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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근대사 요약

existence_of_nothing 2021. 3. 13. 17:51

 

1. 산업혁명

 

1730년 존 케이가 플라잉 셔틀을, 제임스 하그리브스는 제니 방적기를 발명한다. 그리고 제임스와트가 1770년 증기기관을 발명한다. 18세기초에 이미 누군가에 의해 발명되었으나 잠들어 있던 그 기술은 면직물 생산에 적용되어 생산성을 수십배 이상 향상시키고 영국 맨체스터는 면직물 생산의 중심지가 된다. 국내 수요를 채우고도 차고 남으니 당연히 식민지의 필요성이 절실하다. 그 결과 인도의 면직물 생산자들은 100% 파산한다.

 

1807년에는 증기선, 1814년 영국의 스티븐슨이 증기기관차를 발명하여 물류 혁명을 이룬다. 19세기 중반에는 유럽 여러나라에서 증기기관차가 달리고, 19세기 후반에는 독일에서 전기기관차까지 등장한다. 1834년에는 재봉틀이 발명되어 대량으로 의복제조가 가능해진다.1837년 프랑스의 루이 다게르가 사진기를 발명하고 1878년 미국인 마이브리지가 초당 24프레임의 영화필름을 발명한다. 1866년 대서양 횡단 전신케이블이 깔리고, 1879년 런던에 최초의 전화국이 생긴다. 1879년에는 에디슨이 전등을 발명한다.

 

왜 초기에 중국과 인도, 아라비아에서 유럽보다 앞섰던 기술이 근대에 들어서 역전되었는가? 이것은 유럽의 태생적인 호전 본능과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이 근대에 들어서 팽창주의를 지향하고 있었고, 강력한 군대와 무기 개발이 필수적이었다. 따라서 철강 산업이 일찍이 발달하고 철도 infra도 일찍 구축되었다. 영국은 대헌장/권리장전/권리청원 /명예혁명을 통하여 일찍이 입헌군주제를 도입하여 정치를 안정화 시켰기에 자본가들이 일찍 성장하였고, 이에 따라 산업혁명이 가장 먼저 영국에서 발전한다.

 

 

2. 계몽주의 전파

 

신을 이성적으로 좀 더 잘 이해하려는 스콜라철학은 도리어 신을 무너뜨리는 발판이 되었다. 칸트는 계몽을 “인간이 스스로 자초하였던 미성숙으로부터의 해방이며, 모든 면에서 자신의 이성을 공개적으로 사용하게 되는 인간의 자유”로 정의한다. 계몽주의도 자본/자유 주의자들의 힘이 일찍부터 성장한 영국에서 시작한다.

 

베이컨은 스콜라와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관념적인 신학/철학의 효용성을 부정하고 경험적/과학적 학문의 중요성을 얘기한다. 갈릴레이(1564-1642)에 이어, 뉴턴(1642-1727)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인 세계관을 일거에 붕괴시키는 기계론적인 세계관을 완성하고, 인간/우주의 질서와 신에 대한 믿음 사이에 명확한 이신론적 경계를 긋는다. 토마스 홉스(1588-1679)와 존 로크(1632-1704)는 사회계약설을 주창하여 정부가 계약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으면 계약을 파기할 권리가 시민사회에 있음을 암시한다. 애담스미스(1723-1790)는 국부론에서 시장자율/자유무역을 얘기하며 자본주의를 탄생시키고, 데이비드 흄(1711-1776)은 인상(impression)과 관념(idea)을 구분하여 경험적 대상이 아닌 관념과 과학의 분리를, 그리고 경험에 기반한 진리 탐구를 얘기한다.

 

프랑스에서는 “cogito ergo sum”을 얘기하며 데카르트(1596-1650)가 인간을 철학의 중심에 앉힌다. 1784년 몽테스키외는 “법의 정신”에서 삼권분립을 얘기하고 네덜란드의 스피노자(1632-1677)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연상시키는 무의식에 의한 무아적인 자아관과 인격적인 신을 배제한 우주론적 범신론을 얘기한다. 똘레랑스로 대표되는 철학자/사상가 볼테르(1694-1778)는 억압적 권위, 광신적 종교 집단/권력 등 사회의 많은 비합리적인 요소에 대해서 체제내에서 저항한다.

 

반면 루소(1712-1778)는 1755년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자연상태에서 (홉스가 만민에 대한 만민의 투쟁을 얘기한데 반) 선한 인간들이 사회를 만듦으로써 소유와 불평등이 생겼다고 주장한다. 도구적 이성의 효용성 대신 감성/자연성을 강조함으로써 볼테르 같은 타 계몽주의자들과 결별한다. 1762년 “사회계약론”을 통해 자연적 인간의 절대주권(자유와 평등)을 국가가 제공하기로 약속을 맺은 것이라고 하여 혁명의 정당성을 제공한다.

 

3. 프랑스 대혁명과 앙시앵 레짐 몰락

 

루이14세 치하에 베르사이유 궁전 건설과, 수많은 유럽 전쟁 (왕위계승전쟁, 100년전쟁)으로 인해 17세기에 들어서 국가 재정이 바닥난다. 루이 16세때에 미국 독립전쟁을 지원하기 위하여 다시 세금을 징수해야 하던 차에 1614년 루이 13세 이후 한번도 소집되지 않은 삼부회를 175년만인 1789년에 소집한다. 이 때 평민으로 구성된 제3신분세력들은 도리어 귀족특권 폐지를 요구하면서 회의장 인근 테니스코트에 모여 새로운 사회질서를 만들기 전에 해산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한다. 분위기 파악을 못한 루이 16세가 군대를 투입하자 7/14일 파리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여 프랑스 대혁명이 시작되고 왕정은 무너진다.

 

혁명파는 급진파(자코뱅파)와 온건파(지롱드파)로 분열되고 권력을 잡은 자코뱅파의 로베스피에르는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와네트를 단두대 처형하고 공포정치를 하다 1794년 자신도 반대파에게 처형된다. 항상 그렇듯이 혁명 후, 안정을 찾지 못하면 다시 반혁명이 득세한다. 1799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장군이 쿠데타로 통령이 되고, 국민투표를 거쳐서 황제로 등극한다 (기껏 공화정을 세운 후 다시 황제를 ^^).

 

4. 나폴레옹의 제 1제정과 그 이후

 

이때부터 나폴레옹이 몰락한 11년간을 프랑스 제1제정(1804-1815)라고 부른다. 프랑스는 영국과 전쟁을 준비했으나 영국이 먼저 넬슨제독의 함대로 트라팔가 해전(1805)에서 대승을 하면서 기선을 잡는다. 패배의 악몽을 딛고, 나폴레옹은 이듬해부터 유럽 대륙공략을 시작하여 연전연승한다. 아래 지도에서 보듯이 유럽대륙 전체를 정복한다.

 

그냥 이 상태에서 멈췄으면 좋았겠지만, 필받은 나폴레옹은 대륙봉쇄령에도 영국과 계속 무역을 한 러시아에 보복하기 위하여 모스크바로 쳐들어간다.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나폴레옹은 스웨덴이 북방전쟁에서 패배한 방식 그대로, 한 겨울에 모스크바의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후퇴하는 도중 병력의 75%를 잃는다. 이 틈을 타서 반격한 반 프랑스 동맹군에 파리까지 빼앗기며 항복하고 나폴레옹은 엘바섬에 유배된다. 1년만에 탈출하지만 워털루전투에서 패한후 아프리카 세인트헬레나섬에서 사망한다.  

 

1814년 오스트리아 빈에 모인 승전국들은 오스트리아 총리 메테르니히의 파격적인 제안, 즉, 프랑스 혁명이전으로, 시계를 30년전으로 돌려서 영토를 확정하자는 제안에 찬성한다. 혁명의 파급을 막고자 하는 보수 정치 세력의 합의였다. 이를 빈체제(1815)라고 부른다.

 

프랑스는 다시 루이 18세가 지배하는 부르봉 왕조가 부활했다. 당연 루이 18세는 혁명을 두려워하여 조심하였지만 동생 샤를10세는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하여 의회를 해산하고 자유시민을 탄압한다. 재 선거에서도 시민들이 승리하자 다시 칙령으로 선거결과를 부정하고 재선거를 명하지만 7월27일 시민들이 7월혁명으로 부르봉 왕조를 끌어내리고 루이필립을 형식적인 왕으로 추대한다.

 

16년이 지난, 1846년 2월, 프랑스에 대흉년이 생긴 여파로 인한 사회불안정기에 파리 하층민들이 다시 혁명(2월혁명) 임시정부를 세우지만 4월 선거에서 부르주아지들이 대승하고, 이에 다시 6월 혁명을 일으키지만 정부군에 진압당한다. 11월 뜻밖에도 루이 나폴레옹이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나폴레옹은 1851년 쿠데타로 반대파를 모두 제거하고 1852년 황제로 오른다. 국민들의 저항은 없었다 (^^). 18말~19초 프랑스는 혁명/반혁명/혁명/반혁명의 소용돌이에 사로잡히고, 상대적으로 정치가 안정화된 영국은 대영제국으로 성장한다.

 

5. 프랑스 혁명 전파와 최초의 사회주의 정부 파리코뮌 탄생

 

유럽 대다수의 나라가 혼동의 시기를 보낸 19세기에 영국은 입헌군주제를 기반으로 상대적으로 안정된 시기를 보낸다. 영국은 보수당인 토리당(지주세력)과 자유당인 휘그당(부르조아세력) 체제로 운영된다. 그러나 여전히 대다수의 하층민들은 투표권이 없었다. 이들이 투표권을 얻기위한 차티스트 운동(1838-1848)이 비무력 청원운동 방식으로 진행된다. 3차례에 걸쳐 500만명의 국민서명을 받아 제출했지만 대다수의 유럽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차티스트 혁명은 실패한다. 그러나 1884년 모든 성인 남성들에게 참정권이 주어지는 위로부터의 개혁이 이루어진다.

 

나폴레옹 3세가 프로이센에 패하자 프랑스 의회는 제정의 폐지를 선언하고 제 3 공화정을 연다. 그러나 임시정부가 프로이센과 굴욕적인 강화 조약을 맺자, 1871년 사회주의자와 노동자를 주축으로 혁명이 발생하여 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정부인 파리 코뮌이 탄생한다. 그러나, 자코뱅, 블랑키 주의자,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등등 온갖 잡동사니의 이질적 구성은 곧 그 한계를 드러내고 무려 3만여명의 학살극 끝에 막을 내린다.

 

6.  비스마르크와 독일 통일

 

1806년 나폴레옹에 쉽게 패한 독일은 정부주도의 개혁정책과 게르만족국가간의 관세동맹으로 국력을 발전시킨다.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1848년 3월혁명이 발생했지만 곧 보수주의로 회귀한다. 1861년 빌헬름1세가 비스마르크를 재상으로 임명하면서 철혈정책을 추진한다. 프로이센은 먼저 프랑스와 이탈리아와의 중립협상을 마치고 오스트리아를 공격한다. 이로써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을 넘볼 능력을 상실하고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하는 소독일주의의 통일의 방해세력을 없앤다.

 

그 다음은 1870년 에스파냐 혁명으로 왕의 공백기가 생긴 틈을 타서 프로이센 호엔촐레른 왕조의 인물을 천거하고 당연히 프랑스 나폴레옹3세는 아래위로의 프로이센 세력의 협공을 피하고자 그 해 프로이센과 전쟁을 하지만 도리어 1871년 프로이센에게 정복된다. 64년전 나폴레옹에게 가볍게 패한 앙갚음을 한 것이다. 싸나이들끼리 싸울때는 확실히 기를 죽여야 한다. 비스마르크는 아예 파리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신성로마 영방국가들을 모아 독일 제국을 선포한다. 프로이센에 점령된 알자스에서 마지막으로 진행된 프랑스어 수업,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의 배경이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다.

 

비스마르크는 야심찬 민족주의자였지만 또한 신중한 전략가이기도 하였기에 1882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와 삼국동맹을 맺고 1891년 러시아, 1907년 영국과 다시 3국동맹을 맺는다. 그러나 빌헬름 1세의 뒤를 이은 2세는 비스마르크가 소극적이라며 “you are fired”라고 하고 1차 세계대전의 불씨는 이 때문에 발생한다.

 

 

7.  범 슬라브 주의 탄생과 이탈리아 통일

 

프랑스 혁명 열기가 러시아로 전파되어 1825년 차르 알렉산드르 1세의 사망 후 귀족 장교들(데카브리스트)이 반란을 일으켜 입헌군주제를 요구한다. 그러나 황제에 등극한 동생 니콜라이 1세는 잔혹하게 반란을 진압하고 대제국을 꿈꾸며 범슬라브주의를 제창한다.

 

1853년 오스만 제국을 침략하여 5차 러시아-투르크 혹은 제 1차 동방전쟁을 일으키지만 영국과 프랑스의 견제로 크림전쟁으로 국제전이 되어, 러시아는 패하고 니콜라이 1세는 화병(자살?)으로 죽는다. 1855년 뒤를 이은 알렉산드르 2세는 먼저 국가 개혁을 시도하다가 1881년 급진 개혁주의자에게 암살된다. 그러나 개혁의 결과 러시아의 국력은 크게 신장된다.

 

러시아와 오스만투르크 사이에 여섯번의 전쟁의 결과 동유럽과 발칸 반도의 많은 슬라브 민족들이 독립하여 국가를 만든다. 세르비아, 루마니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불가리아 등이다. 1908년 오스트리아가 무력으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합병하자, 남슬라브 맹주를 꿈꾸던 세르비아가 반발하고 지중해로의 진출을 원하던 러시아가 슬라브 민족들을 사주하여 게르만계의 오스트리아에 반발하는 발칸 동맹을 만든다. 그 이후의 복잡한 스토리는 제 1차 세계 대전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1848년 이탈리아의 작은 왕국 사르데냐의 에마누엘레 2세가 자유주의자들(카우보르)과 손을 잡고 이탈리아 통일을 추진한다. 마침 크림전쟁이 발생하자 연합군의 편에서 러시아와 싸워 승리하고 그 답례로 프랑스 나폴레옹 3세와 비밀협약(오스트리아와의 전쟁시 이탈리아를 지원하겠다는)을 맺는다. 카우보르는 바로 오스트리아령을 공격하여 롬바르디아, 베네이차, 교황령을 합병하지만 프랑스내 카톨릭 세력의 반발로 프랑스가 배신하여 실패한다. 그러나 몇 년 후 혁명가 가리발디의 붉은셔츠단이 시칠리아와 나폴리를 점령하고 1866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전쟁을 틈타 베네치아와 로마를 수복한 후 오늘날의 이탈리아 영토를 통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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