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인식하는 물질, 존재와 의식... 자연철학적 접근
섬 - 장 그리니에 본문
섬 by 장 그르니에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무의 무화에 대해서 얘기한다. 존재자를 있게 만드는 그 무엇, 눈에 보이지는 않는 형이상학적인 그 무엇을 하이데거는 존재라고 부른다. 존재는 무의 모습이고 생활에 몰입된 일반인들은 그것을 느끼지 못하지만, 가끔 무아지경에서 무의 존재를 느낄 때가 있다 (그는 이 감정을 불안이라고 한다). 무를 느낄 때, 무는 무화되어 더이상 무가 아니게 된다.
그르니에의 섬은 무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 이 책은 그 내용보다도 까뮈가 쓴 추천 서문이 더 유명한 책이다. 서문에서 까뮈는 지드의 “지상의 양식”이 준 충격과 차원이 다른 계시를 “섬”이 가져다 준다고 얘기한다. 서평을 쓰기 위해서 여러번 책을 읽었지만, 기억에 남는 것은 슬프게도 서문밖에 없다.
지드가 이 세계의 아름다움이 주는 즐거움에 우리를 초대하였다면, 그르니에는 무인도처럼 황량하게 바다에 떠있는 섬에로 우리를 초대한다. 우리가 도착하게 될 섬은 어떤 모습일까.. 이 책은 그것을 얘기하지 않는다. 섬을 찾아서 멀리 여행할 필요가 없다. 섬은 지금 우리의 바로 옆에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며, 섬이 어떤 모습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공상을 나는 몇 번씩이나 해 보았다. 그리하여 나는 겸허하게, 아니 남루하게 살아보았으면 싶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렇게 하면 나는 ‘비밀’을 고이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
서문의 마지막에서 까뮈는 “길거리에서 이 조그만 책을 열어본 후 겨우 그 처음 몇 줄을 읽다 말고는 다시 접어 가슴에 꼭 껴안은채 마침내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정신없이 읽기 위하여 나의 방에까지 한걸음에 달려가던 그날 저녁으로 되돌아가고 싶다”라고 이 책을 만난 느낌을 묘사한다. 다 읽어 본 지금 나의 심경은... "낚였다"
이 책은 독특한 형식의 책이다. 수필집도 아니고, 소설도 아니고 철학서도 아니다. 그냥 자신의 생각이 이끄는 데로, 영혼의 목소리를 따라서 펜으로 세상을 그린 것 같은 책이다. 심오한 진리도, 감동적인 눈물도 없다. 그냥 담담히 자신 주변의 조그만 일들을 적을 뿐이다. 고양이 물리와의 일상과 안락사, 피해망상증 백정과의 일상과 그의 죽음, 인도라는 나라, 보로메의 섬들이라는 작은 꽃가게..
"저마다의 일생에서는, 특히 그 일생에 동터오르는 여명기에는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 순간이 있다" ...라고 그르니에는 자신이 최초로 만난 무의 경험을 얘기한다. 어린 시절 보리수 그늘 아래에서 하늘을 보고 있는데, 그 하늘이 허공속으로 삼켜져 버리는 묘한 경험이다. 명상을 하지 않아도 어느 몰입된 순간에 시공의 정지를 경험할 수 있다.
존재의 본질은 사실 무이다. 생물들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세상에 존재하게 되며, 수많은 선택을 하여 생존을 하게끔 운명지어져 있다. 그러나, 그러한 수많은 선택끝에 도달하는 섬, 그곳은 다시 무존재… 죽음이다. 생명은 잠깐의 반짝임 후에, 다시 어둠으로 가기 위한 다양한 길을 걸어갈 뿐이다.
“말없이 어떤 풍경을 고즈넉이 바라보고만 있어도 욕망은 입을 다물어비리게 된다. 문득 공의 자리에 충만히 들어앉는다. 내가 지나온 삶을 돌이켜 보면 그것은 다만 저 절묘한 순간들에 이르기 위한 노력이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르니에의 말이다.
그르니에는 어렸을 때 경험한 그 "공의 느낌"을 찾아서 평생을 헤맨듯 하다. 어릴 적 보리수 나무 아래서의 경험, 1934년 지중해의 햇빛에 의해 시공이 정지한 듯한 느낌, 인도의 영성적 생활에 대한 동경 등이 책의 군데군데 나타난다.
숨막히는 듯 아름다운 자연의 광경, 무한한 듯 보이는 바다, 우주를 바라보면서 내가, 인간들이 사라지고 생각이 멈춘듯한 순간을 느껴본 분이라면, 이 책에서 그르니에게 말하는 섬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약간은 동감할 것이다.
그렇지 않은 분들이라면 이 책을 읽는 것은 그냥 시간 낭비에 불과할 것이며 이 책을 만난 것 자체를 후회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읽어 본 분은 느끼겠지만 내용자체는 핵노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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