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인식하는 물질, 존재와 의식... 자연철학적 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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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istence_of_nothing 2021. 10. 7. 15:20

 

#잡담 #종교사 #철학사 #불교철학

오온 색(물질)/수(느낌)/상(인식)/행(행위)/식(정신), 식은 안/이/비/설/신/의로 색/성/향/미/촉/법을 만드는 정신작용이다. 오온의 세상은 "나"를 만들고, 그것에 집착(아집)하게 만든다. 

 

 

"늙음 · 죽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태어남에서 온다.

태어남은 어디에서 오는가? 존재에서 온다.

존재는 어디에서 오는가? 집착(取)에서 온다.

집착은 어디에서 오는가? 갈애(愛)에서 온다.

갈애는 어디에서 오는가? 느낌(受)에서 온다.

느낌은 어디에서 오는가? 접촉(觸)에서 온다.

접촉은 어디에서 오는가? 여섯 장소(六入)에서온다.

여섯 장소 어디에서 오는가? 정신적-물질적 현상(名色)에서 온다.

명색은 어디에서 오는가? 의식작용(識)에서 온다.

의식작용은 어디에서 오는가? 유위(行)에서 온다.

유위는 어디에서 오는가? 어리석음(無明)에서 온다.

어리석음이 모든 것의 원인이다."

 

즉, 만고의 근원은 어리석음으로 망상과 실재를 혼동하는 데에서 시작하므로, 실재를 바로 보기 위해서 팔정도(정 견/지/언/업/명/진/념/정)를 행해야 한다. 이러한 가르침을 사성제(고/집/멸/도)라고 부른다.

 

 

석가모니(붓다=부처)는 자신의 가르침을 제자에게 설하여 "니까야"와 "아함경"을 만든다. 그러나, 몇대에 걸쳐서 구전으로 전승되어 그 초기적 의미의 해석에 따라 보수적 해석의 상좌부와 진보적 해석의 대중부로 근본 분리가 발생하고, 다시 20개의 세부 부파로 갈라지는 부파불교, 아비달마 불교시대에 이른다. 붓다의 가르침과 계율을 경, 율이라고 하며 여기에 제자들의 해석인 론을 더해서  삼장(경/율/논)이라고 한다.

 

 

상좌부는 아공법공, 즉 "나"는 존재하지 않지만 객관적 존재 혹은 그 존재 원리로서의 본질인 "법(다르마)"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설일체유부"와 삼세(과거/현재/미래)에 걸쳐 존재하는 본질적인 존재를 거부하고 생성으로서의 현재만을 인정하는 "경량부" "독자부" 등이 있었다. 

 

불멸 400년, 기원을 전후로 해서 아공법공, 세상 모든 것은 연기에 의한 일시적인 상에 불과하다는 "대승불교"가 발흥하기 시작한다. 또한 소승이 개인적 해탈을 통해 윤회의 사슬을 벗어나는 "아라한"이 되는 것을 추구하는데 반해서 대승은 중생 구제를 통해서 해탈하는 "보살"이 되는 것을 추구한다. 아라한은 a(없다)+rahan(탐심), 즉 탐심이 없는 자를 의미하고, 보살은 bodhi(깨달음)+sattva(생명체)로 깨달은 자를 얘기하니 둘의 차이는 크지 않다. 붓다는 먼저 본인이 아라한이 된 후에 보살의 행보를 따른다. 

 

대승 불교의 주장은 색즉시공/공즉시색으로 대표되는 "반야바라밀다, 반야심"경에 축약되어 있다. 초기의 어렴풋한 대승이론은 2~3세기의 용수(나가르주나)보살에 의해서 실체론과 단멸론 모두를 부정한 붓다의 사상을 "공"사상, 중도 사상으로 정리한다. 색은 공인것과 마찬가지로 공은 색이다, 세상 만물에 본질로서의 자성은 없지만(무자성), 이들은 없는 것이 아니라 연기에 따라 변화하는 상을 만든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는 애매모호함, 을 "중론송"에서 얘기하며 이 주장을 하는 이들을 "중관파"라고 부른다. 

 

 

"여러 인(因)과 연(緣)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법(法: 존재)이다. 나는 이것을 공하다(無)고 말한다. 그리고 또한 가명(假名)이라고도 말하며, 중도(中道)의 이치라고도 말한다. 단 하나의 법(法: 존재)도 인과 연을 따라 생겨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일체의 모든 법이 공하지 않은 것이 없다."   - 중론송

 

인도의 굽타 왕조는 자신들의 왕권을 신의 권위(왕=비슈누의 화신)를 빌려 강화하기 위하여 힌두교를 장려한다. 그러나, 그들은 불교를 탄압하지는 않았기에 대승불교의 주된 이론(후기 대승불교)은 굽타 왕조 시기에 완성된다. 이 시기에 중관 사상에 "여래장"과 "유식"사상이 더해져서 대승의 기본 골격이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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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실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실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정신 혹은 영혼이란 본질로서 존재하는가 아니면 육신의 죽음과 함께 혼과 백은 흩어져 사라지는 것인가?
연기의 사슬에 의해서 상들이 맺어진다면, 그 연기의 사슬을 이루는 본질적인 요소는 무엇인가? 우주가 연기작용으로 돌아간다면 연기는 어디에서 어떤 인연에 의해서 시작되었는가?

 

인간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쩔수 없이 위와 같은 많은 형이상학적인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많은 질문들을 내뿜는다. 붓다의 제자들도 수많은 질문들을 하였지만 

부처는 그러한 형이상학적인 문제에는 거의 언급을 하지 않았다. 붓다가 그러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는 그 사실에도 다양한 추측들이 존재한다. 실제로 붓다가 그러한 형이상학적인 논변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의미있는(실천이 가능한) 일에만 집중했다는 파도 있고, 붓다는 그러한 모든 답변을 알고 있었지만, 그 대답을 듣고 우매한 대중들이 망상에 사로잡힐까봐 피했다는 추측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주제들 중, 실천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본질적인 질문들도 존재한다. "내가 실재가 아니라면, 그리고 나의 인연이 이 세상으로 마감이라면, 왜 우리들은 선한 행동을 해야 하는가?" 인간들은 누구나 선한 행동을 해야 한다고 막연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선한행동이 무엇인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왜 나는 선하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논리적으로 답변하기는 쉽지 않다. 

 

붓다는,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기 전에는 영원히 존재하는 본질적인 자아, 아트만을 부정했다. 그러나, 무아론은 자칫 단멸론, 이번 생은 내가 존재하는 마지막 생이고, 다음 생은 새로운 인연이 시작한다.., 으로 연결되고, 단멸론은 도덕의 부재를 초래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본질론도 안되고 단멸론도 안된다면, 도대체 윤회의 의미는 무엇인가? 어차피, 기억도 못할 다음생에서 현 생의 행위의 의미는 무엇인가? 어차피, 나는 없는데, 이번 생에 득도를 해서 아라한이 된 나는 무슨 의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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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즉시색, 여기서 색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유식사상은 공한 세상이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설명하고자 하는 노력에서 발생한다. 유식사상의 해석을, 세상 모든 일은 마음 먹기 나름이다라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지만, 많은 자료들은 유식사상은 극단적 관렴론인 유심론에 근거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유식무경, "마음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의 유식철학은 일견 우피니샤드 베단타의 아트만 혹은 상키야 철학의 푸루샤를 연상시킨다. 유식사상은 아뢰야식(8식)과 말라식(7식)을 도입하여, 업(다르마)이 아뢰야식에 저장되고, 아뢰야식은 업(종자)을 기반으로 말라식에 작용하여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을 펼쳐보인다. 영화 "매트릭스"처럼 말이다. 아트만을 배제하면서도 윤회와 업의 의미를 살리려는 절묘한 한수 처럼 보이지만 아트만과의 차이가 애매모호하기도 하다. 성유식론은 유가행자들에 의해 전파되는데 미륵(270-350,Maitreya), 무착(310-390,Asanga), 세친(Vasubanda,320-400) 보살들이 그 체계를 완성한다.

 

 

아뢰야식/말라식의 작용에 따라 "안/이/비/설/신/의"의 6식과 6식이 바라본 6경을 만든다. 이것들은 원래 실체가 없는 마음이 만든 상이므로 원래가 허망성, "변계소집성"을 띤다. 인간들은 연기적 작용에 따라 변계소집성의 상을 실제로 있는 것처럼 분별하고 인식하는데 이것을 "의타기성"이라고 한다. 객관적 대상으로서의 변계소집성과, 주관적 인식 작용으로서의 "의타기성" 모두가 실재가 아님을 깨닫는 것을 "원성실성"이라고 하며 이 세가지를 유식에서는 삼성이라고 부른다. 유식사상의 대표적인 경전이 AD300년 전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해심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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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의 죽음은 그를 따르던 많은 제자/대중들에게 큰 정신적 공백으로 다가온다. 비록, 석가모니는 자신을 숭상하지 말고, 스스로 해탈의 경지에 이르라고("자신을 등불삼고 자신에게 의지하되 남에게 의지하지 말라") 타이르지만, 일부 제자/대중들은 자신들의 능력을 불신하고, 석가모니의 신성에 기대려고 한다. 

붓다의 사리는 8등분하여 각 종족에 나눠져 사리탑을 세운다. 

 

부처 자신은 제자들에게 많은 인간적인 모습과 한계를 표방하였지만, 종교로 승격화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화엄경에서는 득도의 순간에 온 몸에서 빛을 발하며 온 우주에 퍼져나가는 "비로자나불"(Vairocana), 우주의 창조주로 승격된다. 비로자나불이 온 세상을 비추면서 나타나는 화려한 정토세상, 연화장 세계의 장대함도 묘사된다. 화엄경에서 붓다는 온 우주에 스며들어 있는 범신론적인 모습, 법계의 법신으로 묘사된다. 화엄경에는 또한, 수많은 보살들과 그 역할들이 소개된다.

 

또한, 묘법연화경(법화경)에서 그는 이미 오래전 득도하였지만, 중생 구제를 위해서 다시 나타난 법신의 모습으로 등장하며, 법의 본질로서 오랜시간을 존재하는 것처럼 묘사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관세음 보살을 통해서 경 자체의 신비한 위력을 얘기하며, 자신의 노력 외에 외력에 기대어 해탈을 할 수 있는 방법도 얘기하고 있다. 

 

"여래장경"에 모든 중생은 여래장이라고 한다. 여래는 진리에서 온자, 진리를 깨달은 자, 진리와 같아진 자등으로 해석되며 붓다 혹은 부처와 동등한 의미로도 해석된다. 내 안에 부처가 될 수 있는 자질, 불성이 있다는 의미로도 해석이 되며 (열반경의 "일체중생실유불성"), 내 안에 혹은 우주 전체에 부처(법신)가 영원세세 상주한다(여래상주)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본질로서의 참나/진여/진아에 관한 해묵은 논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

 

현재 불교라는 이름으로 믿고 행하는 것들이, 붓다의 직접적인 가르침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데리다는 세상에서 행해지는 모든 것들은 텍스트이며 텍스트의 바깥은 없다고 얘기한다. 텍스트는 자체의 생명력을 가지고 떠돌아 다니며, 그 자체로 변화/진화를 거듭한다. 붓다가 원했던 원하지 않았던, 오늘날 많은 이들은 자신의 구원과 해탈을 위해서 공양을 하고, 염불을 하고 기도를 한다. 

 

어차피,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우리가 동양 사상을 정확히 이해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는지라고 누가 묻는다면, 나는 글쎄요라고 대답할 것같다. 오늘날, 최근 100년 동안의 과학적 진보는, 오래전 붓다가 한 이야기에 대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얘기할 수 있게 한다. 그것이, 과학 공부를 하는 이유이자, 재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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