 카톨릭 광신자에게 암살되는 등 종교적 갈등은 그냥 수면 아래로만 내려 앉았을 뿐이고, 루이 14세는 교황청의 지지를 얻기 위해 1685년 퐁텐블로 칙령으로 낭트칙령을 폐지하고 다시 개신교는 탄압의 대상이 된 후 1787년 루이 16세의 관용 칙령으로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얻는다.  

 

 

앙리 4세가 카톨릭 광신자에게 암살되자 10세의 루이 13세(1610-1643) 대신 어머니 마리가 섭정하는데 이때 30년 전쟁에서 신성로마제국의 영웅 발렌슈타인을 간계로 몰아낸 명 재상 리슐리외 추기경이 도운다. 뒤를 이은 태양왕 루이 14세(1643-1715)는 영국왕 제임스 1세의 왕권신수설을 이어받아 “짐이 곧 국가”라고 선언하고 여러 전쟁(영란전쟁,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전쟁, 팔츠계승전쟁,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과 베르사이유 궁전 건축으로 국가재정을 파탄시킨다. 또한 퐁텐블로 칙령으로 낭트 칙령을 무효화시키고 위그노들을 다시 탄압한다.

 

 

2. 30년 전쟁(1618-1648, 종교를 빙자한 영토확장 전쟁)

 

17세기 초 유럽 거의 모든 나라가 종교를 명분으로 한 전쟁에 개입한다. 그 결과 독일 전체가 황폐해지고 프로이센이 약진한다. 종교는 명분일 뿐, 프랑스는 카톨릭이었지만 신성로마제국과 에스파냐 세력 견제를 위하여 개신교를 도왔다.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제국회의에서 신성로마 제국은 각 제후들이 종교를 정하면 국민들이 따르기로 합의했다. 그 당시 카톨릭의 부패로 인해서 칼뱅이 이끄는 개혁적인 개신교세력이 한때 제국의 거의 90%를 차지할 정도로 세력을 넓힌다. 충돌이 불가피해졌다.

 

먼저 1608년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가 개신교 연합을 만들고 이에 맞서 카톨릭은 바이에른 대공 막스밀리안 중심의 카톨릭 연맹을 만든다.  1618년 카톨릭의 합스부르크왕조 페르디난트 2세가 보헤미아 왕을 겸하게 되는데 이에 반발하여 개신교 귀족들이 장악한 의회는 프리드리히 5세를 왕으로 추대하여 2명의 왕이 공존한다. 갈등을 빚던 개신교 귀족들이 페르디난트 2세의 신하들을 추락사시킨 내용을 빌미로 30년동안의 종교 전쟁이 발발한다.

 

이듬해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된 페르디난트 2세가 에스파냐와 연맹하여 프리드리히 5세를 네덜란드로 몰아내지만, 개신교 신흥 강국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4세가 개신교를 구한다는 명목으로 전쟁에 개입하고 이를 빌미로 신성로마/에스파냐를 견제하려던 영국과 네덜란드가 가세하여 1차 전쟁을 벌인다. 이 전쟁은 합스부르크 왕조가 승리하고 1629년 뤼베크 평화조약을 맺고 종전한다.

 

그러나 바로 이듬해 스웨덴 왕 구스타브 2세가 개신교로 참전하고, 프랑스의 은밀한 지원하에 초기 승기를 잡지만 구스타브가 뤼첸전투에서 전사하면서 상황이 역전된다. 그러나 프랑스 리슐리외의 간계로 페르디난트2세와, 2차전 승리의 전쟁영웅 발렌슈타인이 대립하면서 지지부진하다 1933년 프라하에서 평화조약을 맺는다.

 

그러자 이번에는 같은 카톨릭 계열인 프랑스가 직접 신성로마제국/에스파냐에 선전포고후 전쟁에 참전한다. 1637년 새로이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된 페르디난트3세가 별 의미도 없는 전쟁을 종결하자고 제안하여 1544년부터 4년간의 협상 끝에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30년 전쟁은 종결한다. 베스트팔렌 조약은 최초의 근대 조약의 의미가 있으며 이를 기점으로 중세에서 근대로 접어든다 (물론, 정확히 근대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를 규정하는 것은 관점에 따라 모두 다르다).

 

 

 

 

3. 영국의 부상과 근대화 진입 (칼레해전, 권리장전, 청교도/명예혁명)

 

사자왕 리처드의 십자군 원정 부재를 틈타 반란으로 왕위에 오른 결지왕 존이 프랑스와 전쟁에 패하여 막대한 빚을 지자 의회는 1215년 마그나 카르타(대헌장)에 서명하게 한다. 백년전쟁과 장미전쟁을 끝으로 랭카스터왕조가 끝나고 헨리8세부터 튜더왕조가 시작되지만 바람둥이의 업보인지 다음대에서 메리 1세는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와 결혼하지만 아이가 없고, 엘리자베스 1세는 독신이기에 튜더왕조는 바로 문을 닫는다.

 

대항해시대 포르투갈에 뒤이어 신항로 개척에 가장 앞섰던 에스파냐는 네덜란드, 밀라노, 나폴리, 시칠리아, 남미브라질, 아시아 필리핀까지 식민지로 둔 유럽 최강 전력을 갖춘다. 식민지 유지와 수송선 안전을 위해 무적함대(Armada Invencible)를 갖추고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해군을 격파하고 승승장구한다. 뒤늦게 식민지 경쟁에 뛰어든 엘리자베스 1세는 형부인 펠리페2세의 에스파냐를 견제하기 위하여 1566년부터 독립운동을 펼치던 네덜란드를 지원하고, 해적들을 사주하여 상선들을 약탈하고, 드레이크 병력을 네덜란드에 파견하여 중남미 식민지를 약탈하여 에스파냐를 자극한다.

 

이에 펠리페 2세는 무적함대의 지원아래 네덜란드에 집결한 육군을 잉글랜드로 상륙시켜 공격할 계획을 세운다. 1588년 무적함대는 프랑스 칼레에 집결하지만 드레이크의 영국해군에게 대패한다. 사실 전투에서는 소수만 침몰하지만 북방으로 돌아서 후퇴하는 과정에서 태풍으로 많은 함선들이 침몰한다. 잉글랜드-스페인 전쟁(1585-1604년)은 1604년 평화협정으로 종료된다. 이후 30년전쟁을 겪고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네덜란드가 독립하면서 에스파냐는 유럽 역사의 주역에서 사라진다. 살라미스, 트라팔가, 칼레해전을 보통 3대해전이라고 하며, 전쟁사적으로는 칼레해전은 함상백병전에서 포격전 형태로 해전의 형태를 바꾼다.

 

 

엘리자베스1세이후 직계혈통이 없으니 헨리8세의 누나의 자손인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를 데려와서 스튜어트 왕조(1603-1649)를 시작한다(제임스 1세(1603-1625)로 즉위). 제임스 1세는 의회를 무시하고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며 (훗날 프랑스 루이 14세가 차용) 성공회를 제외한 종교를 탄압하여 1620년 메이플라워 호가 미국으로 떠나게 한다. 찰스 1세(1626-1649)가 프랑스 개신교도 반란지원에 실패하고 과세부담이 커지자 1628년 의회는 권리청원 (petition of rights)을 왕에게 서명시킨다.

 

그러나 1629년 다시 의회를 해산 후 11년동안 소집하지 않다가1640년 스코틀랜드와 전쟁 비용 마련을 위해 의회를 소집하나 거절당한다. 설상가상 이듬해 아일랜드의 반란이 발생하자 의회의 동의없이 군대를 파견하고 반발하는 의원들을 체포한다. 이에 의회파가 무기를 들고 청교도 혁명(Puritan revolution, 1640-1660)이 발발한다.

 

크롬웰의 철기군은 왕당파를 격퇴하고 찰스1세를 처형한다. 크롬웰은 1651년 영국국적배만 허용하는 항해 조례를 발표하고 이에 반발한 네덜란드와 영란전쟁(4차례, 1652-1654, 1665-1667, 1672-1674, 1780-1784)을 치른다. 청렴하지만 서슬 퍼런 크롬웰 독재에 그의 사후, 의회는 찰스 2세를 왕위에 앉히고 다시 왕정으로 복귀한다 (영국과 프랑스 역사를 보면, 혁명/반혁명/혁명/반혁명의 과도기를 거친 후에야 안정된 체계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음을 본다).

 

찰스 2세와 후임인 제임스 2세는 카톨릭을 강요하며 청교도를 박해한다. 당시 의회는 왕당파인 토리당(성공회), 의회파인 휘그당(개신교)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그러나, 영국이 카톨릭 국가가 될 것을 우려한 양당은 합의하여 1688년 제임스 2세를 프랑스로 망명시키고, 제임스 2세의 딸 메리(개신교)와 결혼한 네덜란드 월리엄 공에게 왕위를 넘긴다 (영란전쟁에서 열심히 싸우고는 ^^). 왕위 계승 조건으로 권리장전(Bill of rights)에 서명하게 하고 입헌군주제를 정착시킨다. 이 과정에서 전혀 피를 보지 않았기에 이를 명예혁명이라 하며, 이에따라 영국은 근대 시민 사회에 진입한다.

 

 

4. 에스파냐왕위계승전쟁(1701-1714)과 프랑스의 쇠락

 

에스파냐는 엘리자베스1세의 형부인 펠리페 2세 시기에 전성기와 쇠퇴를 동시에 경험한다. 이어 펠리페 3/4세, 카를로스 2세를 지나면서 국력이 쇠퇴하지만 아메리카 식민지는 유지하고 있었다. 1700년(북방전쟁시작) 카를로스 2세가 후계없이 사망한다. 유언장에는 프랑스 루이 14세의 손자 필립(펠리페 5세)에게 왕위를 넘겨준다고 한다. 그 둘이 합치면 유럽의 절대 강자가 되기에 이웃 나라에서 가만히 둘 수는 없었다.

 

원래 카를로스가 합스부르크가문 출신이기에 오스트리아가 유언장을 인정하지 않고 프랑스를 공격한다. 이제 명분은 생겼고 프랑스가 괴물이 되면 안되기에 주변 강국들인 영국/네덜란드/프로이센는 오스트리아를 지원한다. 18세기를 열자마자 유럽에 동시 다발적으로 전쟁(에스파냐왕위계승, 북방)이 터진다. 개전 초기에는 프랑스가 우세했지만 1702년 영국/네덜란드 연합함대가 프랑스함대를 대파하면서 전세는 역전된다. 전쟁은 뚜렷한 승자없이 1714년 라슈타트 조약으로 종료한다. 펠리페 5세는 에스파냐왕위를 인정받지만 네덜란드 남부(현 벨기에)를 오스트리아에게, 신대륙식민지를 영국에게 빼앗긴다. 신생 강국 프로이센은 공국에서 왕국으로 승격된다. 프랑스는 추락을 시작하고 영국은 계속 연전연승하며 유럽의 큰형으로 떠오른다.

 

 

5.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1740-1748)과 프로이센의 부상

 

5.1. 프로이센 등장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으로 30년전쟁은 종료한다. 말이 종교 전쟁이었지만 정작 교황의 역할은 미미하다. 말만 종교 전쟁이지 실제로는 국가들 간의 무자비한 영토 확장 전쟁이기 때문이다. 또한 전쟁이 발발한 보헤미아는 개신교를 원했고, 개신교파가 승리하였지만 정작 그 땅은 오스트리아에 합병되어 카톨릭 땅이 된다. 종교는 방편일 뿐이다.

 

종교전쟁의 결과 그나마 허상의 영방연합체인 신성로마제국이 해체된다. 물론, 형식적으로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왕조에서 로마황제의 지위를 갖지만 빛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30년 전쟁의 결과 독일땅은 폐허가 된다. 그 와중에 독일 북동부 지역의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브란덴부르크(공국) 프로이센을 건설한다. 처음에는 왕국도 아닌 공국에서 시작하지만 18세기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1688-1740)와 뒤를 이은 프리드리히 2세(1712-1786)에는 군사강국이 된다.

 

5.2.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1740-1748)

 

1740년 왕위에 오른 프리드리히 2세는 오스트리아의 철/석탄산지인 슐레지엔을 호시탐탐 노린다. 그 해 오스트리아 왕 카를 6세가 아들없이 사망하자 딸 마리아 테레지아가 계승한다. 그런데 게르만 풍습에 딸의 세습은 터부시되었기에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7세가 자신이 황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때 프로이센이 잽싸게 개입하여 슐레지엔을 점령하면서 도와주겠다고 한다. 그러나 프랑스/에스파냐가 바이에른 편에, 영국/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편에서 전쟁을 벌인다. 전쟁은 허무하게도 카를 7세가 사망함으로1748 아헨조약으로 종료한다. 프로이센만 덕을 본다.

 

5.3. 7년전쟁(1756-1763)과 프로이센 부상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에 뺏긴 슐레지엔을 수복하기 위해 프랑스/러시아/스웨덴과 동맹을 맺고 프로이센은 영국과 동맹을 맺어 전쟁이 시작된다. 초반 프로이센이 우세하다가 1759년 이후는 연전연패하며 프리드리히 2세는 수도 베를린에서 자살을 결심한다. 그러나 우연히도 1762년 러시아에 프리드리히를 아주 흠모하던 표트르 3세와 독일 출신 예카테리나 대제가 왕위를 잡으면서 러시아는 동맹에서 이탈한다. 이에 따라 연합군도 지리멸렬해지고 결국 1763년 후베르투스부르크 조약으로 종전한다. 쟁쟁한 서구 열강들과 몸빵으로 버틴 프로이센은 졸지에 유럽의 강대국 대열에 오른다.  

 

6. 북유럽과 러시아의 패권 경쟁

 

6.1. 네덜란드 쇠퇴

 

네덜란드는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으로 에스파냐로부터 독립한다. 독립전 이미 1602년 영국에 이어 두번째로 동인도회사를 설립할 정도로 무역을 활발히 하고 유럽 금융중심지로 성장한다. 30년 전쟁을 계기로 떠오르던 신흥강국을 1651년 영국의 크롬웰이 항해조례로 견제한다. 영국과 2차례의 영란전쟁을 치르고, 프랑 루이 14세도 제 3차 영란전쟁으로 접수하려고 하지만 인접국들과 동맹으로 격퇴한다.

 

그러나 미국 독립전쟁의 와중에 발생한 제 4차 영란전쟁(1781-1784)에서 영국에 완패하면서 해양주도권을 영국에 완전히 빼앗긴다. (이어서 1810년 프랑스 영토가 되었다가 1815년 벨기에와 함께 네들란드 왕국으로 독립뒤 1831년 벨기에 왕국으로 분리된다)

 

<전성기 네덜란드 무역 경로>

 

 

6.2. 북방전쟁(1700-1721)과 스웨덴의 쇠퇴

 

17세기 덴마크로부터 독립한 스웨덴은 구스타브 2세가 30년 종교 전쟁에서 맹활약하면서 전성기를 맞는다. 그러나 이미 얘기한데로 뤼첸 전투에서 구스타브 2세가 전사하며 침체한다. 그러나 카를 12세가 왕이 되면서 다시 국력을 키워 발트해 일대를 장악한다. 이에 주변 국가들(폴란드, 덴마크, 러시아, 프로이센)이 위협을 느끼고 연합하여 공격한다.

 

개전 초기에는 스웨덴이 우세했는데 (1700년 나르바 전투 대승) 이때 카를 2세가 러시아 공격이라는 치명적인 실수를 한다. 초반 대승을 거두면서 거침없이 진격을 하지만, 추운 날씨에 퇴각하다 많은 병력을 잃는다 (러시아는 스웨덴, 나폴레옹, 히틀러가 러시아를 침공할 때마다 모스크바를 내주며 추위를 기다린 후 역공을 한다).

 

표트르 대제는 수도를 옮기기 위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성 베드로의 도시)에 도시를 건설한다. 이 틈을 타서 스웨덴이 폴란드를 침공하지만 1709년 폴타바 전투에서 재기불능 수준으로 대패한다 (카를 12세는 퇴로가 끊겨 바로,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 1712년 페테르부르크 이전 후 총공격으로 발트해의 영토를 잃고 1721년 뉘스타드 조약으로 전쟁을 종료한다.

 

6.3. 러시아의 부상

 

1584년 차르 체제를 정비한 이반 4세 사망후 혼란에 빠진 러시아를 로마노프(미하일1세)가 모스크바 왕국을 세우며 재건한다(1613). 이후 1613-1917까지 305년간 17대를 거치며 러시아를 지배한 후 러시아 혁명으로 붕괴된다.

로마노프 왕조의 4대 차르인 표트르 대제(1682-1271)는 급진적인 서구화를 추진하고 반대파들을 힘으로 억압하여 짧은 시간에 유럽 정치사에 영향을 미칠 정도의 강국을 만든다. 이후, 스웨덴과의 북방전쟁(1700-1721)에서 대승하여 발트해의 해상교두보를 확보한다.

 

표트르 대제 사망 후 혼란기는 표트르 3세의 아내로 남편을 몰아내고 차르가 된 예카테리나 대제(1762-1796)가 수습한다.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와 함께 3차에 걸쳐 폴란드를 분할하고 1795년 멸망시킨다. 러시아-튀르크 전쟁(1770-1774)으로 오스만 제국을 압박하여 크리미아/카프카스를, 이후 1783년 크림반도를 빼앗는다.

 

반응형

'세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 고대 역사 요약  (0) 2021.09.13
근대사 요약  (1) 2021.03.13
중세사 요약  (0) 2021.03.12
중세사, 장미의 이름  (0) 2021.03.11
서양 중세사 요약  (0) 2021.03.11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