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인식하는 물질, 존재와 의식... 자연철학적 접근
중세사 요약 본문
이번에는 십자군 전쟁 이후의 영국과 프랑스에서 일어난 역사 중심으로 중세사를 요약해 본다. 서양사에서 왕의 이름이 비슷하거나 동일한 경우가 많아서 정리가 쉽지 않음을 느낀다. 그러나, 계속 비슷한 얘기를 듣다 보니, 익숙해 짐을 느낀다. 인간이 무엇인가를 진정 이해할 수 있을까? 이해보다는 결국 무엇인가에 익숙해지는 과정일 것이다.
1. 십자군(1096-1272) 원정 실패와 교황권 실추
원래 십자군 전쟁은 9차 원정까지 진행되었으나 지난 게시에서 드림팀 3차 십자군 전쟁(1189-1192)까지만 얘기하였다. 그 뒤의 6차례의 원정은 백전 백패, 거의 해프닝 수준의 낮은 전투력만 보였기 때문이다 (4차 십자군은 심지어 아군인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고 잔인하게 약탈한다). 서방 기독 세력의 이슬람 세력에 대한 패배는 당연히 유럽 사회 전체에 패배감을 안기고, 교회(교황)의 권위 상실로 연결된다.
교황이 신성로마제국에게만 황제권을 부여하는데 불만을 품은 프랑스 카페왕조의 필립(필리페) 4세는 자신도 황제가 되고자 하지만 (그리고 교회 세금 부과까지 겹쳐서) 교황 보니파키우스8세는 이에 강하게 반발한다. 필립 4세(1285–1314)는 삼부회(성직자+귀족+평민대표로 구성)의 지지를 바탕으로 아나니 교황 별장을 습격하고 뺨을 맞은 교황은 홧병으로 한달 후 사망한다.
그 후 콘클라베(교황 선출 시스템)에서 클레멘스5세 교황을 추대하고, 클레멘스는 로마로 가는 대신 프랑스 아비뇽에서 집무를 본다. 아비뇽 유수는 그 후 일곱명의 교황의 재위 기간인 70년 동안 (1309-1377) 유지된다. 아비뇽 유수를 마친 그레고리우스 11세가 이듬해 죽자 콘클라베에서 우르바노 6세를 선출하지만 프랑스 추기경들은 이에 반발하여 클레멘스 7세를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하여 2명의 교황시대(1378-1417)가 열린다.
2. 대헌장(Magna Carta, 1214)
이전 포스팅에서 헨리 1세의 딸 마틸다와 프랑스 앙주 귀족과의 결혼과 그로 인해 프랑스와 영국의 역사가 복잡하게 얽힌다고 얘기하였다. 헨리 2세(1154-1189)가 왕위에 오르고 앙주 왕조를 시작한다. 헨리 2세의 세 아들 중 사자왕 리처드가 왕위를 차지하고 십자군 원정을 떠난다. 프랑스 국왕 필립 2세는 원정 중 병을 핑계로 귀환하여 리처드왕의 동생 John의 반란을 사주한다. 리처드왕은 본국의 반란 소식을 접하고 살라딘과 급하게 휴전협정을 맺고 귀국하다가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 5세에게 잡혀 신성로마제국에 넘겨진 후 거액의 돈을 지불하고 풀려난다. 리처드는 귀국 후 동생 John을 몰아내고 필립 2세에게 복수를 떠나는 중 화살을 맞고 사망한다.
1199년 John이 왕에 오르지만 대부분의 프랑스 영토를 뺏겨서 “실지왕”이란 오명을 얻는다. 복수를 위해서 군대를 일으키려고 돈을 요구하다가 귀족들에게 도리어 무릎꿇고 “국민의 대표만이 세금을 부과할 수 있다”는 내용의 대헌장 (Magna carta)에 서명한다. John 1세 이후 1258년 헨리 3세도 국가의 중요 결정은 15인 위원회와 상의해야 한다는 “옥스퍼드 조항”에 서명한다. 뒤이어 에드워드1 세는 시대의 변화를 감지하고 1295년 귀족과 평민이 모두 참석하는 의회를 유럽 최초로 출범시킨다. 그는 또한 왕실재판소를 만들어 귀족의 자의적인 재판을 금지한다.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 루이 9세는 재판권을 아예 독립시킨다)
대헌장의 정신은 훗날 1628년 국왕 찰스 1세의 권리청원(Petition of Rights) 서명, 1689 명예혁명때 월리엄 3세의 권리장전(Bill of rights)서명과, 다시 훗날 1787년 미국 독립후 미합중국 헌법 제정등 근대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영국이 의회 민주주의를 토대로 빠른 정치적 안정을 이룸에 따라 산업혁명이 영국에서 가장 먼저 시작하고 이를 바탕으로 대영 제국의 번영을 이루게 된다.
아래 그림에서 Henry II 부터 Edward II 까지가 앙주 왕조이고, 그 다음 Edward III 부터 Plantagenet 왕조라고 부르거나 혹은 앙주 왕조를 포함해서 플랜태저넷 왕조라고 하기도 한다.
<(앙주) 플랜태저넷 왕조 가계도 >
3. 백년전쟁(1337-1453)
1328년(아비뇽유수(1309-1377)기간), 프랑스 카페 왕조의 샤를 4세가 후대없이 죽었다. 새로운 왕을 찾아서 족보를 조사해 보니, 사촌인 발루아 왕조의 필립 6세와, 형제인 이사벨이 있었다. 당연히 이사벨이 혈연 관계로는 2촌대 4촌이니 훨씬 가깝지만 이사벨의 남편이 영국의 왕인 에드워드 2세라는 것이 걸림돌이었다. 이사벨에게 왕위를 넘기면 그 남편인 영국의 에드워드 2세에게 나라를 넘기는 꼴이 될 테니 어쩔 수 없이 4촌인 필립 6세를 왕으로 추대한다.
에드워드 3세는 이에 항의하여, 프랑스 모직 공업의 원재료인 양모 공급을 끊는다. 프랑스 필립 6세는 그 보복으로 영국 왕실의 유일한 영토인 아키텐 공국의 기옌 지방(포도주 산지)을 몰수한다. 이에 따라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고 1345년에 노르망디에 상륙해서 연전 연승한다. 그러나 1347-1350사이에 몽골군을 따라온 페스트에 전 유럽이 황폐화되어 전쟁을 잠시 멈춘다 (14세기 전체 세계 인구 약 3억5천만명중 1억명을 줄여서 17세기에야 이전 인구가 회복되었다고 한다).
다시 10년후인 1356년 에드워드는 프랑스왕 장 2세를 생포한 뒤 브레티니 화약(1360)을 맺고 노르망디와 아키텐 옛 영토를 회복하고 막대한 배상금을 받는다. 그러나 1364년 프랑스 샤를5세가 아키텐을 선동하여 영국이 다시 전쟁을 일으키지만 이번에는 프랑스가 승리한다. 이후 영국에서는 리처드 2세를 제압한 헨리 4세가 왕이 되면서 플랜태저넷 왕조(1154-1399)가 끝나고 랭카스터 왕조(1399-1461)가 시작된다.
프랑스의 샤를6세(1380-1422)가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자 프랑스의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냐크파 사이에 내분이 생기고, 영국왕 헨리 5세(1413-1422)는 이를 기회로 부르고뉴파를 매수하여 노르망디에 상륙하여 연전연승한 후 1420년 투라우 조약을 맺고 캐서린과 정략 결혼한다. 샤를 6세 사망후 왕위에 앉으려던 자신의 계획은 1422년 본인도 같이 죽는 바람에 나가레되고, 아들 헨리 6세가 왕이 되어 영국과 프랑스를 모두 다스린다.
당연히 프랑스의 샤를 7세는 이에 반발하고 아르마냐크파를 이끌고 프랑스 중남부에서 필사적으로 저항하지만 오를레앙 성에 포위되어 풍전등화의 운명이 된다. 그러나 돌연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신비주의 소녀 잔다르크(1412-1431)의 등장으로 전세를 역전한다. 종횡무진하던 그녀는 반대파인 부르고뉴파에 잡혀서 영국군의 군사재판에 넘겨지고 1431년 마녀로 몰려 화형당한다. 샤를 7세는 충분히 구할 수도 있었지만 그녀를 모른체한다. 왜? 이순신과 선조의 관계를 생각하면 된다. 그녀의 죽음에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냐크파는 분노의 한 몸이 되고 1453년 보르도를 함락하여 영국을 프랑스땅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백년전쟁을 종료한다.
<백년 전쟁 당시의 영국/프랑스 왕가 가계도>
4. 장미 전쟁(Wars of the Roses, 1455-1485)
백년전쟁은 프랑스 땅에서만 이루어졌지만 정작 사단은 전쟁 패배의 책임을 두고 영국에서 발생한다. 백년전쟁 종료 후 2년후의 일이다. 요크 가문은 랭커스터 왕조에게 전쟁 패배의 책임을 물어 왕위를 이양하라고 요구한다 (두 가문 모두 플랜테저넷 가문에서 분기된 형제 관계이니 랭커스터가 물러나면 당연 요크가에서 왕위 계승됨). 명분이 있어야 하니 50년도 더 된, 1399년 헨리 4세가 리처드 2세를 몰아내고 왕이 된 것의 정통성을 묻는다. 붉은 장미 랭커스터 왕가와 요크왕가는 각각 붉은/흰 장미를 가문의 문양으로 하였기에 장미 전쟁이라고 부른다.
치고받는 난타전(헨리6세->리처드3세->에드워드4세->헨리6세->에드워드4세)끝에 요크가를 열자마자 왕의 삼촌인 리처드 3세가 에드워드5세를 죽이지만 곧 헨리7세가 진압하고 튜더왕조(1485-1603)을 열면서 장미전쟁은 종료된다.
<장미 전쟁 당시의 영국 가계도>
<튜더 왕조 가계도: 천하의 바람둥이 헨리 8세의 위엄을 보라 !!!!>
5. 합스부르크 왕조 등장
이전에도 얘기했듯이 신성 로마제국은 여러 제후국들의 연합체로 운영되고 선제후(황제 투표 선거인단)들이 황제를 합의로 선출하였다. 따라서 황권이 강하지 못하였다. 또한 교황은 이탈리아의 영향력 확보를 위하여 주변국들(특히 신성로마제국)을 견제하였고 이에 따라 황권과 교황권은 계속 갈등/충돌관계에 놓이다. 신성로마제국은 오토왕조->잘리어왕조-> 호엔슈타우펜왕조로 연결되는데 (자세한 얘기를 하기에는 너무 자잘한 왕들이 많음 ㅠㅠ), 프리드리히 1세와 2세의 권한이 너무 커지자 한동안 황제를 선출하지 않는 대공위 시기(1254-1273)를 겪는다.
그 기간 중 교황이 호엔슈타우펜 왕조가 지배하는 시칠리아를 몰아내기 위해 프랑스 샤를왕자에게 SOS를 치고, 이에 샤를왕자는 신성로마제국 군대를 몰아내고 이탈리아 남부의 카를로 왕으로 지배한다. 이후, 이탈리아 남부는 통일 국가가 될 때까지 프랑스 영토로 남게 된다.
이에 충격을 받은 신성로마제국은 강력한 황제의 필요성을 느끼고 1273년 7선제후가 모여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루돌프 백작을 황제로 추대한다. 이 후 막스밀리언 황제는 제국의 안정화를 위해 거의 유럽 전 가문과 혈연관계를 맺음으로서 합스부르크가는 유럽 최대의 왕가가 되어 1273-1928 동안 유럽 전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의 아들 카를 5세는 프랑스 부르고뉴, 에스파니아, 신성로마제국과 모든 영토들을 물려받아 “해가 지지 않는 왕국”을 계승받는다.
<합스부르크 왕가 가계도>
프랑스 철학자 볼테르가 “신성로마제국은 신성하지도 제국이지도 않았다”고 얘기한다. 정확한 얘기이다. 10~16세기 동안 신성로마제국은 제후국들의 연합체에 불과하였다. 때로는 강력한 황권을 유지하면서 프랑스에 대립하기도 하기도 하고 여러 전쟁에서 동맹국으로 참여하기도 하였으나 대부분 이탈리아 반도에 영향력 유지와 교황으로 부터의 황제권 확보 (그러면서도 강력한 교황권 견제)에 신경을 쓴다. 아래 그림을 보면 알겠지만 수많은 깨알 같은 나라들의 연합체였기에 중앙집중적인 국가의 생성이 어려웠을 것이다.
6. 대항해 시대 (15~17세기)
대항해 시대 선구자는 포르투갈의 엔리케 왕자이다. 그 당시 "프레스터 존"이 아프리카에 건국한 천상 기독교 왕국이 있다는 전설이 있었고, 이에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엔리케는 탐험대를 파견한다. 그 중 에아네스가 이끈 함대는 1434년 아프리카 남단의 마의 북회귀선(23도 27분)의 보자도르 곶을 지나간다. 프톨레 마이오스는 지구는 편평하고 이 당시에 보자도르 곶을 지나면 낭떠러지로 떨어진다고 믿었다. 또한 그 과정에 아프리카 노예 무역 사업도 발굴한다.
1453년 오스만 제국이 동로마를 정복하면서 동서 무역을 금지함에 따라 인도의 향신료(후추) 수입이 불가능해졌다. 이에 포르투갈 왕은 아프리카를 돌아가는 항로를 개척할 것을 명령했고 바스코 다가마가 희망봉(cape of good hope)을 돌아가는 경로를 개발하고 포르투갈은 인도로 부터의 후추 판매를 독점하여 엄청난 부를 창출한다.
그 당시 이베리아 반도는 포르투갈, 카스티야, 아라곤, 그리고 남부 이슬람 그라나다의 4개 왕국이 지배하고 있었다. 1469년 카스티야 이사벨 1세(1474-1504)와 아라곤 페르난도 2세(1479-1516) 결혼으로 에스파냐(스페인)이 탄생한다. 왕권이 안정화되자 이사벨 1세는 유럽 최후의 이슬람 왕국인 그라나다(1231-1492)를 멸망시키고 유럽의 기독교화를 완성한다(레콩키스타). 711년 우미이야 왕조가 이베리아 반도를 넘어온 지 800년만의 일이다. 이슬람의 마지막 왕은 아름다운 “알람브라 궁전”을 지키기 위하여 군대를 자진 철수한다.
자신들보다 작은 나라 포루트갈의 성공에 자극을 받은 에스파냐의 이사벨여왕은 콜럼버스를 지원하여 1492년 출항하여 2개월 뒤, 콜럼버스는 바하마 제도에 상륙한다. 그가 인도라고 믿은 그곳에 후추는 없었다 (그는 사기꾼 소리를 들으며 찌그러든다). 그러나 대신 막대한 금/은 그리고 감자/옥수사가 유럽에 전해진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성공은 영국을 자극하고 영국도 1497년 북방항로를 개척한다. 콜럼부스의 땅은 아메리고 베스푸치에 의해서 새로운 땅임이 밝혀지고 “아메리카”라는 이름을 붙인다. 대항해의 꽃은 1519년 270명의 선원을 태우고 떠난 마젤란일 것이다. 비록 그는 항해 중 사망했지만, 1522년 3년만에 세계를 일주하고 18명만이 생존한 채 원래의 위치로 돌아온다. 지구는 둥글다는 것을 입증하면서, 근대의 시작을 알린다.
합스부르크 카를 5세와 이사벨라여왕의 아들 펠리페 2세때 에스파냐는 전성기(또한 몰락기)를 맞는다. 펠리페 2세는 오스만 제국과 1571년 레판토 해전을 통해서 무적함대라는 명성을 얻고 1580년 포르투갈까지 차지한다. 펠리페 2세는 앞서 얘기한데로 메리 1세(bloody merry)와 결혼한다. 엘리자베스 1세는 에스파냐를 견제하기 위하여 개신교세력들의 네들란드 독립 전쟁을 지원한다. 이에 펠리페 2세가 무적함대를 보내지만 프랑스 칼레 앞바다 전투에서 영국해군이 무적함대를 격침시킨다.
< 스페인 왕족 가계도 >
대항해 시대의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식민지들이다. 유럽 나라들은 아프리카에 무기를 팔고 노예를 사서 아메리카 농장에 팔고 설탕과 담배를 사서 유럽에 파는 삼각 무형 형태로 부를 착취하였다. 세상의 유일한 신에게 선택받았다는 신념을 가진 이들에게, 그 외의 존재들, 그들에게 미개해 보이는 존재들은 한낱 물건에 불과했던 것이다. 최근까지도, 혹은 현재까지도 말이다.
< 대항해 시대의 스페인/포르투갈 영토>
7. 종교 개혁
카톨릭의 권력화/세속화에 대한 여러 경고들이 주어졌지만 로마 교황청은 면죄부까지 판매하며 돈벌이에 집중한다. 15세기 초반 얀 후스가 이를 비판하지만 신성로마제국의 지그스문트가 개최한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찍혀서 화형당한다. 얀 후스보다 앞서 존 위클리프(1320-1384)도 교황청의 부패를 지적하고 성경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링컨이 샥샥 ^^) 정부를 만들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그도 이단으로 찍혀서 부관참시당한다.
1517년 마르틴 루터는 독일 비텐베르크 교회에 면죄부를 비판하는 95개조의 반박문을 붙이다. 이는 구텐베르크의 인쇄 혁명(1445)에 힘입어 유럽 전체로 퍼져나간다. 1521년 교황은 그를 파문하고 그를 따르는 “프로테스탄트” 가 생긴다. 그러나, 이 때만 하더라도 종교 개혁은 단순히 카톨릭이 초기 정신으로 돌아가는 반 부패 운동이었다.
그러나 장 칼뱅의 생각은 달랐다. 칼뱅이 1536년 제네바에서 <그리스도의 강요>를 발표한다. 그 내용은 “성서 지상 주의”와 “구원 예정설”였다. 이 두교리는 카톨릭의 교리를 직접적으로 공격한다는 측면에서 루터의 개혁운동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4년이 지난 1540년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는 개신교 귀족들에 종교 전쟁을 선포하지만 주변의 만류로 1545년 종교회의가 열려 예수회를 탄생시키고 1555년 제국회의에서 연방단위로 개신교/카톨릭을 선택하게 한다. 프랑스에서도 프랑수아 2세 시대인 1562년 카톨릭인 기즈 가문과 개신교인 부르봉 가문간에 위그노 전쟁(1562-1598)이 발발하고 샤를 9세때 카톨릭 세력이 위그노파를 학살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1572)” 사건이 발생한다(3~7만명 학살). 종교 갈등의 와중에 앙리 3세가 암살되고 개신교 귀족인 앙리 4세가 집권하면서 부르봉 왕조(1589-1830)이 시작된다. 앙리 4세는 프랑스의 분열을 막기 위해 카톨릭으로 개종하고 종교의 자유를 선언하는 “낭트 칙령”을 1598년 발표하면서 종교 전쟁을 마무리하지만 광신도 카톨릭에 암살당한다.
영국의 종교 개혁은 조금 특이하게 진행된다. 강국 에스파냐와 동맹을 위해서 헨리 7세는 아들 8세를 이사벨1세의 페르디난트 2세의 딸 캐서린과 결혼시킨다. 천하의 바람둥이 헨리 8세는 엔 불린과의 결혼을 위하여 로마교황청에 이혼 요청을 하지만 합스부르크가를 의식한 교황은 이를 거부한다. 이에 반발한 헨리 8세는 1534년 성공회를 만들어버린다 (이때 토마스 무어도 처형된다). 성공회는 로마와 별개이지만 교리는 여전히 카톨릭을 따른다. 캐서린의 딸 메리는 같은 카톨릭의 에스파냐 펠리페 2세(엘리자베스의 형부가 되지만 나중에 전쟁을 치름)와 결혼한 후, 개신교 신도를 색출/처형하면서 “피의 메리”라는 오명을 얻는다. 다행히 뒤를 이은 엘리자베스 1세는 개신교도였고 종교 탄압은 수그러든다.
8. 르네상스
오스만 제국이 발칸반도와 동로마 제국을 공략할 무렵인 1447년 구텐베르그는 금속활자를 발명하여 인쇄 혁명을 일으킨다. 이전에는 소수만 보유가 가능하던 책을 이제는 누구나 소유할 수 있게 된다. 인쇄 기술 후 최초로 대량 생산된 문서는 (구텐베르그) 성경이었고, 이것은 종교 개혁과 르네상스를 여는 밑거름이 된다.
십자군 원정의 실패와 페스트의 재앙은 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를 일으킨다. 또한, 십자군 원정 과정에서 부를 창출한 상업 세력과 봉건 영주의 지배로부터 독립된 여러 자치 도시가 출현한다. 오스만투르크가 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무너뜨린다. 그에 따라 이슬람을 피해 동방의 학문을 연구하던 많은 학자들이 이탈리아로 몰려든다. 이와 함께 이들이 연구하던 비잔틴/고대그리스 학문이 서구 사회에 유입된다.
Renaissance를 정확히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또한, 그 영향이 서구 사회에 긍정적으로 작용한 것인지 아닌 지에 대해서도 오늘날까지 결론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일단은 대략 14~16세기 동안 이탈리아 북부 지방(피렌체)에서 시작해서 플랑드르와 한자(Hanse)동맹의 북부 여러 자치도시로, 그리고 속도는 느리지만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간 그리스/문화의 재인식을 기반으로 한 문예사조를 얘기한다.
중세 초기에 유일신앙 기반의 문화 사조만 존재하다가 다시 인간을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르네상스 자체가 철학과 과학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여기기는 어렵다. 구글링을 해보면 호이징거, 손다이크 같은 많은 역사/과학사가들이 인정하듯이 르네상스 시기는 미래지향적인 창조보다는 과거에 대한 향수, 중세말을 알리는 신호탄 정도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그 이후에도 종교적 박해, 과학적 사실에 대한 탄압이 전혀 누그러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카톨릭 사제 코페르니쿠스는 1543년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에서 기원전 아리스타코스가 이미 얘기한 태양중심설 혹은 지동설을 다시 얘기하지만 학계와 종교계의 반대에 부딪히고1600년 브루노는 무한 우주론을 주장하다 화형을 당한다. 갈릴레이도는 1630년 지동설을 주장했다가 종교재판소에서 자신의 모든 주장을 부정하고 풀려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